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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07학년도~11학년도 한문임용 낙방기 -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본문

건빵/일상의 삶

07학년도~11학년도 한문임용 낙방기 -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건방진방랑자 2019. 4. 2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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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07년도 임용은 광주에서 봤는데, 06년에도 군대 동기에게 부탁하여 하룻밤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처럼 이때도 광주에 살고 있는 군대 동기에게 부탁을 하여 하룻밤 머물 수 있었다.

 

 

군대인연으로 하룻밤 묵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열심히 사는 친구.

 

 

 

광주에서의 인연, 그리고 악연

 

그러고 보면 예전의 나라면 민폐 끼치기 싫다라는 마인드로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던 것도 아님에도 무작정 연락을 하여 잠자리 부탁을 하는 것이니 이기적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젠 어떻게든 어우러져 돕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그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친구는 대대 군종병으로 중대 군종병인 나와는 좀 더 각별한 관계이기도 했다. 군대 생활만큼이나 신앙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활했었다. 이 친구는 지금 전도사로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저녁은 여자 친구까지 함께 모여서 시내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아침밥까지 잘 먹고서 드디어 고사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건 바로 작년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 한 교실에서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난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아인 뒷줄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말이다.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렇게 한 교실에 있다는 것은 역시나 어색한 일이더라. 그 때문이었을까, 맘이 심하게 요동쳐 왔다. 시험이란 불안, 전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미묘한 감정이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책상에 앉자마자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정신을 통일하여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신체를 조성하는(2007.12.02)’ 것이다. 회피하지 말고 모든 실력과 모든 지식을 까놓고 시험지와 일대일로 진실하게 만나고 싶었다. 모든 불안, 근심, 걱정, 설렘, 기대는 잠시 놓아두고자 했다.

 

 

역시 이곳을 지날 때 시험을 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축제가 한 순간에 저주로

 

막상 시험지를 대하고 있으니 지금껏 느껴졌던 모든 감정들은 사라지고, 긴장도 풀어져 갔다. 그게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올해 연습한 결과라면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시 시험장에서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라는 끈기다. 바로 그게 밑받침이 될 때, 저력이 생기는 거다. 바로 그 자세로, 그 효과를 끄집어냈으니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30%의 미흡함은 역시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지 못한 나의 한계에 있다. 어찌 보면 그 자세를 유지하여 끝마무리까지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2007.12.02)

 

 

시험은 흡족하게 봤다. 결과 여부를 떠나서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 하지만 문제는 지레 포기하는 끈기부족이라 할 수 있다. 난 시험지의 권위마저 넘어선 것은 아니었던 거다. 그러니 맘 한 구석으론 불안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광주에선 5명의 교사를 뽑는다.  

 

 

시험이 끝나고 학과 후배들과 점심을 먹게 됐는데, 그런 불안증은 그 자리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내가 쓴 답들이 이미 틀렸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비참한 느낌이 들었고, 그만큼이나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사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초월한 듯, 태연한 듯했던 내 자신도 별 수는 없었다. 역시 아직도 그 뻔한 현실적인 장벽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말만 거창한 그런 속빈 강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상동)

 

 

시험의 실패가 마치 인성의 갖춰지지 않음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시험만 끝났을 뿐인데도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처참한 심정을 느껴야 했으니 말이다. 내리는 비를 보며 난 1년을 곱씹고 있었다.

시험의 결과는 낙방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건 과락이라는 사실이었다. 과락, 내가 제일 행복하고 치열하게 살았다고 느끼던 그 때에 난 내 인생의 오점을 선물로 받았다. 말로 할 수 없이 절망적인 느낌이었다.

 

 

그렇게 2007년도 지나가고 있었다.  

 

 

인용

목차

사진

1. 06년 임용: 첫 시험의 불안감을 안고 경기도에 가다

2. 06년 임용: 내가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다

3. 07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5. 08년 임용: 시린 어둠과 찬란할 빛

6. 08년 임용: 기분 좋은 떨어짐

7. 09년 임용: 국토종단으로 반란의 꿈을 키우다

8. 09년 임용: 반란은커녕 뒤꽁무니 치다

9. 10년 임용: 마지막 시험에 임하는 자세

10. 10년 임용: 오수생 마지막 임용시험을 보다

11. 10년 임용: 시험이 끝나자 찾아온 활기

12. 10년 임용: 10년지기 친구들과 만나 즐기다

13. 때 지난 임용 낙방기를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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