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구약의 성취로서의 마태복음
마가복음서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참담한 패배와 굴욕감 속에서 의욕을 상실하고 민족적 프라이드가 손상되고 다이애스포라에로의 해체분위기가 짙어가던 유대인 사회에 무엇인가 새로운 활력을 집어넣고 정신적 위기감을 극복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 복음의 중요성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마가복음서보다 보다 완정한 복음서 증보개정판을 내려는 노력이 이루어진다.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passion and resurrection)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했지만, 누가와 마태는 예수의 수난과 재림(passion and parousia)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수난 - 부활’과 ‘수난 - 재림’은 다르다. ‘수난 - 재림’의 패러다임이 성립하려면 부활 후 이야기(post-resurrection naratives)들이 첨가되어야 하고 또 승천이 있어야 하며 재림에 대한 약속이 제시되어야 한다. 누가와 마태에서는 처녀탄생과 유년설화, 부활 후 이야기들이 앞뒤로 증보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제일의 특징은 우리가 탄생ㆍ유년설화를 고찰하면서 논파했듯이 예수의 복음을 철저히 구약의 성취로 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와의 단절이 아닌 연속 속에서 복음을 규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의, 유대인을 위한 복음’이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유대화파의 입김은 강렬했고, 유대인들의 이탈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기둥들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다. 예수는 민족개념을 초월한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예수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따로 구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같이 하고 계시다고 하는 확신을 던져줄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시대, 율법의 시대, 예언의 시대가 이제 예수의 시대, 복음의 시대, 성취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하는 믿음을 던져줄 필요가 있었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임마누엘’(Emmanuel)이라고 하는 구약의 예언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라는 뜻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마지막도 이렇게 끝난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마태복음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의 태도에 관한 권면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천국이 너희 것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나는 항상 너희들과 함께 살면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도와주고 너희들이 실족할 때는 용서하면서 권면한다. 마태의 저자는 낭독을 듣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이 항상 예수 속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각오케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누가의 세계사적 지평
마태의 궁극적 관심은 유대인중심의 교회공동체였으며, 율법의 성취로서의 사랑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새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누가는 매우 국제적이고 관심의 폭이 넓다. 따라서 나는 시대적으로 마태가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유대교적 지평 위에서 편집한 노력이 누가의 세계사적 지평보다는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나의 논의를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도표를 독자들이 머릿속에 집어넣고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AD 70년경 | 마가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rk) | 갈릴리 지평 |
↓ | ||
AD 80년경 |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 유대화 지평 |
↓ | ||
AD 90년경 | 누가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Luke) | 세계화 지평 |
↓ | ||
AD 100년경 | 요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ohn) | 보편화 지평 |
<4복음서의 저작연대와 성격>
누가복음은 이와 같이 시작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눅 1:1-4)
구전전통과 성문전통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말은 예수라는 사건이 역사적 지평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다. ‘평범한 우리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 그 예수의 사건에 관하여, ‘처음부터’ 즉 예수의 당대로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ministers, 사역자, 전도자, 선교자) 된 사람들이 전하여 준 ‘내력’이 많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내력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이전에 매우 다양한 구전전통(oral tradition)이 많았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전전통은 얼마 전에 성문전통(written tradition)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라는 문학양식의 출현을 누가는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다시 말해서 다양한 복음서가 출현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예시하고 있다. 구전전통시대가 성문전통시대로 바뀌었고, 붓을 든 사람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 많은 성문자료들을 있는 그대로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모든 것을 나 나름대로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필 수밖에 없었다. ‘미루어 살핀다’는 ‘엄밀히 조사 연구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여기 ‘근원부터 자세히’란 말 속에는, 구전이 문서화되는 과정에서 전승자료의 수집과 선택과 편집, 불가피한 수식과 신앙적인 강조, 또는 교회의 입장의 반영 등 해석학적으로 매우 부정확한 사태가 기존해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 ‘자세히’(closely)란 말의 원어에는 ‘정확하게’(accurately)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부정확한 기존의 정보들을 근원부터 정확하게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누가의 고백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구전자료, 성문자료를 제1차 자료로 하고, 그 1차 자료에다가 자신이 근원부터 정확하게 미루어 살핀 새로운 2차 자료를 합성하여 체계적으로 다시 만든 복음서가 바로 자신의 누가복음서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머리말의 양식은 당시 헬라세계에 있어서 역사가로서 어떠한 역사서술(historiography)을 하려할 때 매우 전형적으로 사용하던 양식이다. 마태복음이 모세5경이나 기타 구약의 전통적 구성양식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문제는 그 다음의 헌사(dedication)이다.
한 사람의 열독을 위한 서한양식이 아니다
누가는 이렇게 새롭고도 체계적으로 집필한 예수의 복음서를 데오빌로(Theopilus, 테오필로스) 각하에게 보낸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데오빌로 각하께서 읽고 여태까지 예수에 관하여 얻어 들은 바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 과연 테오필로스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분명 ‘각하’(크라티스토스)라는 존칭이 붙어있는 것을 보아 그는 분명 로마의 고위직의 어떤 인물이었을 것이다. ‘각하’라는 존칭은 사도행전에서 헤롯 아그립파 1세의 딸 드루실라와 결혼한 유대지방의 로마 총독 벨릭스(Felix, 펠릭스, AD 53~60 재직)와 그의 후임자인 베스도(Festus)에게 붙여지고 있다 (행 23:26, 24:3, 26:25). 혹자는 누가가 안티옥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에 데오빌로는 안티옥 교회의 부자였으며 누가의 복음서집필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로마 사람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데오빌로는 도미티안 황제(AD 81~96 재위)의 조카며 상속자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의 아내 도미틸라는 황제의 친척이었으나 그리스도교신앙 때문에 순교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추측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만약 이 복음서가 로마의 고관에게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을 상세히 기술하여 이해시키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면 로마관리들에게 불리한 기술들, 예수의 재판이나 반로마적 감정을 자아내는 상황들이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강력하게 기독교옹호론적이다. 누가는 과연 나사렛의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동시에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문제가 과연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테마를 집요하게 추적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과도 같은 방대한 저술이 로마 고관 1인의 열독을 위하여 집필되었다고 하는 가설 그 자체가 너무도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1차적으로 초대교회에서 낭송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된 원고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대중을 위한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 문학양식이지 한 사람의 열독을 위한 설득용의 서한양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과 저자인 누가 자신의 언급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근대를 열었다고도 할 수 있는 『방법서설(Discourse on the Method)』을 처음 출판할 때(1637) 익명으로 했다. 지금 보면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당대의 분위기로서는 떳떳하게 이름을 거는 것이 매우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4년 후에(1641) 『제1철학에 관한 명상(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을 출판했을 때 그 서문을 보면 매우 장황스러운 헌사가 붙어있다. ‘파리대학의 성스러운 신학패컬티의 박사님들과 학장 각하님께.’ 그리고 그의 과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견해를 압축시킨 『철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hilosophy)』를 출판했을 때도 매우 장황한 헌사가 붙어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선거권 제후이시며 팰러타인 백작이신 보헤미아의 왕, 프레데릭의 큰 따님, 가장 고요하신 엘리자베스 공주 각하님께.’ 임마누엘 칸트도 그의 유명한 종교철학 저술, 『이성만의 한계 속에 머물러야 할 종교(Religion f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s)』(1793)를 출판하고 나서 프러시아의 왕프레데릭 윌리암 2세에게 엄청나게 혹독한 야단을 맞았다. 그리고 더 이상 종교에 관한 언급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근세에도 이랬는데 기독교를 탄압하던 로마세계를 향해서 붓을 든 누가는 어떠했을까? 데카르트가 헌사를 당대의 유력한 사람들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것과 같은 작전이 누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테오필로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우선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을 분석해보면 이것 자체가 이미 누가의 국제적 안목에 의하여 만들어진 조어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테오필로스’의 ‘테오’(Theos)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필로스’는 지혜의 사랑을 뜻하는 필로소피아의 필로와 같은 어원이다. 다시 말해서 ‘테오필로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테오필로스’(데오빌로)에다가 고대 로마의 기사단 이상의 계급에게만 붙일 수 있는 ‘각하’(크라티스토스)라는 존칭을 붙임으로써 이미 이 복음서의 낭송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의 고위층 관료 내에도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이 누가를 지원하고 있다고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복음서와 같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문학장르에 있어서, 특히 누가와 같이 인류 전체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방에 선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헌사라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남ㆍ북한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기쁜 소식을 전 인류를 대상으로 전하는 논문을 발표할 때 그 앞에 가장 말썽을 많이 피울 수 있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헌사를 증정했다고 해서 그게 크게 문제될 일이 있겠는가? 미 대통령 부시의 허락을 따로 받아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남북평화를 기원하여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내가 부시 각하에게도 바치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부시 각하로 하여금 그 들은 바에서 무엇이 진실한 것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하려 함이로라.
더구나 사도행전의 서문에는 보다 추상적인 톤으로 그려져있다.
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 1:1~2)
여기서 문맥상으로 보면 데오빌로는 전혀 중요한 데디케이션(Dedication, 헌정)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데오빌로를 저자의 뒷 빽으로 깔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는 정도의 언급에 불과하다. 누가는 청중에게 내가 먼저 쓴 글, 즉 복음서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예수라는 인간이 이 땅에서 행하고 가르치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완벽한 일대기(an individual biography)였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각하’라는 존칭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 글이 어느 개인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데디케이션까지도 ‘데오빌로 각하’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누가가 날조했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는 누가의 놀라운 드라마적 감각, 그리고 ‘데오빌로 각하’라는 이름 속에 들어있는 그의 국제적 감각에 박수갈채를 보내야 한다. 그는 복음서를, 마태가 유대인의 지평 위에 놓았던 것과는 달리, 세계인의 지평 위에 놓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분명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헬라ㆍ로마세계의 역사나 문화에 관하여 모든 소양을 지닌 걸출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를 바울을 수반한 의사 누가와 동일시하기에는 너무도 문제가 많다. 당시 의사는 사회적 신분이 노예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오늘 같은 고위계층의 의사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누가의 국제적 감각의 언어
앞서 살폈듯이 누가는 예수의 출생 시점을 이야기할 때에도 지역의 총독 이름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 로마세계의 신적 지배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들먹였다(눅 2:1).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릴 때도, 로칼한 팔레스타인의 연대를 대는 것이 아니라, ‘때는 카이사르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의 통치 열다섯 해째 되는 해였다.’라는 식으로 곧 죽어도 로마 황제를 들먹인다.
티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눅3:1~2)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AD 28년(티베리우스는 재위기간이 AD 14~37이다. 그러니 열다섯 해째는 AD 28년이다) 한해를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 누가의 감각은 예수라는 사건을 세계사의 지평 위로 올려놓으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음을 나타내준다.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에서도, 마가와 마태의 일차적 관심은 유대식 재판이며 종교적인 이슈에 있었지만 누가에게 있어서는 로마 법정의 재판양식이 중요하며 예수에게 덮어씌워진 정치적ㆍ사회적 이슈가 중요하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사의 지도 위에 예수의 삶을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Scythian)이나, 노예나 자유민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1)
이러한 바울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종이나 계급, 신분, 남녀의 차별을 초월하여 누가는 당대 로마세계의 다양한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이야기로 이끌리어 들어오게끔 붓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마지막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to all nations) 전파될 것’(눅 24:47)을 기록하고 있다. 또 누가는 예수를 세리와 죄인,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 묘사하며, 가냘픈 여인들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여자 선지자 안나, 나인성(城)의 아들 잃은 과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는 막달라 마리아, 예수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많은 여인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러 여자들(8:3), 마르다와 마리아, 은전 두 닢을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21:1~4),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가며 가슴 치며 통곡하는 많은 여자들(23:27)…….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누가의 보편주의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말 성경
여기에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첨가하자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말 성경이 바로 누가복음서였다는 것이다. 중국 만주에 주재하고 있었던 소격난 장로교회 선교사 죤 로스(John Ross)의 발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소격난(蘇格蘭)이란 스코틀랜드를 의미한다. 그는 만주 봉천에서 한국상인들을 만나보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아 한국으로 선교하러 들어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노란머리 푸른눈을 가진 양코배기로서는 대원군의 양이(攘夷) 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에 밀입국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입한(入韓)은 단념했지만 현명하게도 성경 반입에 대한 뜻을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한국말을 배워야했다. 그런데 당시 한국말을 가르칠 수 있는 한국인 어학 선생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을 뿐 아니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로스 목사의 입지를 이해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로스 목사에게 협조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한국말을 배웠고 한국어 문법책도 만들고 전도지도 번역하였다.
얼마 후에 로스 목사는 자기와 같은 소격난 장로회 선교사이며 매부인 죤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의 후원을 얻고, 한국인 어학선생인 이응현(李應賢), 백홍준(白鴻俊), 서상륜(徐相崙) 제씨의 도움을 얻어, 중국어성경에서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 작업은 1882년말에 끝났다. 그런데 인쇄를 하자니 조선글씨활자가 없었다. 그는 조선말 글자본을 일본으로 보내어 활자를 제조해왔다. 그런데 또 조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약행상(藥行商)을 하다가 망한 어떤 떠돌이가 활판기술자였는데 로스 목사의 수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한국어판 누가복음 1천 권이 최초로 인쇄되기에 이르렀다. 1883년이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다. 최초의 출판비용은 소격난 성서공회가 담당하였고 그 뒤의 복음서 출판비용은 영국 성서공회가 담당하였다. 한국상인들이 봉천에 와서 휴지를 사서 지게에 지고 가곤했는데 그 휴지뭉텅이에 섞어 누가복음 1천 권을 밀반입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고난과 환난과 시련과 희망의 역사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새삼 가슴에 새겨야 할 소명과 감격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도회지 중심, 디너 테이블
누가는 문체에 있어서도 유대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은 피하고,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성 싶은 용어와 지명은 해설조로 다 바꾼다. 그리고 마가가 동사의 시제를 어색하게 구사한 것도 단순과거로 교정해버린다. 그리고 자료수집량이 매우 많고 자료배열도 치밀하다. 마가의 갈릴리 묘사는 시골의 마차길의 흙냄새가 펄펄 난다. 그러나 누가의 갈릴리는 도회지 중심의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마태는 예수를 산 위에 올려놓기 좋아하는데 누가는 예수를 디너테이블에 앉히기를 좋아한다. 마가는 예수를 민중의 영웅적 리더(the heroic Leader)로 그렸고, 마태는 위대한 선생으로 율법의 수여자(the great Teacher and Law-giver)로 그렸고, 누가는 예수를 인류의 친구(the Friend of Humanity)로 그렸다(Dodd, Gospels 29). 마태복음을 교과서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누가복음은 선교용 텍스트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마태복음을 우직한 정통성을 고집하는 곡성ㆍ구례 사람들의 동편제라고 한다면 누가복음은 섬세한 감성과 다양한 가락을 펼치는 보성 사람들의 서편제라 해야 할 것이다.
↙ | 마가복음(Mark) | ↘ | ||
원본 | ||||
갈릴리 지평 | ||||
토속적 감각 | ||||
마태복음(Matthew) | 누가복음(Luke) | |||
동편제 | ↔ | 서편제 | ||
유대교 지평 | 세계화 지평 | |||
민족적 감각 | 국제적 감각 |
〈공관복음서의 성격>
공관복음서의 내러티브가 지중해연안의 각 교회에서 판소리(낭송)로 울려퍼지고 있을 때 요한이라고 이름하는 어떤 심오한 사상가에 의하여 공관복음서와는 아주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복음서가 제작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여명이었다.
▲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보관되어 있는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1859년에 시내산 기슭에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the Monastery of St. Catherine)에서 티센도르프(Tischendorf)가 발견한 4세기의 완정한 사본, 1844년에 그 일부를 먼저 발견했다. 신약성서의 완정한 최고(最古)의 사본이며 언셜체(uncial script)로 쓰여졌다. 이 사본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더 2세에게 수도원과 희랍정교회의 보호명분으로 증정되었다. 결국 1933년 소련 당국은 이 사본을 10만 파운드에 영국박물관에게 팔았다. 이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 사본이 현재 우리가 말하는 희랍어 성경의 주요기준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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