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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역사적 구조주의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역사적 구조주의

건방진방랑자 2022. 3. 27.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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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구조주의

 

 

다른 한편 근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 인식틀)는 고전주의 시대와 달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칸트의 사물 자체처럼 표상이 닿지 못하는 외부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도 예전에는 분류학에 그쳤지만, 이제는 생명이라는 실체를 중심으로, 그것을 위해 기능하는 기관이나 특징을 근거로 새로 정리됩니다. 나아가 이 실체 자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그로 인해 역사라는 개념이 나타난다고 하지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이라는 범주가 바로 그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개념은 이 근대라는 시기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푸코는 서로 상이한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금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동일하게 불리는 동일자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이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선을 사실 동일자 자신의 역사를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로 고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지금 현재 포섭과 배제의 선을 긋고 있는 이성이란 동일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고,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가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확고하고 꿈쩍도 않을 것 같은, 현존하는 서구적 이성의 지배를 균열시키고 뒤흔들려는 비판적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서구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통해서 나는 외관상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대지에 불안정성과 틈새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대지는 우리의 발 밑에서 다시 한번 불안하게 꿈틀거릴 것이다. 말과 사물서문

 

 

이러한 사상은 분명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입니다. 사고 전반을 규정하는 무의식적 기초를 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찾아내려는 시도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한 역사적 시기마다, 모든 사고의 선험적 기초를 이루는 일종의 선험적 구조인 셈입니다. 이 점에서 이 저작은 특히 구조주의적이라고 간주됩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와 푸코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레비-스트로스가 다양한 사고법들 전체를 특징짓는 가장 심층적인 보편구조를 찾아내려 한 반면, 푸코는 반대로 이 다양함을 다양함으로서 인정하려 한 데 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이 다양함을 하나의 선험적 구조(‘야성적 사고’)로 포괄하려는 시도를 또 하나의 동일화하려는 시도요, 동일자의 논리라는 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상을 단순히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곤란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푸코의 이 시도를 관통하는 멘탈리티는 분명 사고 밑바닥의 어떤 심층구조를 찾아내려는 것이란 점에서 구조주의적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역사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특징을 역사적 구조주의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얀 흑인

인간은, 특히 서양의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구분하는 데 매우 집요한 집착을 보여왔다. 그래서 인간은 ~한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다른 동물에 없는 자기만의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인간에게 없는 동물들의 수많은 능력들을 잊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이성적 동물’ ‘언어적 동물’ ‘사회적 동물’ ‘놀이하는 동물등등의 수많은 기이한 동물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모호한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가혹했는지도 모른다. 흑인들, 그들은 오랫동안 인간이 아니었다. 처참한 생활을 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 인간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을 동물처럼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저 기이한 동물들의 규정에는 항상 피부가 하얀 이란 말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자신의 피부색을 원망하지 않을 흑인이 대체 어디 있었을 것인가! 돈과 기술만 있다면 피부를 흰색으로 갈아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피부를 수세미로 밀어보는 안타까운 노력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성공한 흑인 마이클 잭슨의 얼굴을 저렇게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백인들의 가치, 흰 피부의 가치를 거꾸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하얀 흑인, 그것은 배제와 억압 속에서 타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동일자의 가치척도를 내면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자는 이처럼 자신이 핍박한 타자들의 피부, 타자들의 내면에까지 침투한다. 백인들의 얼굴을 점점 닮아 가는 우리의 얼굴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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