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0년 임용: 10년지기 친구들과 만나 즐기다
세훈이는 피곤했는지 계속 자고 난 일찍 일어나 미국판 ‘응원단’이란 게임을 했다. 가혜가 정성껏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동물농장이란 티비 프로그램을 같이 보며 한 바탕 웃고 놀다가 집을 나섰다.
10년 지기 친구와 맛난 점심을
강남으로 간다. 일전에 서울에 올라오면 진규네 집에서 자려고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상황이 있어서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기에 이번엔 별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전화가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것이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있지만 이른 시간임에도 거리로 나섰다. 정훈이 형, 충원이와는 강남역에서 헤어지고 무작정 걸었다. 완전히 더운 날이다.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더라. 조금 걸으니 서초 초등학교가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축구하는 사람들, 야구하는 아이들, 아이와 놀러 온 부모님들,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 참으로 한가해보였다. 삶이 별 게 있나? 여유를 일상에서 누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꿈꾸던 미래 속에 살아가는 것임을.
한참 앉아 있다가 한 블록 더 걸어가니 그제야 진규에게 지금 가고 있다며 연락이 오더라. 진규와 만나는 것은 작년 국토종단을 마치고 동대문 쪽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어제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인지 피곤이 밀려와 집에 일찍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진규와는 점심만 먹고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교보문고에서 진규를 만났고 뭐를 먹을까 하다가 라면을 먹기로 했다. 사이트에서 보니까 너무도 맛있어 보였기에,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로 했다.
라면이 비쌀 거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진규가 먹은 라면은 7.000원이었고, 내가 먹은 라면은 9.000원이나 했으나, 웬만한 음식점에서 먹는 가격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맛에 값어치를 어떤 식으로 매겨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약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다. 맛도 밋밋했고(그만큼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 있는지도 모른다), 건더기도 생각만큼 푸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 번 정도 궁금하기에 먹어볼 만한 맛이지, 두 번 먹을 맛은 아니었다.
라면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는 테이크아웃을 하고 어느 건물 뒷 편 그늘에 느긋하게 앉아 마셨다. 사람도 별로 없지, 하늘은 높고도 파랗지, 마치 세상의 모든 게 내 것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 라멘을 처음을 먹어봤다. 한국 라면의 자극적인 맛이 아닌 밋밋한 맛이다.
고통인 삶, 그걸 맛들일 수 있을까?
진규는 요즘 여자 친구와의 결혼 문제로,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처럼 취업 준비생에겐 취업이 큰 고비이니 다른 건 미처 생각할 이유도 여력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취업하고 난 후엔 꽃길만 걷게 되고, 아무런 걱정 없게 되는 건 아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새로운 고민과 걱정거리가 찾아오니 말이다. 그래서 붓타는 ‘사람의 삶이란 모두 다 고통 뿐(人生皆苦)’이란 말을 했던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이나 진규가 하는 고민이나 큰 차이가 없는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주 5일간 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하더라. 업무 상 마셔야만 하는 술도 있겠지만, 현실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기 위해 마시는 술도 있을 것이다. 진규의 힘겨움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맘이 아파왔다.
진규와는 2007년부터 기독교 논쟁을 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전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친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어울려 다니다가 2007년의 기독교 논쟁으로 더 긴밀해진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진규의 진취적인 생각 덕에 2009년엔 도보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과 같이 좀 더 다른 삶에 대해 희망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진규와는 꿈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구장창 나눴고, 한 때는 밤까지 새워가며 나누기도 했었다. 우린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고, 정말 행복해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엔 그런 열망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덧 30살이 되어버린 지금, 우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가 꿈꾸던 것들은 현실 속에 고이 묻혀 버린 것일까?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셨지만 진규는 그렇게 헤어지기 싫었나 보다. 낮술 이야기도 나오더니, 반포대교 쪽으로 가보자고 하더라. 시민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근처에 살고 있는 기웅이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전주에서 함께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나왔던 친구들이 어느새 사회인이 되면서 서울에 이렇게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다들 대단하다.
얼마 지나지 않으니 기웅이가 왔고 기웅이네 집 근처 삼겹살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작년 도보여행을 마친 후에도 이렇게 모여 닭한마디를 먹었었는데, 올해 또 이렇게 모이게 되니 기분이 색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진규가 여자 친구에게 잘못된 길을 알려주어, 여자 친구가 화가 많이 났고 진규에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성질을 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진규도 맘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진규는 최선을 다하고자 택시를 타고 여자 친구가 헤매고 있는 장소로 갔고 거기서 잘 해결되어 다시 고기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때 기웅이 여자 친구도 합석하게 되어 드디어 제대로 인원이 갖춰졌다. 그래서 밥을 먹는데 분위기는 가볍기보다 무거웠다. 진규네 커플은 아까 일로 감정이 상한 상황이었고, 기웅이네 커플은 기웅이가 최근에 일을 그만두게 된 것 때문에 뼈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는 나는 불청객이나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아야 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
어찌 어찌 저녁 만찬은 끝났다. 아무래도 사귄 지 꽤 지난 커플들과 저녁을 함께 먹다 보니, 이젠 마냥 좋기만 하고 가슴 떨리는 게 아닌 현실이 더 중요한 커플이 되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를 바꾸어 가고 있는 것이다.
9시 버스를 탈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남부터미널에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9시 버스표는 모두 매진되었더라. 그래서 하는 수없이 고속터미널로 가서 9시 35분 차를 타고 전주에 왔다. 지금까지 5번 임용고사를 보면서 한 번도 시험이 끝난 후에 이토록 즐겁게 놀아본 적은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에 도보여행을 하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하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도 할 수 있었던 거다.
삶이 흐른다. 알고 있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삶이 얼마나 풍족하고 알찬지 보여주는 증표라 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살고 싶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시험은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다채로운 감정, 그래서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깨우침을 줬다. 어느 순간이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고 한다. 오늘 다르고, 내일 또 다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싱그럽고 특별한 것이다. 과연 내일은 어떤 하루가 시작될지 기대되고 설렌다.
▲ 전주천의 모습.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다. 그처럼 같은 날을 여러 번 보낼 수도 없다.
인용
1. 06년 임용: 첫 시험의 불안감을 안고 경기도에 가다
3. 07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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