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확산과 수직적 확대
하늘의 나라여, 들판의 잡초처럼 퍼져라
❝겨자씨의 비유는 천국운동의 확산을 확신하는 사회적 맥락에서 조명될 수도 있지만, 인간정신의 고양을 상징하는 실존 내면의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겨자씨에서 백향목으로의 질적 비약 속에는 구약에 나타나는 다양한 전통적 관념들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인간정신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자의 대붕의 비유와도 비교될 수 있다.❞
제20장
1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하늘 나라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하여주소서.” 2그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도다. 3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4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을 내니,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나니라.”
1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what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2He said to them, “It is like a mustard seed. 3It is the smallest of all seeds, 4but when it falls on tilled soil, it produces a great plant and becomes a shelter for birds of heaven.”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백향목의 이미지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그 무엇이다. 사막지대에는 높은 것이 없다.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라는 높고 영원한 석축물을 만드는 그 마음에도 고딕건물을 짓는 사람들의 향상심(向上心)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다. 피라미드도 그들에게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백향목의 다른 표현이었다. 에스겔 31장에 나오는 이의 예언을 보라.
너 사람아! 이집트 왕 파라오와 그 무리에게 일러라! 네 큰 위엄(威嚴)을 무엇에 비교할까? 가지가 멋지게 우거져 그들이 좋고 키가 우뚝 솟아 꼭대기 가지는 구름을 뚫고 뻗은 레바논의 백향목 만큼이나 크다고 할까? (겔 31:2~3)
솔로몬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는 백향목은 지상의 왕인 동시에 신적인 권위의 구현체였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의 주석가들은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거대한 나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이며, 세계수(世界樹)이며, 메시아왕국이며, 묵시문학적 나무(the great apocalyptic tree)라고 해설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해석이 오히려 진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자료와 마태ㆍ누가의 공통자료인 큐자료와 마가자료, 이 셋을 비교하여 보면, 도마자료는 큐자료보다 마가자료에 오히려 더 가깝게 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누가에 없고 마가에 나타나는 ‘가장 작은 - 가장 큰’의 최상급 대비(superlative contrast)가 드러나 있으며, 정원이나 채마밭의 원예가 아닌 야생의 상황도 마가에 더 접근한다. 아버지의 나라를 상징한 선행의 가르침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속선상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크로쌍은 마가의 문장구조를 분석하면서 마가의 최상급 대비는 예수의 오리지날한 로기온 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마가 자신의 삽입이라고 추론한다(In Parables 46). 그러나 그러한 추론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복음서기자들의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예수의 원래 의도가 어떠했든지간에 그러한 대비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 바울의 이방 선교센터였던 안티옥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사실 그레코-로만 세계에 16개나 존재한다. 그 중 다섯 개가 시리아에 있다. 사도행전 13:14에도 피시디아 안티옥(Antioch of Psidia)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별개의 도시이다. 바울의 안티옥은 오론테스 강이 흐르기 때문에 오론테스 안티옥(Antioch on the Orontes)라고도 불린다. 알렉산더 대왕의 장수 셀레우코스1세(Seleucus I Nicator)가 셀레우코스왕조를 세우면서,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도시는 그의 제국의 서쪽 수도였다. 폼페이우스가 BC 64년에 이 도시를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자유도시가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곳이 지중해로 유입되는 오론테스 강의 안티옥항구었다. 바로 이 다리 부근에서 배들을 접안시켰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멋드러진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온 적이 있다. ‘아미메토비온(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특별한 삶)’의 두 주인공,
『장자』라는 전국시대의 위대한 문헌을 펼쳐보면 그 맨 첫머리에 구만리 장천을 날아가는 대붕(大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 대붕의 소요는 ‘곤(鯤)’이라는 물고기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北冥有魚, 其名爲鯤].” “바로 이 물고기 곤이 변하여 새가 될 때 그 이름을 붕이라 하는 것이다[化而爲鳥, 其名爲鵬].”
이 대붕의 등길이가 몇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날개를 한번 퍼득여 수면을 치고 날으면 3천리, 한번 떴다 하면 9만리(九萬里)를 간다. 그런데 『이아(爾雅)』나 『설문(說文)』에 ‘곤’을 해설하기를 ‘물고기로 태어나기 이전의 어란을 가리킨다[魚子未生者日鯤. 鯤卽魚卵]’라고 했다. 명태 알주머니에 들어있는 알갱이 하나가 곧 곤이다. 곤이야말로 겨자씨보다 훨씬 작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곤이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도 같은 대붕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매크로 코스모스가, 고양된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서는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다. 명태 알 하나가 천지를 소요할 수 있다. 이것은 건 우주를 호령할 수 있는 육척단구(六尺單軀) 인간의 정신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장자의 메타포이다. 물론 예수의 겨자씨 비유도 이러한 장자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보통 겨자씨의 비유는 천국운동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해석되어 왔다. 천국운동의 작은 씨라도 뿌려만 놓으면 결국 레바논의 백향목이 우거지듯 거대한 결실을 맺고야 만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도마텍스트에 있는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이라는 구문은 이 비유가 사회적 맥락에서 발설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 내면에 관한 것일 수 있다는 심증을 굳게 해준다. 예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적 토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국 그 내면의 세계는 하늘의 새가 깃들 수 있는 백향목과도 같이 웅장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붕의 소요와도 같은 정신의 고양(高揚)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중의 새’가 아닌 ‘하늘의 새’라는 표현도, 하늘적 인간정신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씨의 썩음’을 씨의 트랜스포 메이션의 결정적 계기로 규정한다(고전 15:35~44).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바울은 부활을 육과 영의 희랍철학적 사유로써 정당화시키고 있다. 육의 썩음이 곧 영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겨자씨의 썩음이 곧 백향목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겨자씨 초본 → 관목 → 교목에로의 질적 비약은 ‘썩음’ 혹은 ‘죽음’이라는 계기로써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 안티옥 고고학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는 오론테스강의 신상, 원쪽 어깨로 히마티온을 걸치고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대부분의 강의 신이 여성인데, 남성이라는 것도 독특하다.
예수는 과연 이러한 바울의 논리를 선포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팔레스타인에 가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겨자씨를 연구해 보았다. 예수가 비유에서 활용한 겨자는 야생식물로서 학명이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라고 하는 흑겨자이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황갈색의 겨자는 브라씨카 준케아(Brassica juncea)라는 것으로 히말라야 원산인데 미국·캐나다ㆍ헝가리ㆍ영국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동양에서 약재로 쓴 것은 백개자(白芥子, Sinapis alba)이다. 흑겨자는 근원적으로 재배의 대상이 아닌 잡초에 불과하다. AD 200년경에 편찬된 유대인 랍비의 계율서, 『미쉬나』에도 겨자씨는 정원이나 밭에는 뿌려서는 안되는 금지종에 속해 있다. 흑겨자는 벌레나 이파리 병을 타지 않으며 악조건의 기후에도 자유롭게 번식하며, 타식물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기 때문에 밭을 금방 망쳐버린다. 거대한 평원에서 잡초로서 자유롭게 자라지 않으면 아니 되는 운명의 종자인 것이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야생의 겨자의 특성을 생각할 때 예수의 비유는 본시 매우 상식적인 의미맥락에서 이루어진 메타포였을 것이다. 자기가 선포하는 천국운동의 잡초적 성격, 즉 아무데나 씨를 던지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라 평원을 휘덮고 만다는 대중운동적 신념을 말한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수평적 확산을 말했는데 복음서기자들은 이것을 수직적 확대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한 변형태에 도마는 인간 정신의 고양이라는 내면적 성격을 추가하였는데, 결국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바울의 부활론과 함께 종말론적 맥락을 첨가했을 것이다.
▲ 바울의 선교센터 뒷산에 있는 조각인데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마리아상으로 숭배하였다. 그러나 원래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카론(Charon) 상이라고 한다. 카론은 저승의 뱃사공인데 반드시 돈을 주어야만 스틱스강(the Rivers Styx)을 건네준다. 그래서 시체의 입에 동전을 넣는 습속이 생겼다. 이 산에 원래 묘지가 많아 카론상이 조각되었는데, 초기기독교인들이 이곳에 많은 동굴교회를 정착시키고 기독교성지로 삼게 되면서 그 성격이 변질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 기독교인들이 카론의 얼굴을 깎아 성모 마리아로 변신시키고 숭배하였다. 지금도 마리아상으로 믿고 촛불 켜고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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