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06년 임용: 내가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다
시흥에 사는 민호는 군 시절 후임으로 들어와 나에게 엄청난 갈굼을 당했었다. 군이란 시스템이 멀쩡한 사람도 이상한 사람으로, 잘 하려는 의욕적인 사람도 어설픈 사람으로 만든다. 나도 그 피해자고 민호도 그 피해자지만, 더욱 웃긴 점은 내가 민호보다 선임이란 이유로 짓누르고 바보로 만들었단 사실이다. 제대한 이후로 그랬던 과거들이 무척이나 후회가 됐지만, 그래서 민호도 내가 미울 법 한 데도 자기 집에 기꺼이 초대해주고 하룻밤 잘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무척이나 고맙고 미안했던 순간이었다.
▲ 민호를 만나기 전에 시흥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다
밤엔 자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냈고 아침이 밝자 차려준 밥을 먹고 수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흥에서 수원까지 가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리더라. 그래서 그때도 마야의 노래를 들으며 울컥울컥 무언가 올라오려는 마음을 달랬다.
스쳐지나가는 광경들, 그리고 미지를 향해 내딛는 설렘이 하나로 뒤엉켜 마치 고등학생 때 수능을 보러 가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전주 농고에서 수능을 봤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도 집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버스는 남부시장과 시내, 그리고 모래내를 지나 농고에 도착하는데 하필 남부시장을 지날 때 만감이 교차했으니 말이다. 남부시장은 늘 다녔던 너무나 익숙한 시장인데, 버스를 타고 지날 때 본 남부시장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못 볼 법한 스산한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버스는 제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남부시장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지나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수원으로 향하던 버스에 본 바깥 풍경이나 고3때 본 남부시장의 풍경이나 살아있기에 ‘뭔가 남다르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기에 감정이 얽히고, 익숙한 광경조차 낯설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때 일기엔 아래와 같이 썼다.
맘도 기쁨으로 충만해져 있었고 마야의 노래 가락을 통해 ‘힘을 내야지’란 의지를 다지니까 정말로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중간 생략)
내가 좋아 선택한 것이고 돌아옴 없이 이 길만을 줄곧 달려 왔다. 후회를 한 적도 없었고 되돌아가자고 생각한 적도 없을 정도로 나에겐 기쁨을 주는 이 길이었다. ‘그래, 난 나의 길을 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만을 갈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2006.12.03.)
그런 충만한 기분으로 수원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버스 정류장엔 인파들이 넘쳐난다. 가장 많은 교사를 뽑는 경기도답게 수험생이 택시를 잡기 위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이 매우 좋았던지, 바로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택시가 섰고 지금 막 도착한 사람임에도 모든 시선을 뒤로하고 택시에 무작정 탔다. 다행히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더라. 정말로 ‘초심자의 행운’이 있긴 있나 보다.
▲ 너무도 익숙한 이 광경이 수능을 보러 갈 땐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출처 - 다음지도)
첫 시험이라 떨렸을까, 너무 큰 기대가 있던 시험이라 떨렸을까
시험장에 도착했다. 첫 시험이기에 낯선 광경들과 낯선 사람들. 설렘보단 떨림이, 기대보단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나만의 축제의 장소에 도착했고 날 위해 준비되어 있던 그 자리에 앉았다. (2006.12.03)
그래서 일기엔 위와 같은 말이 쓰여 있다. 마음을 다잡는다고 다잡아지는 건 아니지만, 말로는 할 수 없는 희망이 어리긴 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받았던 문자들을 생각하며 파이팅을 다졌다.
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신감이 물밀 듯 솟아오른다. 바로 이 자신감이 중요한 것이다. 헤어짐을 통해 얻어낸 값진 선물이며 이 자신감을 통해 흔들림 없이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그걸 입증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헛된 자만이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조급해지지 않고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이었으니, 최상의 컨디션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상동)
어찌나 불안했던지 자꾸만 마음을 가다듬는다. 속으론 ‘괜찮다, 괜찮다’를 외치지만, 겉으론 태연할 수가 없다. 내면의 힘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잡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힘을 의지하며 조금이나마 힘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축제는 시작되었다. 첫 임용고사는 06년에 보았고 그 다음해부터 09년까지 치열하게 책도 읽고 고민도 하며 ‘삶을 즐기는 법’에 대해 나름 생각하게 되며 ‘삶=축제’라 인식하게 된 줄만 알았다. 그래서 첫 시험에 대해선 잔뜩 무거운 느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당시의 일기장을 찾아보니 축제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걸 보면서 ‘나의 인식틀은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렇듯 하나하나 갖춰져 간 게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첫 시험을 봤던 곳. 이곳에서도 전주대 한교과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초심자의 행운, 그렇게 떠나다
첫 시험치고 잘 풀었고,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꽤나 만족했던 듯싶다. 경기도 임용시험의 경우엔 다른 지역의 시험과는 달리 2차에서 보는 교육학 논술시험을 1차에서 미리 본다. 교과 시험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에 교육학 논술시험까지 모두 본 후에 끝나는 것이다. 그만큼 타지역보다 시험 시간이 긴데도, 술술 잘 풀어갔다. 그래서인지 시험이 다 끝나고 나서도 ‘이번엔 정말 합격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신 있어라 했던 그 모든 것들이 허울 좋은 자만에 불과했군’이라고 자조하면 어떨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올 수 있었으니,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상동)
위의 일기처럼 자신에 가득 차 있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첫 시험이었지만 내가 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날만큼은 모든 게 내 맘보다도 더 특별하기만 했다.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전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잘 돌아왔다.
그러나 첫 시험은 실패로 끝났다. 초심자의 행운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찌 보면 첫 시험이기에, 아무런 경험도 없기에 기고만장했는지도 모른다. 실패 또한 경험의 한 단면이라 한다면, 무작정 슬퍼할 일도 무조건 낙담할 이유도 없다. 더욱이 경기도에서 시험을 보는 경험을 통해 민호도 다시 만나게 됐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도 키울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게 아닐까.
▲ 시험이 막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싸이에 남긴 글.
인용
1. 06년 임용: 첫 시험의 불안감을 안고 경기도에 가다
3. 07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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