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 반응
02년 3월 5일(화) 구름 많음
요즘은 겨울이 아니라 봄인 것만 같다. 분명 시기상으로 틀림없이 꽃 피는 봄이 왔지만, 작년 3월의 스산하고 매서운 바람이 불고 희뿌연 눈이 흩날리던 때와 비교해보면 너무 생판 다르기에 작년의 철원이 꿈인양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요즘 새벽의 온도라 봐야 영하 5도 밖에 안 내려갈 뿐더러 날씨가 흐려지더라도 눈 내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춥디 추운 겨울이 다 지나고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이렇게 선뜻 찾아와서 한 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철원의 겨울다운 겨울을 나지 못했음이 못내 섭섭하기도 하다.
이렇게 변화된 날씨에 맞추어 우리의 생활도 변했다. GOP에서 FEBA로의 철수가 그것인데, 사실 저번 주까진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주 주일에 군장 사열을 중대장님에게 하면서 새삼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으로 철수 때 매고 갈 군장을 꾸리려니, 몹시 짜증스럽긴 했지만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려는 벅찬 감격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오늘까지 군장을 꾸리느라 분주하고 오늘은 기여코 선발대(병장 이강석, 상병 박형국, 일병 유민호)가 2대대로 떠났다. 이쯤 되어 문득 새로운 세계로 떠나려 하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잔류하고 싶다는 후임들을 혹 보게 된다. 아무래도 선임들이 키워줬던 FEBA에 대한 환상만 있을 때와는 달리 대대 아저씨들이 키워준 FEBA의 안 좋은 선입견들이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두려움, 그건 한자어로 恐怖(공포)라고도 쓰며 영어로 thrill(스릴)이라 하지 않던가! 두려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주일에 목사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두 가지 뿐이란다. 그 첫째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고소공포적(高所恐怖的) 두려움이며 둘째는 큰소리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고성방가적(高聲放歌的) 두려움이다. 이 두 가지 두려움을 뺀 나머지 두려움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닌데 타인에게 들었던 선입견으로 인해 생긴 것이란다. 그러니까 FEBA라는 새로운 곳으로 가면서 생기는 두려움은 다름 아닌 얘기를 들어 머릿속에 들어간 선입견들의 조합으로 생긴 것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두려워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다. 군에 오기 전에 군이 혹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렵게 느껴지다가 막상 와보니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라 느낀 것이랄지, 초여름에 수문 개폐를 하면서 밤에 물이 많이 불면 그 굵은 빗줄기를 다 맞아 가면서 수문 개폐를 하고 판망, 크레모아를 제거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막상 그게 현실이 되었을 때 무척이나 암담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물흐르듯 흘러 지금은 아련한 추억 따위로 전락해 버린 것 따위가 바로 그런 예이다. 지금은 두렵고 그럴진 모르지만 막상 그곳에 가서 적응하다 보면 언제 그런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냐는 듯 까마득하게 느껴질 것이고 오히려 지금이 낫다고 생각을 하게 될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즐길지어다 그대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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