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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철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철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건방진방랑자 2022. 3. 2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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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철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요약합시다.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철학적 사고의 틀을 변환시킵니다. 우선 주체와 대상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해체합니다. 주체도, 대상도, 인식도, 진리도 모두 실천이란 개념에 의거해 새로이 정의내리죠. 진리 개념의 변환을 통해서 그는 근대철학이 추구하던 확고하고 불변적인 진리라는 목적 자체를 해체합니다. 또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자명한 주체 역시 해체해 버립니다. 이제 주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이란 것이 명확해지고, 그 결과 주체 진리라는 짝에 의해 형성되었던 근대적 문제설정 자체가 해체됩니다. 나아가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내는 사회 역사적 요인을 다루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합니다. ‘역사유물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맑스의 이러한 해체는 근대적 문제설정 내부에서 그 딜레마와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행해진 게 아니라, 그 외부로부터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란 점에서 흄의 그것과 성격을 크게 달리합니다. 이처럼 해체가 다른 차원의 개입으로 인해 이루어짐으로써 해체는 파괴(회의주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개념과 문제설정의 구성을 통해 예전의 문제설정을 해체하는 식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이 새로운 문제설정은 지식과 주체, 역사 등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포함하고 있었고, ‘진리’(영원한 진리!)의 문제를 벗어나 현실성과 힘이란 차원에서 지식을 다루는 방법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식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지식의 형성과 기능을 다루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맑스는 진리를 극단의 회의에 몰아넣고 스스로 당황했던 흄과 달랐습니다.

 

다른 한편 주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 또한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주체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상이한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테제를 통해, 이제 그러한 조건에 대한 연구에 의해 분석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는 인간이란 주체를 이해하기 위해선 심리학에 기초해야 한다는 발상(흄조차 여기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지요)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맑스는 실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근대적인 문제설정 자체를 해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근대철학을 벗어나는 개념들과 사고방법을 포함하는 새로운 문제설정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혁신을 가능하게 한 탈근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상경주가 아니라면, 대열에서 벗어나 너무 앞서 나간 사람은 본대를 찾아 뒤돌아오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앞서 나간 사람은 언제나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다 미쳐버리거나 죽었지요. 아니면 다시 후퇴하거나요. 철학자도 여기서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맑스 역시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맑스는 헤겔의 영향이 아직 독일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시대, 산업혁명이 독일에서 아직 본격화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살고 있었죠. 그러니 근대가 만개하기도 전에 근대를 넘어서 사고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우리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었겠습니까? 맑스는 세인들의 이해를 훌쩍 뛰어넘은 탁월한 사상가가 되기를 거부하지요. 그에게 사상이란 대중 자신의 것으로 되어야 할 혁명의 무기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대중과 결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정치경제학 비판시리즈를 계획했다가 1권을 내고는 포기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것은 엥겔스 말고는 그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본1권의 서문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론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가공하려는 맑스의 힘겨운 노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맑스의 사상을 더욱더 대중화하려는 노력은 이후 엥겔스가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기 위해선 근대적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사상을 번역해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적 개념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사고방법을 설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즉 맑스 자신이 자신의 사상을 근대화해야 하는 역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번역이 정말 말 그대로 번역이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속에 자신의 사고가 포섭되지 않는 그런 순수한 번역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맑스철학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맑스는 진리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이론이 과학일 것이라는 혹은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학주의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스스로 갇혀 있습니다. 누구나 어떤 이론이든 과학일 때만 정당한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자신의 이론은 과학이 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대중과의 결합을 추구한 사상가라면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실천의 개념 역시 근대화됩니다. 즉 진리를 실천의 문제로 파악하려는 맑스의 명제는 물질적 대상과 지식이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실천을 통해 검증한다는 지극히 근대적인 의미로 해석되게 됩니다. 레닌이나 심지어 엥겔스 역시도 이 점에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학주의 안에서 실천 개념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마 거기 말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유물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철학적 유물론이는 근대적인 대상, 물질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근대적 유물론이지요 으로 복귀하게 됩니다(이렇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입니다).

 

반면 이러한 과학주의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로서 실천 이란 개념을 중심에 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흔히 실천철학이라고 불리는 흐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루카치, 그람시, 코지크(K. Kosík) 등의 철학자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이 역시 어떤 불변하는 본질(존재론적 본질!)을 갖는 주체로 인간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주체철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맑스의 이 탈근대적인 실천개념을 좀더 탈근대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한 번도 맑스주의자였던 적이 없었고, 맑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한 적이 없는 비트겐슈타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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