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근대철학의 동요와 위기 - 4. 흄 : 근대철학의 극한, 주체의 해체, 주체철학의 해체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근대철학의 동요와 위기 - 4. 흄 : 근대철학의 극한, 주체의 해체, 주체철학의 해체

건방진방랑자 2022. 3. 24. 09:26
728x90
반응형

주체의 해체, 주체철학의 해체

 

 

흄은 버클리가 남겨둔 유보조항을 비판하면서 경험주의를 좀더 극단으로 밀고 갑니다. 버클리는 지각된 것을 관념이라 하고, 지각하는 것을 정신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을 보고 사과로 지각한다면 사과는 관념이고, 그걸 지각한 것은 정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고 하며,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지각하는 정신만은, 지각되는 게 아니지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지각하는 주체’, 인식하는 주체(데카르트)정신이란 이름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흄은 이런 예외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흄은 사물을 보고 생긴 것은 인상이요, 그 인상의 기억이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게 관념이라고 합니다. 사과가 지금 앞에 없지만 예전에 본 사과를 떠올리거나, ‘사과밭이란 말을 만든다면 그건 관념인 거지요. 인상과 관념의 차이는 사고로 눈을 잃은 장님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선천적인 장님은 사과란 말을 들어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는 인상도, 관념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고로 눈을 잃은 장님은 사과란 말을 듣고 빨간색의 먹음직스런 과일을 떠올릴 수 있지요. 그는 인상은 갖지 못해도 관념은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인상은 직접적인 것이고 관념은 한번 거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합니다. 그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입니다. 흄에 따르면 정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다만 관념과 인상의 다발만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슬픈 감정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서움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동그란 컵에 대한 관념이 나타나기도 하는, 이러한 것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그리고 그것들이 묶여 있는 것들의 집합으로밖에 정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흄은 ’ ‘주체’ ‘자아’ ‘정신으로 불리던 것에 대해 그것은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건 다만 인상이나 관념이 번갈아 스쳐가는 극장, 그것도 무대조차 따로 없는 극장 같은 거라는 거죠. 결국 라는 게, ‘정신이라는 게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토탈 리콜이란 영화를 보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뇌에 주입함으로써, 화성 총독의 친구인 주인공이 총독의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자가 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지요. 동일한 사람이 인상과 관념, 그 기억(리콜)의 다발이 바뀜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라고 하는 항구적인 주체가 과연 있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되지 않겠습니까?

 

이리하여 흄은 정신이나 주체라는 범주를 해체하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로크나 버클리도 자명한 것으로 간주했던 근대철학의 출발점을 말입니다. 이와 같은 흄의 주장은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 버클리식의 유명론정신이나 주체에 대해서까지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근대적 문제설정 속에서 유명론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라는 범주를 해체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가면

오직 인상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경험주의자의 말은 이렇게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인상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비슷하게도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슨 말일까? 가면 뒤에는 가면을 쓰는 얼굴이 있지 않은가? 아니면 얼굴 없는 허공이, 배트맨도, 쾌걸조로도 가면 뒤에는 평범한 시민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가면을 쓰는 순간, 그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배트맨이고 조로일 뿐이다. 가면을 쓴 채로 그가 평범한 시민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해 보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엄마 앞에선 아이가 되고, 학생 앞에선 교사가 되며, 연인 앞에선 그의 커플이 된다. 아이의 가면, 교사의 가면, 연인의 가면, 그 각각의 순간에는 그 가면만이 있을 뿐이다. 가면을 벗으려 하면 상대방은 하나같이 놀라고 당혹하며, “정신차려!”하고 외친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가면들을 바꾸어 쓰면서 다른 인물이 되어 산다. 그 가면들 뒤에 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각각의 순간에 어떤 가면을 쓴 인물만이, 가면만이 있는 것이다. 각각의 순간마다 우리의 모든 얼굴은 하나의 가면인 것이다. 인상주의, 그것은 어쩌면 니체가 말한 가면의 철학은 아닐까?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