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0년 임용: 오수생 마지막 임용시험을 보다
마지막 시험이다. 임용 공부를 시작하면서 끝을 기약한 적은 없다. 처음 시험 볼 땐 곧바로 합격할 줄 알았고, 그게 재수, 삼수로 이어지자 ‘끝없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달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수까지 시험을 봤고, 급기야 오수를 하게 됐다.
▲ 공고문이 변경된 경우는 처음이다. 그 덕에 한문교사는 한 명이 늘었다.
마지막 시험이라 외치다
어느 해건 심간 편하게 임용공부를 한 적은 없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언제나 돈이었다. 집에서 임용공부를 한다고 해서 돈을 보태주거나 지지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단순히 ‘돈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막상 돈을 벌어야 할 나이에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는 실존적인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뿐인가? 학자금 대출을 받은 돈도 상환해야할 때가 어느덧 다가왔던 것이다. 2010년 전까지는 이자만 상환하면 됐지만, 2010년 이후부턴 원금까지 상환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코너에 제대로 몰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임용공부를 한다는 건, 내 삶을 건 모험과도 같았다.
그래서 2010년에 다시 임용을 하겠다고 맘을 먹으면서 결단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어떤 확고함도 없이 지지부진 끌기만 해서는 나도 처참해질 뿐만 아니라, 학자금을 서서히 갚아주고 있는 어머니까지 절망스러워지니 말이다. 아무리 ‘배운 게 도적질’이라지만, 그것만을 붙잡고 올인하기엔 상황도, 내 심리상태도 극한으로 치달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마지막 시험’이라는 배수진을 치게 됐다.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꼭 될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빌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뿐이다.
▲ 전날 밤의 사진.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다.
파도와 같던 나의 마음을 붙잡다
‘마지막 시험’이란 중압감이 느껴졌음에도 이상하게 잠을 잘 잤다. 4번의 시험을 볼 땐 다들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마지막 시험’이란 생각이 여유를 줬다고나 할까. 다신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 신비로운 일이 되는 것 같이 말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짐을 챙기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이제 정말 그토록 바라던 ‘바로 그날’이 온 것이다.
이 순간 스치던 생각은, 격포에서의 울분이었다. 작년 시험을 본 후 고사장에서 나오면서 ‘처절함’을 느꼈고, 그래서 이미 떨어질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결과를 받았을 땐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2009년 12월 4일에 낙방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격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다. 격포 해변에 앉아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만두를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왔다 갔다 하는 파도를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었다. 그건 파도가 흘러가고 흘러오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흘러가고 흘러오는 거였다. 파도에 투영된 나 자신의 모습, 나도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모른 채 헤매고 있었고, 삶의 변화무쌍함을 온 몸으로 느끼던 순간이었다. 씁쓸했고 내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했다. 모든 게 다 끝나고 텅 빈 무대에 홀로 선 배우, 가수의 마음이 딱 이와 같지 않을까.
그 후로 오늘 이 시간만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꿈꿔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펼쳐보이리라 다짐했다. 더욱이 올해의 여건들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내 마음도 안정적이고, 선발인원까지 한 명이 더 늘어 상황도 좋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배의 쓴 잔을 마신다면 그건 아직까지 기회가 왔을 때 잡을 만한 역량은 되지 않는다는 얘기겠지. 남 앞에서 조금 더 안다고 시건방 떨었을 뿐, 적어도 임용에선 쥐뿔도 없었다는 얘기이니. 격포와 온고을 중학교 사이의 시공간 속엔 그와 같은 이야기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 해가 저물어가는 격포에서. 씁쓸함을 느끼며 한 잔했다.
온고을 중학교와의 인연
하늘은 맑았고 약간 서늘하긴 해도 전형적인 가을날씨의 운치가 있었다.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는 건 축복이다. 집에서 7시 15분에 나왔다. 아직도 1시간 15분의 여유가 있고 거리도 멀지 않기에 천천히 가면 된다. 중용을 외우면서 페달을 밟는다.
한문도 외국어의 일종이다. 한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한문의 문법체계로 언어체계를 바꾸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올 한해 힘들여 외운 중용을 떠올리며 맘속으로 그려봤던 것이다. 중용의 언어가 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도록, 그래서 한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온고을 중학교 근처에 도착하니, 한바탕 축제가 펼쳐졌다. 특히 각 대학 체육교육과 후배들의 응원전이 볼만했다. 그 사이를 쌩하니 지나간다. 아는 사람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아는 체를 하긴 그러니 말이다. 장수생들은 이렇게 드러나기 싫어하는 숨은 존재들이 되어간다.
올해 임용을 보는 장소는 온고을 중학교다. 고사장이 배정되었을 때 ‘온고을 중학교’라고 써있는 걸 보고, ‘도대체 어느 학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08년도에 단기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곳이지 않은가. 이렇게 황당한 일이 다 있다. 그때 그렇게 주구장창 다녔으면서도 학교 이름을 까먹고 있었을 줄이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운 좋음’이지 않을까. 예전에 잠시나마 적을 뒀던 곳에서, 이젠 꿈을 펼치기 위해 시험을 보는 것이니 말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신나게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한교과 고사장은 4층이었다.
▲ 2008년도에 아이들과 한문을 함께 공부했던 곳에서 시험을 보게 됐다.
마지막 임용시험의 풍경
고사장에 짐을 풀고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는데 그제야 시계를 놓고 왔다는 걸 알게 됐다. 시험 볼 때 시간 안배는 매우 중요하기에 시계는 필수 중에 필수인데도 빠뜨리고 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얼마나 당황했던지, 잠시 멈춰 설 정도였다. 그걸 감독관에게 말하면 해결해주던지, 어떤 방법을 마련해주겠거니 했다. 그렇게 맘을 먹고 나니 좀 마음이 누그러지더라.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경수 누나와 딱 마주쳤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시계를 놓고 왔지 뭐예요“라고 지나가는 말투로 이야기를 했더니, 놀라시며 따라오라고 하더라. 교문 앞에서 응원하는 한교과 후배들이 있다며 걱정 말라는 거였다. 그래서 같이 가봤더니, 역시나 후배 중에 시계가 있는 아이가 있었고 잠시 빌려 달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되어 버렸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이렇게 자기의 일처럼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기분 좋다. 역시나 난 완전히 운 좋은 사람이다.
▲ 후배들의 열띤 응원전. 그 덕에 시계를 얻을 수 있었다.
교실에 들어섰다. 내 앞에 미향이가 앉아 있고 저 멀리엔 가을이가 앉아 있다. 가을인 민희의 친구로 올해 스터디를 함께 하며 알게 됐다. 이미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며 대학원에 들어갔으면서도 시험을 보러 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또 아는 사람이 보인다. 희정이는 동기인데, 2006년에 경기도에서 시험을 볼 때 1차에 당당히 합격했었다. 그 후로는 맘처럼 되지 않아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시험을 보고 있다.
시험은 최선을 다해서 봤다. 그때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교탁 위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급훈이 눈에 들어오더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열심히 준비했느냐에 따라 꿈은 이루어진다. 지금 난 내 꿈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고비도 흔들림 없어 넘어서려 한다.
내가 앉은 의자는 높이도 딱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의자가 불편하던지 의자를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난 그러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보조 감독자분이 바로 내 옆에서 왔다 갔다 했던 것. 그러니 자꾸 집중이 안 되어 무척이나 힘들더라. 그래서 나중엔 아예 시험지를 반으로 접어서 시험을 봤다. 그리고 전공시험 때엔 잘 말해서 감독관이 다른 곳으로 옮기시게 했다. 아직도 작은 부분에 심하게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 외엔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시험장에서 느껴지는 긴장감도 좋았고 하나라도 제대로 풀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그 느낌도 좋았다. 뭐 하나 부족함 없이 마음 속 깊이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들이여. 처음으로 그 시간을 밀도 높게 느꼈고 빠져들었다.
그러니 작년과는 달리 올핸 시험이 끝났을 때 뿌듯함이 느껴졌다. 제대로 무언가를 한 듯한 느낌 말이다. 아이들은 짐을 싸들고 바삐 고사장을 빠져나갔지만 난 여유로웠고 제일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을 맘속 깊이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 마지막 임용을 봤던 온고을 중학교.
인용
1. 06년 임용: 첫 시험의 불안감을 안고 경기도에 가다
3. 07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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