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세계정복의 의미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자기 스승의 구태의연한 형이상학적 세계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관념이 아닌 이 시공, 이 땅 위에 개척하는 데 광분한 패기 넘친 젊은이였다. 젊은 알렉산더는 BC 334~324의 10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했다. 그는 원래 마케도니아 사람이라서 아테네중심의 희랍질서로부터는 변방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희랍질서를 편견없이 동경했고, 그가 정복하는 모든 곳마다 희랍의 모든 것, 도시, 언어, 철학, 가치관, 삶의 방식, 종교, 예술, 과학 등 그 모든 것을 전파했다. 그가 10년 동안 정복한 세계는 아시아와 시리아,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사마르칸트, 박트리아와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까지를 포괄하는 방대한 영역이었다.
그의 비망록을 보면 그는 정복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그가 정복한 지역을 영구히 다스리는 데 체계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아직 만 33세도 채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그의 젊음은 어떠한 고착적인 발상도 허락하질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복하는 모든 지역마다 그 지역이 존숭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문화ㆍ종교ㆍ예술을 존경해주었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은 희랍문화의 전파와 동시에 좁은 폴리스공동체에 갇혀있던 희랍 도시국가문명의 종식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거꾸로 동방으로부터의 모든 종교나 예술이나 가치관, 새로운 문명의 요소들이 역류되어 왔다.
동·서문명의 대거 융합으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등장하고 다양한 가치관의 용인과 함께 보편주의적 사고가 생겨났다. 알렉산더 자신도 희랍인들의 우월의식에서 본다면 야만적이기만 했던 이방인의 두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의 마케도니아 장수들도 이방인의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융합으로 비로소 사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류 보편’(mankind as a whole)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BC 323년 알렉산더대왕의 죽음으로부터 BC 30년 클레오파트라의 죽음(로마가 이집트를 병합)까지를 헬레니즘 시대(the Hellenistic Period)라고 부르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이 헬레니즘문명의 소산이라고 하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다각적인 고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디 흑룡강성의 북부여나 비류수(沸流水)변의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생겨난 종교는 아니라는 것이다.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알렉산더대왕의 대리석 석관. BC 325~311사이, 현 레바논의 시돈에서 제작.
기독교의 출발은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예수의 사후 초대교회는 이미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 주도권을 장악해갔으며, 이들은 기독교를 유대인이 아닌 헬레니즘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이라는 사상가였다. 바울은 철저히 헬레니즘문명권에서 성장한 헬레니즘 사상가(a Hellenistic thinker)였다. 그리고 AD 100년경에는, 최소한 2세기 초반에는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헬레니즘세계의 이방인들만의 종교로서 성장하여갔던 것이다. 물론 초기 기독교의 모든 문헌들도 헬라어, 즉 헬레니즘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코이네 희랍어로 쓰여진 것이다. 바울의 서간도 모두 희랍어로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독자들에게 기독교를 헬레니즘의 틀 속에서, 헬레니즘적 사유체계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헬레니즘시대의 산물이면서도 헬레니즘적 사유를 철저히 거부한 측면이 강하다. 아니, 거부했다기보다는 헬레니즘적 상식의 세계에 도전하면서, 헬라화된 로마세계에 새로운 논리와 시각과 활력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사의 전개는 어디까지나 졸본부여나 예맥의 장이 아닌, 에베소, 안티옥, 알렉산드리아 등 지중해연안의 헬레니즘의 장에서 끊임없이 헬라스사상과의 교섭을 통해서 성장하여갔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다양한 기독교운동이 존재하였다. 물론 그러한 다양한 기독교운동 속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도 일양적(一樣的)인 해석을 거부하는 다양한 모습이었다.
▲ 애마 부세팔로스를 타고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리얼한 모습. 투구의 사자는 희랍의 헤라클레스를 상징하고 귓밥의 양뿔은 이집트의 아문신을 상징한다. 오른 손은 창을 던지는 다이내믹한 포오즈. 윗 사진의 석관 왼쪽 최 외곽부분확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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