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경기도)
1. 첫 시험의 불안감을 안고 경기도에 가다
어느덧 나도 오수생이 되었다. 장수생이라 할 수 있는데 나도 이렇게 긴 시간동안 공부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고 솔직히 이런 느낌이 매우 생소하기까지 하다.
어느덧 오수생이 되다
처음 임용을 볼 때만 해도 동기 여학생들은 사수생이었다. 그땐 동기들을 보며 ‘무척 길게도 공부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렇게 막연히만 생각했던 상황에 닥치게 된 것이니 놀랍다고 하는 말 밖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무신경한 만큼이나 시간은 흐르고 흘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아 제발 돌아와줘’라고 외칠 건 아니다. 흘러버린 시간이 ‘임용합격’이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5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은 모두 소중했고 그 시간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걸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한다. 그런 만족에 덧붙여 꿈꾸던 임용합격까지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테지만. 바로 이 순간, 다섯 번째 시험을 목전에 둔 순간이다.
▲ 수도권으로 꼭 가고 싶었다. 그래서 첫 시험부터 경기도로 무작정 지원했던 것이다.
첫 시험에 스민 자신감, 언뜻 보이는 불안감
첫 시험을 볼 때만해도 크나큰 기대가 있었다. 이걸 『연금술사』에선 ‘초심자의 행운’이라 표현했다. 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왠지 모르게 내가 되리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끼워 맞춰 ‘모든 기운이 임용합격을 말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특히 여자 친구와 헤어진 사건은 ‘합격을 위한 시련’ 쯤으로 합리화하기에 더 없이 좋았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근심과 걱정 속에 있을 때 살게 되며, 편안함과 즐거움 속에 있으면 죽게 된다(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 -「告子」 下 15)’는 구절처럼 시련과 아픔이 나를 대성하게 만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첫 임용이지만 자신만만했고, 교사가 되더라도 수도권 근방에서 되고 싶었다. 그땐 고미숙씨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으며 ‘수유+너머’와 접속하여 ‘임용을 위한 공부’가 아닌 ‘삶을 바꾸는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기롭게 경기도에 출사표를 던졌던 것이다.
▲ 경일이 형 차를 타러 가기 전에 5층 로비에서 찍은 사진.
경일이 형 차를 빌려 타며 수원까지 올라왔고 버스를 타고 군대 친구가 살고 있는 시흥으로 갔다. 그 당시 경일이 형 차를 타기 전에 5층 로비에서 찍은 사진엔 자신감에 가득 찬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땐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썼었다.
솔직히 조금 긴장만 될 뿐이다. 아니 오히려 멀리 놀러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이 가득하니 좋은 생각들로 가득 채워보련다. (2006.12.03)
확신 같은 것으로 치장하긴 했지만 언뜻 불안감도 스친다. 아무래도 첫 시험이니 겉으론 태연한 척할지라도 속은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리라.
정답 없는 문제를 풀러 떠났고 그곳에서 난 다른 세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만났다. 시흥에서 연거푸 들었던 노래는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면 돼!’라는 가사가 나오는 마야의 「나를 외치다」란 노래였다.
▲ 시험을 보러 가는 순간부터 주구장창 들었던 노래. 정말 많은 힘이 됐다.
2. 내가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다
시흥에 사는 민호는 군 시절 후임으로 들어와 나에게 엄청난 갈굼을 당했었다. 군이란 시스템이 멀쩡한 사람도 이상한 사람으로, 잘 하려는 의욕적인 사람도 어설픈 사람으로 만든다. 나도 그 피해자고 민호도 그 피해자지만, 더욱 웃긴 점은 내가 민호보다 선임이란 이유로 짓누르고 바보로 만들었단 사실이다. 제대한 이후로 그랬던 과거들이 무척이나 후회가 됐지만, 그래서 민호도 내가 미울 법 한 데도 자기 집에 기꺼이 초대해주고 하룻밤 잘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무척이나 고맙고 미안했던 순간이었다.
▲ 민호를 만나기 전에 시흥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다
밤엔 자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냈고 아침이 밝자 차려준 밥을 먹고 수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흥에서 수원까지 가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리더라. 그래서 그때도 마야의 노래를 들으며 울컥울컥 무언가 올라오려는 마음을 달랬다.
스쳐지나가는 광경들, 그리고 미지를 향해 내딛는 설렘이 하나로 뒤엉켜 마치 고등학생 때 수능을 보러 가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전주 농고에서 수능을 봤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도 집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버스는 남부시장과 시내, 그리고 모래내를 지나 농고에 도착하는데 하필 남부시장을 지날 때 만감이 교차했으니 말이다. 남부시장은 늘 다녔던 너무나 익숙한 시장인데, 버스를 타고 지날 때 본 남부시장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못 볼 법한 스산한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버스는 제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남부시장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지나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수원으로 향하던 버스에 본 바깥 풍경이나 고3때 본 남부시장의 풍경이나 살아있기에 ‘뭔가 남다르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기에 감정이 얽히고, 익숙한 광경조차 낯설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때 일기엔 아래와 같이 썼다.
맘도 기쁨으로 충만해져 있었고 마야의 노래 가락을 통해 ‘힘을 내야지’란 의지를 다지니까 정말로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중간 생략)
내가 좋아 선택한 것이고 돌아옴 없이 이 길만을 줄곧 달려 왔다. 후회를 한 적도 없었고 되돌아가자고 생각한 적도 없을 정도로 나에겐 기쁨을 주는 이 길이었다. ‘그래, 난 나의 길을 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만을 갈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2006.12.03.)
그런 충만한 기분으로 수원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버스 정류장엔 인파들이 넘쳐난다. 가장 많은 교사를 뽑는 경기도답게 수험생이 택시를 잡기 위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이 매우 좋았던지, 바로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택시가 섰고 지금 막 도착한 사람임에도 모든 시선을 뒤로하고 택시에 무작정 탔다. 다행히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더라. 정말로 ‘초심자의 행운’이 있긴 있나 보다.
▲ 너무도 익숙한 이 광경이 수능을 보러 갈 땐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출처 - 다음지도)
첫 시험이라 떨렸을까, 너무 큰 기대가 있던 시험이라 떨렸을까
시험장에 도착했다. 첫 시험이기에 낯선 광경들과 낯선 사람들. 설렘보단 떨림이, 기대보단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나만의 축제의 장소에 도착했고 날 위해 준비되어 있던 그 자리에 앉았다. (2006.12.03)
그래서 일기엔 위와 같은 말이 쓰여 있다. 마음을 다잡는다고 다잡아지는 건 아니지만, 말로는 할 수 없는 희망이 어리긴 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받았던 문자들을 생각하며 파이팅을 다졌다.
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신감이 물밀 듯 솟아오른다. 바로 이 자신감이 중요한 것이다. 헤어짐을 통해 얻어낸 값진 선물이며 이 자신감을 통해 흔들림 없이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그걸 입증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헛된 자만이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조급해지지 않고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이었으니, 최상의 컨디션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상동)
어찌나 불안했던지 자꾸만 마음을 가다듬는다. 속으론 ‘괜찮다, 괜찮다’를 외치지만, 겉으론 태연할 수가 없다. 내면의 힘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잡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힘을 의지하며 조금이나마 힘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축제는 시작되었다. 첫 임용고사는 06년에 보았고 그 다음해부터 09년까지 치열하게 책도 읽고 고민도 하며 ‘삶을 즐기는 법’에 대해 나름 생각하게 되며 ‘삶=축제’라 인식하게 된 줄만 알았다. 그래서 첫 시험에 대해선 잔뜩 무거운 느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당시의 일기장을 찾아보니 축제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걸 보면서 ‘나의 인식틀은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렇듯 하나하나 갖춰져 간 게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첫 시험을 봤던 곳. 이곳에서도 전주대 한교과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초심자의 행운, 그렇게 떠나다
첫 시험치고 잘 풀었고,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꽤나 만족했던 듯싶다. 경기도 임용시험의 경우엔 다른 지역의 시험과는 달리 2차에서 보는 교육학 논술시험을 1차에서 미리 본다. 교과 시험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에 교육학 논술시험까지 모두 본 후에 끝나는 것이다. 그만큼 타지역보다 시험 시간이 긴데도, 술술 잘 풀어갔다. 그래서인지 시험이 다 끝나고 나서도 ‘이번엔 정말 합격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신 있어라 했던 그 모든 것들이 허울 좋은 자만에 불과했군’이라고 자조하면 어떨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올 수 있었으니,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상동)
위의 일기처럼 자신에 가득 차 있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첫 시험이었지만 내가 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날만큼은 모든 게 내 맘보다도 더 특별하기만 했다.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전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잘 돌아왔다.
그러나 첫 시험은 실패로 끝났다. 초심자의 행운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찌 보면 첫 시험이기에, 아무런 경험도 없기에 기고만장했는지도 모른다. 실패 또한 경험의 한 단면이라 한다면, 무작정 슬퍼할 일도 무조건 낙담할 이유도 없다. 더욱이 경기도에서 시험을 보는 경험을 통해 민호도 다시 만나게 됐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도 키울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게 아닐까.
▲ 시험이 막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싸이에 남긴 글.
2007년(광주)
1.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2007년은 전반적으로 모든 것에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섶나무를 베고 의기를 다졌던 부차처럼, 쓸개를 잘게 잘게 씹으며 의지를 불태우던 구천처럼, 천하를 주유해야 했던 공자처럼 깊게 침잠해야 했던 시기였다.
▲ 학교도 졸업했고 이젠 완전한 사회인이 되었다. 곤지중학교에서 한자급수 강사를 하던 때.
2007년은 변화의 때
생각의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재검토를 해야 했다. 그 결과 26년 간 별다른 고민 없이, 어떤 의문도 없이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기독교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건 필연적으로 불변의 진리를 좇아 완전한 것만을 추구하던 생각을 버리고 변화무쌍한 세상을, 감정이 들쭉날쭉하는 사람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변화야말로 삶이 주는 선물임을 알게 됐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헤어진 여자 친구는 언젠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될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니 그런 부분이 섭섭해서 그런 말을 할 법도 했다. 그런데 나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종교를 버린다는 건 단순히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나에겐 인식의 틀, 생활방식까지 모두 바꾸라는 말과 같아.”라고 말했었다. 그만큼 종교는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고, 내 모든 걸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던 기독교가 2007년을 기점으로 아무 것도 아닌 ‘수많은 종교 중 하나’로 바뀔 수 있었다는 건, 한강물이 전주천으로 흘러들어오는 것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만큼 과거와 결별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 한때는 기독교인으로, 한때는 무교인으로. 그리고 앞으로는??
시험으로 한바탕 노닐어 보자
그렇게 일상이 변한 만큼이나 임용에 대한 나의 생각도 변했다. 시험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활발발하게 소통하자고 생각했으며, 너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식의 공격적인 자세는 버리고 당당히 일대일로 만나 한바탕 징하게 놀자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쁨은 여전하다. 맘껏 세상과 어울려 한 판 놀 수 있는 정겨움의 시공간, 그 속에서 난 올해 일 년의 밑도 끝도 모를 절망들을 이겨왔는지도 모른다. 생동감과 열정, 그게 날 일으켜준 결정적인 원동력이다.
(중략)
떠남과 동시에 만남은 이루어지며, 이별과 동시에 재회가, 끝남과 동시에 시작이 이어진다. 그런 순환의 법칙 가운데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건 바로 시간들의 경계선 상에서 맘껏 노니는 것이다. 애초에 시간의 분절은 없었지만 의식의 분절만이 허용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떠나간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보다 다가올 재회의 기쁨으로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거다
07년 어느 때인가 썼던 일기인데, 지금 읽어봐도 그때의 절절함이 느껴지고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런 변화 덕에 07년 임용은 나에게 철학적인 의미까지 함께 있는 시험이 됐던 것이다.
▲ [왕의 남자] 중 엔딩. "징헌 놈의 이 세상, 한 바탕 놀고 가면 그 뿐"이라는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2.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07년도 임용은 광주에서 봤는데, 06년에도 군대 동기에게 부탁하여 하룻밤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처럼 이때도 광주에 살고 있는 군대 동기에게 부탁을 하여 하룻밤 머물 수 있었다.
▲ 군대인연으로 하룻밤 묵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열심히 사는 친구.
광주에서의 인연, 그리고 악연
그러고 보면 예전의 나라면 ‘민폐 끼치기 싫다’라는 마인드로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던 것도 아님에도 무작정 연락을 하여 잠자리 부탁을 하는 것이니 ‘이기적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젠 어떻게든 어우러져 돕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그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친구는 대대 군종병으로 중대 군종병인 나와는 좀 더 각별한 관계이기도 했다. 군대 생활만큼이나 신앙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활했었다. 이 친구는 지금 전도사로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저녁은 여자 친구까지 함께 모여서 시내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아침밥까지 잘 먹고서 드디어 고사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건 바로 작년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 한 교실에서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난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아인 뒷줄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말이다.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렇게 한 교실에 있다는 것은 역시나 어색한 일이더라. 그 때문이었을까, 맘이 심하게 요동쳐 왔다. 시험이란 불안, 전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미묘한 감정이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책상에 앉자마자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정신을 통일하여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신체를 조성하는(2007.12.02)’ 것이다. 회피하지 말고 모든 실력과 모든 지식을 까놓고 시험지와 일대일로 진실하게 만나고 싶었다. 모든 불안, 근심, 걱정, 설렘, 기대는 잠시 놓아두고자 했다.
▲ 역시 이곳을 지날 때 시험을 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축제가 한 순간에 저주로
막상 시험지를 대하고 있으니 지금껏 느껴졌던 모든 감정들은 사라지고, 긴장도 풀어져 갔다. 그게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올해 연습한 결과라면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시 시험장에서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라는 끈기다. 바로 그게 밑받침이 될 때, 저력이 생기는 거다. 바로 그 자세로, 그 효과를 끄집어냈으니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30%의 미흡함은 역시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지 못한 나의 한계에 있다. 어찌 보면 그 자세를 유지하여 끝마무리까지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2007.12.02)
시험은 흡족하게 봤다. 결과 여부를 떠나서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 하지만 문제는 지레 포기하는 끈기부족이라 할 수 있다. 난 시험지의 권위마저 넘어선 것은 아니었던 거다. 그러니 맘 한 구석으론 불안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 광주에선 5명의 교사를 뽑는다.
시험이 끝나고 학과 후배들과 점심을 먹게 됐는데, 그런 불안증은 그 자리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내가 쓴 답들이 이미 틀렸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비참한 느낌이 들었고, 그만큼이나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사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초월한 듯, 태연한 듯했던 내 자신도 별 수는 없었다. 역시 아직도 그 뻔한 현실적인 장벽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말만 거창한 그런 속빈 강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상동)
시험의 실패가 마치 인성의 갖춰지지 않음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시험만 끝났을 뿐인데도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처참한 심정을 느껴야 했으니 말이다. 내리는 비를 보며 난 1년을 곱씹고 있었다.
시험의 결과는 낙방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건 과락이라는 사실이었다. 과락, 내가 제일 행복하고 치열하게 살았다고 느끼던 그 때에 난 내 인생의 오점을 선물로 받았다. 말로 할 수 없이 절망적인 느낌이었다.
▲ 그렇게 2007년도 지나가고 있었다.
2008년(경기도)
1. 시린 어둠과 찬란할 빛
2008년도는 파란만장한 해였다. 거시적으론 한국이란 나라도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고, 미시적으론 한 개체에 불과한 나도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 2008년에도 경기도에서 한문교사를 선발하니 다행이다.
암울하게 시작된 2008년
대통령이 바뀌며 보란 듯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 부시를 위해 카트를 손수 운전해주며 굴욕적인 쇠고기 졸속 협상으로 30개월 이상 소의 뇌나 부산물까지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건 미국에서 잘 먹지 않기에 미국은 한국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니 굳이 ‘광우병’ 운운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우리 세대 먹을거리의 안전망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고 광장으로 몰려나와 재협상을 외치며 촛불집회를 하게 된 것이다.
▲ 굴욕 외교란 이런 것이다. 이걸 실리외교라 치장한다면, 이 세상의 가치는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세상의 뒤숭숭함과 더불어 내 상황도 뒤숭숭하긴 매한가지였다. 호기롭게 시작한 한문학원 강사 생활이 2개월 정도 만에 끝났기 때문이다. 이 학원은 특이하게 한자 급수를 딸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았고, 사자소학 같은 전통적인 서당식 교육을 하는 곳이어서 그 부분이 무척 맘에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장님은 갑자기 ‘학원을 인수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경우엔 인수금액, 조건 등의 후속적인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매우 특이하게도 원장님은 ‘그런 것 없이 그냥 맡아서 해볼 생각이 없냐?’라고 넌지시 묻기에, 때 아닌 갈등을 해야만 했다. 임용을 준비하여 교사가 되는 것과 학원을 맡아서 하는 것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맘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보내고 있을 때, 원장님은 말길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이며 잘라 버렸다. 도무지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황당했고, 첫 강사생활이 그렇게 마무리 됐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
▲ 학원에서 만난 귀염둥이들.
어둠은 사라지고 찬란한 빛이 찾아오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임용고시반에 들어온 건 행운이었다. 보통 임용고시반은 2월에 멤버를 모집하고 8월 정도에 결원이 있을 때에만 추가 모집을 한다. 나처럼 어중간하게 들어오는 경우는 없는데, 난 무작정 교수님을 찾아가 내 의사를 표시했고 그게 잘 받아들여져 들어올 수 있었던 거다.
거기에 덧붙여 도종환 시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의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흔들리며 피는 꽃 스터디팀’을 꾸리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이번 경우처럼 중간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2008년도는 암울하게 시작했지만,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을 경험하며 공부할 장소도 마련됐고, 스터디까지 순식간에 꾸려졌으니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졌다. 그래서 상반기는 여러 일을 겪으며 느리게 지나가는 느낌이었는데 하반기는 모든 게 갖춰져 평이하게 훌쩍 지나버린 것 같이 느껴지는 것도 다 이런 상황 때문이리라. 마음이 안정이 되니 좀 더 느긋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 스터디 팀이 꾸려졌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이름을 가진 스터디팀. 맘을 잡게 해준 버팀목 같은 존재들이다.
2008년에 바뀐 임용제도
2008년부터 임용 제도는 크게 바뀌었다. 원랜 2차 시험으로 1차에선 전공과 교육학을 시험 보고, 2차에선 수업 실연과 면접, 그리고 논술을 보면 됐지만, 이 해부턴 3차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1차엔 객관식으로 출제된 전공과 교육학을 풀어 합격자의 2배수를 뽑아내고, 2차에선 단답형과 논술형으로 출제된 전공을 풀어 1.5배수로 압축한 뒤, 3차에 수업실연과 면접을 봐서 합격자를 걸러내는 것이다.
시험 기간이 늘어나다 보니 당연히 시험을 보는 날짜도 앞당겨졌다. 원랜 12월 첫째 주 일요일에 시험을 보던 것이, 11월 첫째 주 일요일로 바뀌었다. 무려 한 달이나 시험 시간이 당겨지다 보니 수험생들은 더욱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급해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모든 상황이 잘 정비되면서 오히려 느긋하게 행동했다. 어차피 한 달이 당겨지나 미루어지나 모두에게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되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맘을 급하게 먹을 필요도, 무언가 부산을 떨 필요도 없다고 느껴졌다.
2008년 임용도 경기도에서 보기로 했다. 작년에 과락이란 엄청난 충격을 받긴 했지만 심기일전 했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 임용제도가 바뀐다는 건, 장수생에겐 리스크가 큰 일이긴 하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기회이기도 하다.
2. 기분 좋은 떨어짐
더욱이 예년 임용과는 달리 경기도에서 충원이가 함께 시험을 보기에 잘 곳을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됐다. 충원이가 서울에서 집을 구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함께 잠을 자고 다음 날 수원으로 함께 출발하면 됐으니 말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토요일엔 맹렬히 공부를 했고 서울로 출발했다. 내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세훈이도 나와 맞이해줬다. 내 생각 같아선 좀 쉬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따라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첫 임용 때에 비하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니 마음은 편하고 어색함도 덜했지만, 또한 그게 안 좋기도 했다. 저녁으로 고기까지 구워 먹고 세훈이가 가는 것을 보고 들어와 조금이라도 책을 보겠다고 펼친 시간이 거의 11시가 되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마음은 불안하지 그렇다고 몸은 내 맘처럼 안 되지 이래저래 조급증이 밀려올 것만 같았다. 그나마 며칠 전에 유정 선배를 만나 삶에 치이지 않는 방법이나 조급증이 밀려올 때 태연해지는 방법에 대해 들었던 터라, 그 말을 곱씹으며 조금이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한 시간 밖에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최악이었음에도 이를 악물고 달렸더니 목적지에 도착했다던 말씀, 결국 컨디션 운운하며 시험을 잘못 봤다고 하는 것도 합리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 선배는 이때 한창 마라톤을 시작하여 열심히 달리던 때였다. 그래서 나를 보자마자 자신이 마라톤을 하며 경험했던 것을 썰로 풀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저 일기를 쓰면서 ‘합리화하지 말자, 핑계 그만 대자’라고 속으로 외쳤던 것이고 그걸 다시 곱씹는 이 순간에도 그 말은 나에게 힘이 됐던 것이다. 그래 합리화는 이제 그만~ 정정당당하게 내 실력으로 후회없는 평가를 받아보는 거다.
▲ 저녁까지 잘 먹고 충원이 집에 들어와 책을 펴들었다. 불안한 마음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멈추어 세울 수 있는 힘
수원으로 향하던 버스에서 본 단풍은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자연의 메시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일기엔 다음과 같이 썼다.
단풍도 예쁘게 물들었고, 그 고즈넉한 도외지의 풍경은 눈요기를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야말로 말로 전해주진 않으나 가슴을 울려주는 암묵적인 위로였던 셈이다. 불끈 희망이 솟고 기분이 가벼워질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2008.11.09)
위 일기를 읽어보면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에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어떤 메시지라도 들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예민해졌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자연과의 교감은 수능을 보러 갈 때나 첫 임용을 보러 갈 때처럼 마음이 심란하고 무언가 복잡할 때 주로 이루어진다.
시험장에 도착해서는 한층 가열 차게 나를 비우고 오로지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나를 채근했다. 자꾸 맘은 긴장하려 하고 두려움에 떨리려 하니, 어떻게든 나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남들과의 경쟁이다.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맞아야만 내가 합격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 결과를 이루어내기까지는 나와의 경쟁이니 말이다. 스스로 금을 긋고자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껏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후회 없이 쏟아내고자 하는 노력, 그것이 바로 과정이라 해야 맞다.
(중략)
지금은 그저 나도 잊고 너도 잊고 긴장을 덜고 그 빈자리에 시험지와 맘껏 소통한 흔적만을 채우면 된다.
위와 같이 맘먹은 순간 적어도 난 시험을 보러 온 뭇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시험을 보러온 다른 사람과는 달랐을 거라 믿고 싶다. 그건 힘이고 저력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 힘으로 객관식으로 바뀐 첫 시험지를 열심히 풀었다.
▲ 경기도에 첫 시험 이후로 2년 만에 다시 왔다.
과정에 만족할 수 있던 08년 임용
시험이 끝나고 나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그건 재작년에 느꼈던 뿌듯함과도 같았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러웠으니 말이다.
난 신중히 최선을 다했다. 경거망동은 내 스스로 금 긋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어차피 객관화되지 않은 내 실력에 대한 확신일 뿐이니 말이다. 마지막까지 정말 모든 생각을 비우고 최선을 다했고,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을 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 기분은 확실히 재작년에 느꼈던 그런 기분이다. 내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고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데 대한 만족이니까.
그날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듯이 좋았다. 모든 걸 꼭 다 이룬 사람처럼 말이다. 08년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었고, 최고의 한해였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나 낙방이었다. 결과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과정과 시험을 보던 그 순간의 열정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안 좋더라도 실망하기보단 ‘한 해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 낙방이란 결과가 나온 후에 다시 수원을 찾았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놀기 위해서.
2009년(전주)
1. 국토종단으로 반란의 꿈을 키우다
아~ 2009년을 어찌 잊으랴? 너무도 가슴 벅찬 일 년이었고, 나의 가능성을 실제로 알게 된 가슴 뭉클한 일 년이었다. 그만큼 나의 삶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았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 2009년에도 운 좋게 임고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임고반에 공부하며 한 컷.
미래를 현재로 만들러 국토종단을 떠나다
2009년엔 새해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용산 참사’라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돈이 사람을 짓누르다 못해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권력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기보다 돈의 흐름에 따라 생명체를 짓밟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생각을 바로 잡아야 했고, 그저 예전에 하던 대로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성공을 위한 경주마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2007년부터 하던 대로 여러 책을 읽으며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고, 그걸 내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절절한 외침은 공권력 앞에 흩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 결단이 ‘국토종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진 ‘나중에 임용이 된 후에 교사가 되어 방학 때 국토종단을 떠나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무언가 이루지도 못했는데 현실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것은 현실 도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격이 일 년, 이 년 길어지면서 국토종단은 허황된 꿈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은 ‘점점 멀어지나봐♬’라는 노래가사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래에 인용한 구절을 읽게 된 것이다.
시대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 바로 ‘비시대성’이 타임머신 없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너는 타임머신에 승선하지 않고도 미래를 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머무른 채로 떠나기’이며, ‘앉은 채로 유목하기’ 아니겠는가.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그린비출판사, 2007년, 215쪽
니체에겐 ‘현실은 그런 것’, ‘미래를 위해 현실은 접을 수 있는 것’이란 말은 변명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현실의 벽이 늘 높다랗게 드리워져 있지만 그걸 과감히 넘어서서, 지금 내가 서있는 곳에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으며, 추구하던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으니 말이다. 그가 말한 ‘초인超人’은 이런 정신을 갖춘 사람이었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던 것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글에서 두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구절은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라는 부분이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못하면서, 미래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비겁한 변명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서 미래엔 행복할 거라고 하는 것, 지금 무언가 노력하지 않으면서 미래엔 노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그 모든 건 비루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니 미래에 무언가 될 거라 낙관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그걸 선취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현재가 바로 그렇게 꿈꾸던 미래가 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국토종단을 떠날 거예요”라고 말하고 다니게 됐다.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더욱이 일 년에 한 번씩만 보게 되는 임용이란 시험에 있어서, 시간은 금과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머니는 당연히 말렸고, 스터디 멤버 중 명희 누나는 곧바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어쩔 텐가, 지금 당장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 하고 말아야 하는 것을. 그래서 강하게 밀어붙여 전남 목포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한 달간 국토종단을 떠나게 된 것이다.
▲ 국토종단은 나에겐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그러나 연애는 나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2009년은 그래서 다사다난했다.
한 해 동안 잘남과 못남을 동시에 느끼다
막상 국토종단이 끝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행은 아주 시기적절할 때 했고, 나에겐 크나큰 변곡점이 되었다. 여행을 통해 나에 대해 좀 더 알게 됐고,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모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세상은 살만했고, 생각보다 나는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와 더불어 4개월의 짧은 연애를 하기도 했다. 국토종단은 ‘나의 장점이 부각되는 경험’이었다면, 두 번째 연애는 ‘나의 못남이 절절히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채 도망치기에 바빴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거부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그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이었으니, 역시나 삶은 돌고 돌아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깨달음을 주고 나를 성장시키게 한다는 걸 느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자신에 대한 만족이든 불만족이든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2009년은 내가 새롭게 태어난 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이런 상황에서 임용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비춰지는 걸까?
▲ 스터디 멤버들. 여행을 갔다 오는 한 달 동안 기다려줬고, 가장 많이 걱정해줬다.
2. 반란은커녕 뒤꽁무니 치다
올해는 처음으로 임용을 전북에서 본다. 여태껏 경기, 광주, 경기 총 3번의 시험을 보면서 전북에선 절대 볼 생각이 없었다. 29년간 살아왔던 전북이란 홈그라운드를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전북에서 3명의 한문교사를 뽑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교사를 하기 위한 도전이 시작된다.
전북에서 시험을 보게 된 이유
그런데 작년에 경기도에서 떨어지면서 ‘전북에서라면 붙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실제로 전북이 커트라인이 좀 더 낮아 붙을 수 있었던 점수였는데 경기도였기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만약이란 건 언제나 아쉬움을 토로할 때나 쓰는 것이기에, 그게 어리숙한 사람의 변명이라는 건 충분히 안다. 그러나 좀 더 가능성이 높은 곳에서 보면 나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전북에서 보게 되었다.
더욱이 올핸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해다. 지역 가산점과 복수전공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만약 이런 좋은 상황에서도 떨어진다면, 그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별 볼일 없다는 얘기겠지. 그렇다고 마냥 거만했던 것도 아니다. 기대는 품되 연이은 실패로 내 마음은 한 없이 작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장엔 다음과 같이 썼다.
솔직히 자신감은 별로 없다. 꼭 될 거란 생각도 없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단지 언제고 내가 꿈꾸던 일이 이것이었기에 이 길만을 뚜벅뚜벅 걸어왔을 뿐이다. 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이 공부의 길을 떠나진 않을 거니까(2009.11.08)
시험을 보려할 땐 언제나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불안과 기대를 가슴 가득 끌어안고 도망치지 않고 걸어 들어가려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를 보니, 강마에가 단원들에게 “가진 것 없는 사람들도 이만큼 할 수 있다. 반란을 보여 줄 겁니다. 충분히 그럴 거라고 전.. 믿습니다(ep 5)”라는 말이 나오더라. 그 말은 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또렷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시험을 잘 보는 게 ‘반란’일리는 없지만 계속된 실패 속에 성공한 것이기에 충분히 ‘반란’과 같은 뉘앙스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 '늘 난 할 수 없어'라 생각하던 사람들의 열정을 보여준 드라마. 그래서 여러 번 봤다.
시험의 위력에 휘둘려 꼬꾸라지다
하지만 시험은 최악이었다. 지금껏 3번 시험을 봤지만 이번처럼 시험을 보는 내내 무기력감에 짓눌리며 시험 문제에 손을 못 대본 적도 없었다. 시험 보는 내내 울고 싶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험이 끝났다. 절망감이 감돌았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찍었으니. 시험은 끝났지만 시원하긴커녕 착잡함이 나를 짓눌렀다.
이렇듯 표현한 감정은 바로 나를 향해 퍼붓는 질타였다. 반란을 보여주진 못할망정, 뒤꽁무니 치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여태껏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으며, 무얼 얼마나 했을까? 이런 한심한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시험 시작, 교육학도 전공도 쉽지 않았다. ‘모르는 거나 처음 보는 건, 무작정 넘어가고 나중에 다시 풀자’는 심정으로 풀었는데 그게 낭패였다. 솔직히 아는 게 별로 없이 거의 답을 적어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맞다. 시험장에선 시험의 위력, 낯선 문제의 위력에 눌려서 휘둘리다 시험을 마치곤 했었는데, 바로 오늘 그랬던 거다. 시간이 자꾸 신경이 쓰였던 것도 그 이유다.
직면하지 못했고 어디든 우회로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만 찾다 보니 시간은 흘렀고 난 비참하게 물러서야 했다. 이러고서도 한문을 공부했노라고 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긴장과 이완의 조화 없이 긴장감만 지속적으로 느껴야 했던 최악의 시간이었다. 그 결과 난 처참한 몰골로 고사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 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이렇게 파이팅까지 외치고 갔지만, 결과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래서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안개가 자욱한 모악산을 올랐다. 그러지 않고선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안개는 짙어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지금 난 어떤 것도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고, 그저 조금씩 보이는 길을 따라 어디로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마치 천국을 향한 길인지, 지옥을 향한 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보고 자꾸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정상에 올라선 한참이나 그냥 멍하니 있었다. 한심함에 어리석음에, 부질없음에 몸서리치며 말이다.
▲ 후배가 정성껏 써준 응원의 메시지. 이 응원에 보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 시험을 못 봤다는 건 알았지만 결과가 나오곤 정말 충격이었다. 그래서 변산으로 무작정 달려 갔다.
2010년(전주)
1. 마지막 시험에 임하는 자세
09년 임용은 나의 무능을 폭로한 것이자, 어리석음을 까발린 것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풀지도 못했으며,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 작년엔 시험을 다 본 후에 무작정 모악산을 올랐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처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임용시험 3일 전, 마지막 시험을 코앞에 둔 심정
그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임용 공부만 해오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니, 다른 것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건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깡’이 필요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시 공부를 하게 됐고 지금은 2010년 임용을 3일 앞두게 된 것이다.
어제 모의고사를 보고 느낀 건 ‘참 형편없다’는 생각이었다. 작년 임용시험 후에 느꼈던 기분을 그대로 이번에도 느꼈다. 발전은커녕 퇴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를 회고해 보면 정말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이러저러한 도전을 많이 해봤다고 말할 순 있다. 그건 결코 내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내가 여태껏 꿈꾸어 오던 스터디를 처음으로 만들어볼 수 있었고 그러면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재작년부터 시작한 스터디와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은 멤버들이 모두 교체되어 이제 막 임용공부를 시작하는 영화와 민희, 가을이, 진숙이와 함께 하게 됐다는 점이고 스터디 내용 중에 ‘낭송시간’, ‘독서토론회’와 같은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 2010년에 함께 스터디멤버가 되어 공부한 인연들이 서울에서도 이어졌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계속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총 4번의 시험을 봤고, 이제 5번째 임용고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번에 임용공부를 시작하면서 ‘마지막 임용고사’라고 맘을 먹었다. 너무 지지부진하게 끌며 생을 좀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이렇게라도 마침표를 찍으려는 애씀이 없으면 결국 끝없이 미련을 가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어야 하고, 어떻게든 결과는 얻어야만 하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순간만은 임용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온 맘과 성의를 다하려 한다. 올해에 꽃 피웠던 가능성과 그럼에도 아직 멀었다고 느낀 한계를 지금은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가능성 속에 미래의 꿈을 심고, 한계 속에 열정으로 발돋움하여 그토록 꿈꿔왔던 것을 이루리라. 3일이란 시간에 내 소중한 꿈이 달려 있다. 소중한 시간, 내 꿈이 무리익기에 충분한 시간, 그 속으로 이젠 힘차게 걸어 들어가 보련다. 후회, 절망이 아닌 만족과 희망의 아리아를 부를 수 있길 바라며 그렇게.
▲ 전혀 새로운 공부 형식을 갖춘, 그러면서도 완전히 처음인 멤버들과 꾸리게 된 2010년의 스터디팀.
임용시험 2일 전 아침, 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 그래도 잘 잤다. 이제 시험까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어젠 중앙도서관 계단에서 한기를 느껴가며 경수 누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럴 땐 힘이 되기에 조금이나마 긴장을 덜어내기 위해 더 열심히 이야기를 나눈 듯하다. 그러다 따뜻한 방에 들어와 이불을 덮어쓰니 꽁꽁 얼어있던 세포들이 와르르 녹으며 잠이 사르르 밀려오더라. 그래서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잠을 잤다.
그때 어렴풋이 꿈을 꿨다. 몸은 이미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고, 차창 밖으론 바닷가의 전경이 펼쳐졌다. 너른 바닷가의 풍경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뚫어져라 쳐다봤고, 그때의 감정은 여느 때 감정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극치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눈이 떠져선지, 잠에서 막 깨어났음에도 절로 ‘지금 정말 행복하다’란 느낌이 연이어 들었다. 그건 아직도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아직도 꿈을 꿀 수 있으며, 아직도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결과가 나와 모든 가능성이 닫혀 버린 순간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 년, 아니 오 년의 결실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
▲ 늘 운 좋게 임고반에 들어가게 됐었는데, 이 땐 임고반에 들어갈 수 없어 중도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수확을 하려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정직함이라 할 수 있다. 요행도, 꼼수도 통하지 않는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기 때문에 풍년이라 해서 기고만장해서도, 흉년이라 해서 남 탓해서도 안 된다. 그래봐야 작년 임용시험 후에 느꼈던 감정의 판박이만 될 뿐이니 말이다. 이젠 어떤 현실이라 할지라도 도망가지 않고 직면하려 한다. 여기에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모든 게 있고, 그 속에서 나의 꿈이 영글어 갔다.
신해철씨의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노래엔 “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대답은, 그래 Yes 야. 무섭지~ 엄청 무섭지!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또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근데 말이야. 남들도 그래. 남들도 다 사는 게 무섭고 힘들고 그렇다고. 그렇게 무릎이 벌벌 떨릴 정도로 무서우면서도 한발 또 한발 그게 사는 거 아니겠니?”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난 이 내레이션이 맞다고 생각한다. 엄청 즐거워서, 희망적이어서, 살만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사는 것이고, ‘그저’ 사는 것이다. 그처럼 나도 ‘무섭고 힘들고 무릎이 벌벌 떨릴 정도로 무서우면서도 한발 또 한발’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나에게 주어진 기회, 그걸 잡아채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 신해철(1968~2014)의 노래엔 그저 흔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임용시험 2일 전, ‘盡人事待天命’의 자세
이 시간의 기분은 한결 같기만 하다.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겁이 나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동시에 양가감정이 드니 가슴이 더 쿵쾅거리고 삶은 더 진한 농도로 느껴진다. 꿈도 꾸고 희망도 품고 희열, 비분, 아쉬움, 기쁨도 느끼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가 미래에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 진 모르겠지만, 그저 여기까지 흘러온 것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살아온 것도 운이고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누리는 것도 운이다. 한문을 공부하게 된 것도, 그리고 그걸 전공으로 선택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다. 이런 경우를 ‘운 더럽게 좋다’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운에 나를 맡겨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두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난 나일뿐이고, 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두 한 후에 운을 바랄 뿐, 운이란 요행수에 날 맡기고 싶지는 않다. 그저 붓타가 제자들에게 했다던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가는 새처럼 가라!”라는 말처럼 미련 없이, 후회 없이 해볼 테다.
▲ 내 독서대에도 붓타의 말은 그대로 새겨져 있다.
2. 오수생 마지막 임용시험을 보다
마지막 시험이다. 임용 공부를 시작하면서 끝을 기약한 적은 없다. 처음 시험 볼 땐 곧바로 합격할 줄 알았고, 그게 재수, 삼수로 이어지자 ‘끝없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달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수까지 시험을 봤고, 급기야 오수를 하게 됐다.
▲ 공고문이 변경된 경우는 처음이다. 그 덕에 한문교사는 한 명이 늘었다.
마지막 시험이라 외치다
어느 해건 심간 편하게 임용공부를 한 적은 없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언제나 돈이었다. 집에서 임용공부를 한다고 해서 돈을 보태주거나 지지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단순히 ‘돈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막상 돈을 벌어야 할 나이에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는 실존적인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뿐인가? 학자금 대출을 받은 돈도 상환해야할 때가 어느덧 다가왔던 것이다. 2010년 전까지는 이자만 상환하면 됐지만, 2010년 이후부턴 원금까지 상환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코너에 제대로 몰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임용공부를 한다는 건, 내 삶을 건 모험과도 같았다.
그래서 2010년에 다시 임용을 하겠다고 맘을 먹으면서 결단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어떤 확고함도 없이 지지부진 끌기만 해서는 나도 처참해질 뿐만 아니라, 학자금을 서서히 갚아주고 있는 어머니까지 절망스러워지니 말이다. 아무리 ‘배운 게 도적질’이라지만, 그것만을 붙잡고 올인하기엔 상황도, 내 심리상태도 극한으로 치달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마지막 시험’이라는 배수진을 치게 됐다.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꼭 될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빌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뿐이다.
▲ 전날 밤의 사진.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다.
파도와 같던 나의 마음을 붙잡다
‘마지막 시험’이란 중압감이 느껴졌음에도 이상하게 잠을 잘 잤다. 4번의 시험을 볼 땐 다들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마지막 시험’이란 생각이 여유를 줬다고나 할까. 다신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 신비로운 일이 되는 것 같이 말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짐을 챙기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이제 정말 그토록 바라던 ‘바로 그날’이 온 것이다.
이 순간 스치던 생각은, 격포에서의 울분이었다. 작년 시험을 본 후 고사장에서 나오면서 ‘처절함’을 느꼈고, 그래서 이미 떨어질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결과를 받았을 땐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2009년 12월 4일에 낙방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격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다. 격포 해변에 앉아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만두를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왔다 갔다 하는 파도를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었다. 그건 파도가 흘러가고 흘러오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흘러가고 흘러오는 거였다. 파도에 투영된 나 자신의 모습, 나도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모른 채 헤매고 있었고, 삶의 변화무쌍함을 온 몸으로 느끼던 순간이었다. 씁쓸했고 내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했다. 모든 게 다 끝나고 텅 빈 무대에 홀로 선 배우, 가수의 마음이 딱 이와 같지 않을까.
그 후로 오늘 이 시간만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꿈꿔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펼쳐보이리라 다짐했다. 더욱이 올해의 여건들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내 마음도 안정적이고, 선발인원까지 한 명이 더 늘어 상황도 좋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배의 쓴 잔을 마신다면 그건 아직까지 기회가 왔을 때 잡을 만한 역량은 되지 않는다는 얘기겠지. 남 앞에서 조금 더 안다고 시건방 떨었을 뿐, 적어도 임용에선 쥐뿔도 없었다는 얘기이니. 격포와 온고을 중학교 사이의 시공간 속엔 그와 같은 이야기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 해가 저물어가는 격포에서. 씁쓸함을 느끼며 한 잔했다.
온고을 중학교와의 인연
하늘은 맑았고 약간 서늘하긴 해도 전형적인 가을날씨의 운치가 있었다.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는 건 축복이다. 집에서 7시 15분에 나왔다. 아직도 1시간 15분의 여유가 있고 거리도 멀지 않기에 천천히 가면 된다. 중용을 외우면서 페달을 밟는다.
한문도 외국어의 일종이다. 한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한문의 문법체계로 언어체계를 바꾸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올 한해 힘들여 외운 중용을 떠올리며 맘속으로 그려봤던 것이다. 중용의 언어가 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도록, 그래서 한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온고을 중학교 근처에 도착하니, 한바탕 축제가 펼쳐졌다. 특히 각 대학 체육교육과 후배들의 응원전이 볼만했다. 그 사이를 쌩하니 지나간다. 아는 사람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아는 체를 하긴 그러니 말이다. 장수생들은 이렇게 드러나기 싫어하는 숨은 존재들이 되어간다.
올해 임용을 보는 장소는 온고을 중학교다. 고사장이 배정되었을 때 ‘온고을 중학교’라고 써있는 걸 보고, ‘도대체 어느 학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08년도에 단기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곳이지 않은가. 이렇게 황당한 일이 다 있다. 그때 그렇게 주구장창 다녔으면서도 학교 이름을 까먹고 있었을 줄이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운 좋음’이지 않을까. 예전에 잠시나마 적을 뒀던 곳에서, 이젠 꿈을 펼치기 위해 시험을 보는 것이니 말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신나게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한교과 고사장은 4층이었다.
▲ 2008년도에 아이들과 한문을 함께 공부했던 곳에서 시험을 보게 됐다.
마지막 임용시험의 풍경
고사장에 짐을 풀고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는데 그제야 시계를 놓고 왔다는 걸 알게 됐다. 시험 볼 때 시간 안배는 매우 중요하기에 시계는 필수 중에 필수인데도 빠뜨리고 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얼마나 당황했던지, 잠시 멈춰 설 정도였다. 그걸 감독관에게 말하면 해결해주던지, 어떤 방법을 마련해주겠거니 했다. 그렇게 맘을 먹고 나니 좀 마음이 누그러지더라.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경수 누나와 딱 마주쳤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시계를 놓고 왔지 뭐예요“라고 지나가는 말투로 이야기를 했더니, 놀라시며 따라오라고 하더라. 교문 앞에서 응원하는 한교과 후배들이 있다며 걱정 말라는 거였다. 그래서 같이 가봤더니, 역시나 후배 중에 시계가 있는 아이가 있었고 잠시 빌려 달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되어 버렸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이렇게 자기의 일처럼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기분 좋다. 역시나 난 완전히 운 좋은 사람이다.
▲ 후배들의 열띤 응원전. 그 덕에 시계를 얻을 수 있었다.
교실에 들어섰다. 내 앞에 미향이가 앉아 있고 저 멀리엔 가을이가 앉아 있다. 가을인 민희의 친구로 올해 스터디를 함께 하며 알게 됐다. 이미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며 대학원에 들어갔으면서도 시험을 보러 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또 아는 사람이 보인다. 희정이는 동기인데, 2006년에 경기도에서 시험을 볼 때 1차에 당당히 합격했었다. 그 후로는 맘처럼 되지 않아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시험을 보고 있다.
시험은 최선을 다해서 봤다. 그때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교탁 위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급훈이 눈에 들어오더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열심히 준비했느냐에 따라 꿈은 이루어진다. 지금 난 내 꿈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고비도 흔들림 없어 넘어서려 한다.
내가 앉은 의자는 높이도 딱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의자가 불편하던지 의자를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난 그러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보조 감독자분이 바로 내 옆에서 왔다 갔다 했던 것. 그러니 자꾸 집중이 안 되어 무척이나 힘들더라. 그래서 나중엔 아예 시험지를 반으로 접어서 시험을 봤다. 그리고 전공시험 때엔 잘 말해서 감독관이 다른 곳으로 옮기시게 했다. 아직도 작은 부분에 심하게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 외엔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시험장에서 느껴지는 긴장감도 좋았고 하나라도 제대로 풀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그 느낌도 좋았다. 뭐 하나 부족함 없이 마음 속 깊이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들이여. 처음으로 그 시간을 밀도 높게 느꼈고 빠져들었다.
그러니 작년과는 달리 올핸 시험이 끝났을 때 뿌듯함이 느껴졌다. 제대로 무언가를 한 듯한 느낌 말이다. 아이들은 짐을 싸들고 바삐 고사장을 빠져나갔지만 난 여유로웠고 제일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을 맘속 깊이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 마지막 임용을 봤던 온고을 중학교.
3. 시험이 끝나자 찾아온 활기
작년엔 시험을 보고 절망을 맛봤다면, 이번엔 시험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 마지막 시험이기에 좀 더 느긋하게 이 순간을 즐기잔 생각으로 교실에서 맨 마지막에 나왔다.
▲ 온고을 중학교는 나와 징한 인연이 있다.
시험 끝나자 활기가 찾아오다
복도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경수 누나와 미연이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다들 오랜만에 만났기에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험이 끝난 것이기에 한껏 들뜬 모습이 스민다.
미연이의 남자친구는 미연이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더라. 처음 보지만 훈훈한 모습이 맘에 든다. 신기하게도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사귀고 있다던 남자친구다. 시험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함께 나가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올해가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했기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가기로 맘을 먹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미리 연락해서 바로 올라가겠다고 얘기를 해뒀다. 터미널로 가는 길엔 경수누나와 함께 했고 시청 근처 추어탕집에서 점심으로 추어탕을 먹었다. 문뜩 2007년에 광주에서 임용 시험을 본 후 동기 한 명과, 후배 세 명과 함께 점심을 먹었었다. 당연히 임용시험이 끝난 후라 정답을 맞춰가며 밥을 먹는데, 체하는 줄 알았다. 정답을 얘기하는데 보기 좋게 모두 빗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올핸 맘이 한결 편하다. 단순히 시험을 잘 봤나, 못 봤나 하는 것보다, 마지막 시험을 마쳤다는 홀가분한 느낌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으로 시험이 끝난 날 먹는 점심이 꿀맛 같았던 거다.
▲ 세훈이가 고기를 굽고 난 사진을 찍는다. 뭐 이런 진상 손님이 다 있누.
함께 모여 밥 먹을 사람이 있다는 것
서울로 향하는 길은 조금 밀리더라. 그래서 2시 40분 정도 걸리던 길이 3시간이 걸렸다. 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고 암사역으로 향한다. 세훈이네 집에 도착하니 7시 50분이 되더라. 들어가면서 아주 태연하게 “다다이마ただいま (세훈이는 일본어 전공이다)”라고 인사했다. 이미 이사할 때 와서 짐을 거들어준 적이 있기 때문인지, 우리 집처럼 편안한 느낌이 있더라.
세훈이는 커피숍 매니저인지라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 오지 않았고 정훈이 형과 충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난 적이 많으니, 세훈이가 없어도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으니 세훈이가 왔고 저녁을 뭐 먹을까 했는데, 마트에서 고기를 사와 구워 먹자는 것이다. 그래도 나도 장보기 대열에 합류했다. 이런 기회에 서울을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 장도 보고 서울 구경도 하고 일석이조다. 이마트에서 고기와 상추를 사서 돌아왔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맘도 여유로워졌고 그저 모든 걸 하는 게 즐겁기만 하다. 우린 목살 한 근에, 삼겹살 두 근을 샀다. 장을 보며 토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만끽했고, ‘이런 게 사는 즐거움이야’라는 느낌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세훈이가 하나하나 맛있게 구워줬고 난 심간 편하게 구워진 고기를 먹기에 바쁘다. 입에 착착 감겨오는 고소함이 시험의 중압감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어찌나 맛있던지 배 터지도록 많이 먹었다. 안다, 고기를 먹던 그 시간에 우린 누구 하나 ‘시험이 어땠냐?’, ‘미래는 어찌할 거냐?’라고 묻진 않았지만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게 우리들만의 우정을 표현하고 누리는 방식임을 말이다.
고기를 다 먹고 나선 한강에 나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서울은 낯선 곳이기에 여기저기 다니고 싶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들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있는 바람에 그런 기대는 무산되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컬트셉트’란 게임을 하다가 잠에 든 것이다. 그 순간이 되자 오늘 하루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더라. 매 순간이 고맙고 만족스러웠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만족하며 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기서 관둔다 해도 후회 없는 도전을 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런데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배게도 높고 잠자리도 어색하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 세훈이가 고기를 굽고 난 사진을 찍는다. 뭐 이런 진상 손님이 다 있누.
4. 10년지기 친구들과 만나 즐기다
세훈이는 피곤했는지 계속 자고 난 일찍 일어나 미국판 ‘응원단’이란 게임을 했다. 가혜가 정성껏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동물농장이란 티비 프로그램을 같이 보며 한 바탕 웃고 놀다가 집을 나섰다.
10년 지기 친구와 맛난 점심을
강남으로 간다. 일전에 서울에 올라오면 진규네 집에서 자려고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상황이 있어서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기에 이번엔 별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전화가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것이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있지만 이른 시간임에도 거리로 나섰다. 정훈이 형, 충원이와는 강남역에서 헤어지고 무작정 걸었다. 완전히 더운 날이다.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더라. 조금 걸으니 서초 초등학교가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축구하는 사람들, 야구하는 아이들, 아이와 놀러 온 부모님들,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 참으로 한가해보였다. 삶이 별 게 있나? 여유를 일상에서 누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꿈꾸던 미래 속에 살아가는 것임을.
한참 앉아 있다가 한 블록 더 걸어가니 그제야 진규에게 지금 가고 있다며 연락이 오더라. 진규와 만나는 것은 작년 국토종단을 마치고 동대문 쪽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어제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인지 피곤이 밀려와 집에 일찍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진규와는 점심만 먹고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교보문고에서 진규를 만났고 뭐를 먹을까 하다가 라면을 먹기로 했다. 사이트에서 보니까 너무도 맛있어 보였기에,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로 했다.
라면이 비쌀 거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진규가 먹은 라면은 7.000원이었고, 내가 먹은 라면은 9.000원이나 했으나, 웬만한 음식점에서 먹는 가격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맛에 값어치를 어떤 식으로 매겨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약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다. 맛도 밋밋했고(그만큼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 있는지도 모른다), 건더기도 생각만큼 푸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 번 정도 궁금하기에 먹어볼 만한 맛이지, 두 번 먹을 맛은 아니었다.
라면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는 테이크아웃을 하고 어느 건물 뒷 편 그늘에 느긋하게 앉아 마셨다. 사람도 별로 없지, 하늘은 높고도 파랗지, 마치 세상의 모든 게 내 것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 라멘을 처음을 먹어봤다. 한국 라면의 자극적인 맛이 아닌 밋밋한 맛이다.
고통인 삶, 그걸 맛들일 수 있을까?
진규는 요즘 여자 친구와의 결혼 문제로,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처럼 취업 준비생에겐 취업이 큰 고비이니 다른 건 미처 생각할 이유도 여력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취업하고 난 후엔 꽃길만 걷게 되고, 아무런 걱정 없게 되는 건 아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새로운 고민과 걱정거리가 찾아오니 말이다. 그래서 붓타는 ‘사람의 삶이란 모두 다 고통 뿐(人生皆苦)’이란 말을 했던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이나 진규가 하는 고민이나 큰 차이가 없는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주 5일간 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하더라. 업무 상 마셔야만 하는 술도 있겠지만, 현실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기 위해 마시는 술도 있을 것이다. 진규의 힘겨움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맘이 아파왔다.
진규와는 2007년부터 기독교 논쟁을 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전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친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어울려 다니다가 2007년의 기독교 논쟁으로 더 긴밀해진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진규의 진취적인 생각 덕에 2009년엔 도보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과 같이 좀 더 다른 삶에 대해 희망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진규와는 꿈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구장창 나눴고, 한 때는 밤까지 새워가며 나누기도 했었다. 우린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고, 정말 행복해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엔 그런 열망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덧 30살이 되어버린 지금, 우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가 꿈꾸던 것들은 현실 속에 고이 묻혀 버린 것일까?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셨지만 진규는 그렇게 헤어지기 싫었나 보다. 낮술 이야기도 나오더니, 반포대교 쪽으로 가보자고 하더라. 시민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근처에 살고 있는 기웅이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전주에서 함께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나왔던 친구들이 어느새 사회인이 되면서 서울에 이렇게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다들 대단하다.
얼마 지나지 않으니 기웅이가 왔고 기웅이네 집 근처 삼겹살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작년 도보여행을 마친 후에도 이렇게 모여 닭한마디를 먹었었는데, 올해 또 이렇게 모이게 되니 기분이 색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진규가 여자 친구에게 잘못된 길을 알려주어, 여자 친구가 화가 많이 났고 진규에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성질을 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진규도 맘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진규는 최선을 다하고자 택시를 타고 여자 친구가 헤매고 있는 장소로 갔고 거기서 잘 해결되어 다시 고기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때 기웅이 여자 친구도 합석하게 되어 드디어 제대로 인원이 갖춰졌다. 그래서 밥을 먹는데 분위기는 가볍기보다 무거웠다. 진규네 커플은 아까 일로 감정이 상한 상황이었고, 기웅이네 커플은 기웅이가 최근에 일을 그만두게 된 것 때문에 뼈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는 나는 불청객이나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아야 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
어찌 어찌 저녁 만찬은 끝났다. 아무래도 사귄 지 꽤 지난 커플들과 저녁을 함께 먹다 보니, 이젠 마냥 좋기만 하고 가슴 떨리는 게 아닌 현실이 더 중요한 커플이 되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를 바꾸어 가고 있는 것이다.
9시 버스를 탈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남부터미널에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9시 버스표는 모두 매진되었더라. 그래서 하는 수없이 고속터미널로 가서 9시 35분 차를 타고 전주에 왔다. 지금까지 5번 임용고사를 보면서 한 번도 시험이 끝난 후에 이토록 즐겁게 놀아본 적은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에 도보여행을 하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하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도 할 수 있었던 거다.
삶이 흐른다. 알고 있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삶이 얼마나 풍족하고 알찬지 보여주는 증표라 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살고 싶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시험은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다채로운 감정, 그래서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깨우침을 줬다. 어느 순간이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고 한다. 오늘 다르고, 내일 또 다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싱그럽고 특별한 것이다. 과연 내일은 어떤 하루가 시작될지 기대되고 설렌다.
▲ 전주천의 모습.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다. 그처럼 같은 날을 여러 번 보낼 수도 없다.
때 아닌 낙방기를 쓰는 이유
임용시험을 처음으로 봤던 게 2006년이고 마지막으로 봤던 게 2010년이다. 한문교육과에서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임고생들의 목표가 그러하듯 나의 목표도 ‘졸업과 동시에 합격’이었다. 그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기도 했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이기도 했다. 집에 별로 돈이 없어서 사립대학교에 다니는 것도 부담이 컸기에,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고, 졸업함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맘과 같지 않아 연거푸 떨어졌고,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 임용 합격의 꿈을 키웠던 곳. 하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사람은 밤하늘과 같다
2010년에 마지막 임용시험을 봤으니, 그 후로 어느새 7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시험을 관둔지 일이 년의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고 7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 갑자기 임용시험 때의 느낌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건 ‘때 지난 이야기를 마치 현재의 이야기’인 양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오래 되어 물이 빠지고 해어져 너덜너덜한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임용시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일까?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이란 영화의 명대사처럼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마음이 들어서 일까? 그 또한 아니다. 제도권 학교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안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만나 그간 꿈 꿔왔던 교육관을 맘껏 펼칠 수 있기에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만족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날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 대안학교 교사로 새로운 인연들과 만나고 6년간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과거의 임용 낙방기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예전에 교육학 강의를 들을 때면 전태련쌤은 매번 “삶은 꽤 정확합니다”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 말은 사람을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되는 말이다.
우주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공존한다. 지금 내 눈엔 버젓이 보이는 별이 이미 예전에 사라진 별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때 사라진 별이 500광년 떨어져 있으면 내 눈엔 현재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보인다고 실존하는 것도, 안 보인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무수한 밤하늘의 별바다엔 모든 시간들이 뒤섞여 보일 뿐이다.
이처럼 나라는 개체 안에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과거에 했던 행동들이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현현되었으며, 지금 당장 하는 행동들이 미래의 나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 현재의 내 모습 속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대로 과거를 얘기하는 것은 단순한 ‘때 지난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며, 미래의 나를 그릴 수 있게 한다. ‘오래된 미래’처럼 과거 속엔 현재의 나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번에 임용 시험 낙방기를 시간의 흐름 순으로 기술해 나가다 보니, 그 당시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이 볼 수 있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나름 유쾌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던 셈이다.
▲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찍은 밤하늘.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인간과도 같다.
실패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좋은 경험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실패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렇게 생각이 바뀐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이야기를 글로 적을 땐 성공한 이야기, 뭔가 그럴 듯한 이야기, 남이 봤을 때 ‘잘 살고 있구나’라는 이야기만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삶이 보잘 것 없이 일상적이거나, 때론 비루하기도 하니, 굳이 실패한 이야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나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남루하게 보일 거라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재학교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를 쓸 때에도 최대한 뭔가 있어 보이게 쓰려 애썼던 것이고, 학교의 여러 일과 중에 특별한 활동만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아마도 ‘지리산 종주기’나 ‘자전거 여행기’는 그런 생각 속에 탄생한 글이지 않을까.
▲ 아름답지 않아도 멋지지 않아도 이런 모습이 진짜인데..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실패를 해도 괜찮아’라고 평소의 지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임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실패를 부끄러운 것으로만 생각하여 더 이상 고찰하려 하지도, 남에게 말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겐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다. 아이들 나이 때(청소년기)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하며 조금씩 배워가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나는 그 나이 때에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했다. 나는 늘 어긋나지나 않을까, 완전히 주저앉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성공하는 삶을 위해, 남들처럼 살아가는 삶을 위해 앞을 향해서만 나아가기 바빴다. 나 자신은 실패할 정도의 도전도, 또는 실패를 받아들일 배짱도 없었으면서 아이들에겐 ‘실패하라’,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으니, 말만 번드르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최근에야 아이들에게 하는 말과 나의 행동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됐고, 더 이상 그렇게 말 따로, 몸 따로인 채로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이지만,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경험인 ‘임용고사 낙방기’를 쓰게 된 것이다.
▲ 그토록 준비해오던 시험에 떨어졌다. 한 때는 씁쓸한 기억이었지만, 지금은 행복한 추억이 됐다.
찬란한 과거를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다
8월 17일부터 쓰기 시작한 ‘임용고사 낙방기’가 드디어 이 글로 마무리 지어졌다. 10일간 과거로 떠나는 여행은 때론 그 당시의 씁쓸한 기분에 외로워지기도, 때론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가슴 벅차지기도 하는 여행이었다.
의식적으로든, 몸으로든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이 자리를 낯설게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건 현실에서 더 충실히 잘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삶의 빈틈을 만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럴 때에야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어떤 감정도,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던 것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져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니 여행은 떠난 곳에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갈 곳에서 행복하기 위해 떠나는 거라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정리를 하고 보니, 이제 더 이상 임용고사에 낙방했던 일들이 아픈 과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당하고 열심히 살았던 나의 과거였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기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임용고사에 낙방했던 매 순간들은 ‘찬란한 과거’라 할 수 있다. 그 찬란한 과거를 자양분 삼아 오늘의 현실을 재미지게, 신나게 살아보련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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