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에 담긴 추억담
01년 8월 4일(토) 매우 더움
저번 주 토요일부터 그렇게 무덥게 내리쬐던 하늘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까지 주말이면 늘 내렸던 비와는 달리 어두우리만치 아련한 추억을 던져줄 전주곡일 뿐이었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쉽사리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긴 태풍의 영향에 의한 비였으니 쉽게 그치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날이 아니었다.
주일 저녁, 전반야(前半夜)였다. 다행히도 비는 내렸다 말았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근무는 꽤나 수월한 편이었다. 하지만 합동 근무 시간 몇 분 전부터 감히 맞설 수 없을 정도의 비가 들입다 퍼붓기 시작했다. 그 비로 인해 우의를 입었음에도 전투복은 다 젖었고 전투화는 신은 게 더 불편할 정도로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짜증 속에서도 나름대로 희망이 있었던 까닭은, 이젠 잘 수 있겠거니 하는 안도감과 자고 일어나면 비가 어느 정도는 그쳐 있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들어와서 현실을 잊어갈 꿈의 세계로 무한정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빨려 들어가는 도중, 난 삶의 뼈저린 아픔을 몸소 체험해봐야 했다.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은 둔탁한 ‘기상’이란 소리에, 이제 막 잠든 전반야 근무자들은 허겁지겁 일어나야만 했으니까. 시간이 무려 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절로 일어나진 건 상황병이건 GOP 초병이건 간에 현실 사태의 긴박함을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린 일어나서, 우리가 생각했던 거 이상의, 더욱 비참한 현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대교천 수위가 120cm에 육박했기 때문에 판망을 제거하고 크레모아를 수거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평소 35cm였던 대교천 수위가 그렇게까지 높아지리라 생각하지 못했을뿐더러 재해대비 매트릭스(Matrix), 대교천 수문 개방 행사시, ‘가끔 비 속에서 정령 이러한 행동들을 하고 있어야 하는 구나’하고, 좀 비현실적이었음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그게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린 억수로 퍼붓는 빗방울 속을 헤쳐나갔다. 미처 탄을 수령 받을 여유도 없이 대교천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만큼 북한군의 위협보다도 비로 인한 우리 지역의 피해를 걱정하고 있을 정도니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감히 짐작해볼 만하다. 나는 동주와 같이 판망 제거조 엄호를 맡게 되었다. 대교천의 그 날카롭게 흘러내리는 거대한 폭포수 같은 냇물을 보면서 정령 자연 앞의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얼마나 허례허식에만 가득 찬 존재인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떨어지는 장대비 속에서도 몇 분 못 자고 나온, 나는 비몽사몽간이었으니까 할 말 다 했다고나 할까. 그땐 오히려 추웠기에 삶을 더욱 비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과연 내일 아침, 아니 오늘 아침이 돌아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가만히 있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을 정도인데, 과연 실전에서 뛰던 분대장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렇게 있자니 갑자기 대대장님께서 오시더니, 66초소 내로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말 한 마디에 너무나 감사한 생각을 하며 동주와 난 초소 내로 투입했다. 우선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았고 그 공통의 관심에서 열외될 수 있음이 좋았다. 그건 이를테면 열외의식의 극치였다고나 할까? 그런 와중에서도 밖에서 수위를 파악하고 있는 기영재 일병, 대교천 동초를 서고 있던 기성이를 보면서 가슴 한 곳이 아려오는 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초소 내에서 바람을 피하며 있자니, 더욱 잠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런 한 소대가 벌컥 뒤집어질 정도의 난리 속에서도 아주 기본적인 욕구만을 충족하고자 하다, 사람이니 어쩔 수가 없다. 어찌 보면 너무 본능적인 욕구대로만 사는 동물 같은 생각이 들어서 왠지 찝찝한 생각이 든다. 작업조들이 분주히 움직이다 보니 동이 터서 철수를 하게 되었다. 얼마나 먹구름이 짙게 꼈던지 동이 트는지조차 모를 정도의 날씨였다. 그런 피로와 온 몸이 눅눅하고 축축한 짜증 가운데 오전 대공 근무까지 서야 했다.
그렇게 연이은 3일간 쉴새없는 비가 내렸다. 그러다 보니 젖어 있는 군복, 냄새 나는 군복을 입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만큼 각자가 기분도 좋을 수가 없어 소대 분위기는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꼭 이런 전체적인 이야기를 하질 않더라도, 내 기분 역시 최악이라 부정적인 생각이 연거푸 들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날씨가 개어 해가 떴을 땐, 모두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해라는 여름에 있어서 만큼은 뭐니 뭐니 해도 짜증의 대명사요, 활동을 방해하는 방해꾼의 이미지다. 하지만 한 여름의 쏟아지던 빗줄기 가운데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화사로운(이러한 극단의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햇살은 더 이상 그런 안 좋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희망을 선봉자요, 삶의 동반자일 뿐이다. 사실 너무 웃긴 거 같다. 같은 태양을 보는 관점이 이리 극단적일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 현상,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점이 다분히 주관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빗 속에 맺혀진 아련한 추억은, 빗줄기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삶의 활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도록 해준 귀한 순간이었다.
좋은 고참에 대한 다짐
01년 8월 13일(월) 많은 비가 내려 어두움
벌써 내 밑에 17명이라는 후임병들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이등병 시절의 한없이 어린 마음, 이를테면 모든 걸 남에게 의지해야 될 것만 같은, 내 스스론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은 소치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이젠 이규희 분대장님의 말대로 내 밑의 후임병들을 내 손으로 챙길 때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들보다 많은 걸 알아서 저들을 가르칠 때인 것이다.
여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러한 위치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지기까지 하다. 이러한 때에 가지게 되는 나의 다짐은 이등병 때에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무의식의 표현체이며 결정체다.
선임병이 되어서 빠진다는 거 열외의식이 늘어가는 거, 그건 어쩌면 당연한 군대의 계급성에 따른 한계일지도 모른다. 나도 물론 나중에 군 생활한 지 1년이 넘고 나면 그렇게 될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나도 저들과 똑같은 인간이기에 어떻게 바뀔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빠진 모습을 통해서 내 밑 후임병들에게 폐를 끼치진 않겠다. 예컨대 늦게 일어나서 침낭을 정리하고 있는 후임병들에게 방해가 되게 한다든지, 내가 식기를 씻기 싫단 이유로 후임병들의 식기로 밥을 먹는다든지, 치우라고 시키는 행위 등을 말이다. 적어도 이런 것들을 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조금은, 평등화된 군대가 될 수 있겠지~
입대하고 나서 미래 설계를 했을 때, 계급이 높아질수록 상담하며 같이 의의 좋게 살아가겠노라고 했었다. 누군가의 고충과 아픔을 듣고 그것에 동참한다는 거.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며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에 있을 때 그나마 마음을 인정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온 결과이리라. 갑자기 백일휴가 때 본 인터넷 메일이 생각난다. 그때 혜경이 누나는 ‘보통 땐 그렇지 않은데 힘들어지기만 하면 니가 많이 생각나더라’라고 썼었다. 이 말이야말로 아픔에 동참할 수 있었던 내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예일 것이다. 아픔에 동참한다. 무지 고답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말은 아주 간단한 행동을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바로 묵묵히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볼 수 있고 그 사람의 얘길, 귀 기울여 들어볼 수 있다는 거. 생각만큼 쉬운 행동임에도 우린 섣불리 이런 행동들을 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그저 귀기울이는 행동은 고루한 일이요, 그저 자기 시간을 희생하는 일이기에 선뜻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적어도 혜경이 누나에겐 그런 행동을 했었나 보다.
그런데 며칠 전 상남이와 근무를 서면서 다시 옛적을 회고케 하는 언중유골의 말을 들었다. “넌 말 끝마다 토를 달아서 말하기 싫단 말야.” 이 말은 위에서 얘기해온 귀기울이는 것과는 정반대된 개념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생각해봐도 전혀 납득되지 않는 얘긴 아니다. 그러한 얘긴 어렸을 때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만의 다짐을 진정 실천하기 위해선, 언제나 했던 얘기처럼 나의 입을 다스려야 것이다. 우선 그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반박의 주제로만 생각하려 할 게 아니라 존중하고 이해해주려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그럴 때 나의 다짐이 현실이요 실제가 되지 않을까?
여담: 쌍대기를 달고서
쌍대기(지해식씨의 해학적 일병 묘사)를 달은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님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꽤나 긴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든다. 쌍대기는 막대기에 비해서 더욱 성실하고 희생적이길 원하는 것 같다. 고참들의 풀어줌은 그다지 없지만 그들의 기대감은 상승하는 듯하기에 더욱 어깨가 무거워진다. 저번에만 해도 오전 작업을 안 하고 바로 잘 수 있었는데, 바로 내 밑 선의 이등병들 태반이 전반야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병인 상남이와 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젠 그러한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임을 알기에 열외의식을 버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거라면 차라리 알아서 하는 게 낫지 않던가. 쌍대기의 무게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내 자릴 내가 찾을 것이다.
8월에 64초소 근무 중에.
구름 과자
01년 8월 18일(토) 어두움
담배에 대한 본래의,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 속에 굳어진 나의 인식은 아주 저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원래의 인식(할머니는 담배를 피셔서 자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에겐 좀 거북하게 느껴졌다)이 그러하던 터에 학교에서 금연 비디오를 보여주며 폐를 절개하는 내용이 나오며 위험성을 극대화시킨다던지, 간접 흡연의 폐해를 직접 보여줘 위해성을 극단화시켰던지 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런 생각은 더욱 굳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담배 한 갑의 가격은 무려 천원을 넘는다. 그런데 골초들은 하루에 두, 세 갑도 필뿐더러 그렇지 않은 일반인의 경우에도 반갑 이상은 핀다. 그렇다고 그들이 쓰는 돈이 일반인 이하의 돈이 아님을 생각해볼 때, 그들은 늘 천원씩의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며, 그건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엄청난 손해인 셈이다. 거기다가 그들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기까지 하다. 회사 내의 흡연을 금지한 것은 다반사요, 사회에서의 인식이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외부인으로 몰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군에 와서 나는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고정된 의식이랄지 어머님과 형의 금연 중, 애숙이의 울려퍼지던 권고가 있었긴 하지만 먹을 게 제한된 군대이기에 회피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하기까지 했다. 입 안 가득한 먹고 싶은 유혹의 미충족이 결국 담배를 매력적인 먹거리로 보이게 하기까지 했으니깐. 저들이 그토록 추구하고자 하는 연기 뿜음의, 아니 들어마심의 매력이 무엇인지 엄청 궁금했기 때문에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성적인 욕구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초기에도 몇 번이나 담배를 빌려 달라고 하며 펴보려 했지만 상황이 도움, 아니 너무 나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펴보질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때가 온 것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되도록 조장(助長)했던 것도 없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제였던 16일(목)에 RCT 대비 상황이 걸린다고 다들 떠들썩했다가 갑자기 오후로 연기되는 바람에 전ㆍ후반야는 모두 전원 취침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행복해하기도 잠시 갑자기 2P 부소대장님이 전반야 인원들을 부르더니, 다들 이등병인 걸 보시면서, 일병 이상인 상남이와 나를 작업 대열에 끼운 것이다. 비록 거치대 설지 작업이라는 비교적 쉬운 작업이었지만 잘 수 없다는 사실이 좀 화가 날 뿐이었다. 그렇게 분대장님과 남이와 함께 작업을 했다. 생각보다 쉬웠고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작업 도중 피우는 그들의 담배는 입이 근질근질하던 나에게 아주 매력적인 그 무언가로 다가왔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장난삼아 담배를 달라고 했고 남이는 실제로 담배를 주었다. 그에 따라 난 겉담배를 피웠다. 아니 내가 그렇게 피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몸의 거부할 수 없는 반응으로 피게 된 것이다. 이물질이라 판정해버린 나의 목은 그 연기를 마시기를 거부했고 내가 의식적으로 그걸 빨아보려 해도 어려서부터 굳어질 대로 굳어져버린 담배에 대한 특히 그 오염되버린 연기를 알고 있는 내 무의식은 그걸 쉽사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거부할 수 없는 싸움, 난 그걸 각오하면서 담배를 피운 것이고 난 그렇게 내 자신을 괴롭혀 갔던 것이다.
가학증이라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괴롭힘을 각오하면서까지 담배를 피려했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쉽게 말해서 내 자신을 괴롭힌다는 그런 의미의 가학증이기보다 그냥 가학증이란 의미를 깊이 있게 새기며, 담배를 피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당해왔던 피학성에 대한 감정 분출구, 가학성의 가능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많이 가슴앓이 하고 있었던 터였다. 사회가 아닌 군이란 현실 속에서 억압되어 갔던 그런 피학성의 분출구를 찾고 싶었다. 그렇기에 난 비록 나 자신에게 퍼붓는 가학증일지라도, 구름과자란 분출구를 찾았고 그걸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그렇게 첫 담배는 아무리 마시려 해도 무의식적인 거부감으로 제대로 들이키지 못해서 필터부분까지 피게 되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담배도 작업 도중에 피게 되었는데, 남이가 속담배를 가르쳐 준다며 깊이 들이키라고 강요했고, 아니 권했고 분대장님 또한 담배를 처음 폈을 때 쓰러질 듯했던 기분을 얘기해줬기 때문에, 과연 그 쓰러질 듯한 기분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져서 정말 느끼고 싶었다. 날 그렇게 자꾸 충동질할 수 있었던 까닭은, 뭐니 뭐니 해도 이 한 번의 경험이 나에게나, 내 주위 사람들에게나 끼칠 영향이 극히 미비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한 번의 경험으로 그 폐해를 알면 다음부턴 더욱 안 하게 될 테지 하는 확신 때문이었다. 가끔은 의식 속의 각인보다 선경험을 통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거, 열 번 사고실험을 해보는 것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낫다는 거, 그건 진리였다. 의식 속의 무조건적 각인은 충동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을뿐더러 한 번 그렇게 무너지면 순식간에 폐허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선경험을 해야 될 필요도 있다.
그런 확고해진 생각 속에서 세 가치의 속담배를 태웠다. 그 매서운 연기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건 피울수록 속이 무지 메스껍다는 것이다. 술을 마셨을 땐 흥미로운 쾌감이 남았다면, 담배는 역겨운 고통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만약 그 충동 쾌감이 즐거운 거였다면, 난 그 담배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머리가 어질어질 했기에 죽을 지경이었고 몸이 그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 땀도 무지 많이 나고 있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암튼 최악 중 최악의 경험이었다우.
지금 이 시간에도 인간 굴뚝이 되어 자기의 몸과 돈을 버리고 있는 사람들…… 난 그들을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다만 좀 더 나은 것을 찾아서 맘가짐을 새로 해주길 바랄 뿐인 것이다.
첫 사랑 김선미
01년 8월 22일(수) 구름 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 그걸 인연(因緣)이라 하지 않던가! 그 인연이라는 거, 근데 우리들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그건 누구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신의 의지, 계획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안다. 내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만나기 싫은 데도 만나야만 할 사람이 있고 만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평생을 두고 만나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연의 과정인 만남과 헤어짐 그건 절대 자기의 의지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잊지 못할,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주관하는 계획이 인연이라면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만남이 있었다. 내 첫사랑이라 정의하고 싶을 정도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한참 암울하던 가운데,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이던 시기, 난 내 의식(과거로부터 겪어온 암울과 암담, 그 단편에 내 자신을 한없이 비하시켜갔던 것이다) 속에 내 자신을 파묻어 갔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의식 가운데 파묻는 행위, 그건 제2의 암매장과도 같은 것이었고 나를 더욱 비참히 만드는 것이었다. 언젠가 TV에서 봤던 정신과 의사가 했던 “자기 자신을 가두는 자폐증은 사회와의 격리를 불가피하게 만들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비참성을 극대화시키기에 결국은 초래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합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암울하던, 앞날에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던 그 시기에, 탈출구와 같던 희망의 빛줄기를 넌지시 선사해준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사람과 나와의 만남을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인연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이고, 절대 잊지 않으려 할 뿐더러, 절대 잊을 수도 없는 것이다.
김선미와의 만남, 그건 최대의 이슈였으며 최대의 행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그 철없던 시기에 그렇지만 꽤나 암울했던 시기에 그 아인 나에게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그런 자폐증이 왜 생겼는지를 알려줬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그 아인 천사 이상의 인간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우연하게도 생활기록부에 써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남 돕기를 좋아하고 솔선수범한다’고 말이다. 학교의 선생님조차 선미를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 말에 만배 수긍했다. 그 아인 그렇게 돕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관심이 있어 다가왔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선미가 그렇게 다가왔다는 게 참으로나 비참한 현실인 양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선미가 날 볼 땐, 불쌍한 사람 정도로만 보였을지도 모를 얘기도 될 테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만도 않다. 어쨌든 그러한 계기로 그 아이와 난 친해졌고, 그러한 계기로 난 지금까지 그녀를 추억하며 생각할 수 있으니깐. 선미와 나와의 추억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비 오는 날에 여동생과 함께 비 맞고 가는 선미를 봤다. 그런데 그때 난 그 아이 뒤에 있었고 우산을 받쳐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나의 속마음은 그 아이에게 우산을 주고 싶은 마음(같이 받고 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음은, 그 당시 나의 좋아함의 감정은 남녀의 육체적 사랑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정신적 사랑에서 기인된 아주 순수한 사랑이었음을 보여준다)이 굴뚝 같았으나, 겉으론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의 소심증은 그녀를 향한 대담하리만치 관심 있는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애초부터 그렇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그녀를 못 본 척 가로질러 지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날 밤 땅을 치며 그 당시의 일을 후회했고 좀 더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라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인 나에게 유난히 잘해줬다. 보통 때 말을 걸어주는 건 다반사요 날 착한 아이라 많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날 인식시켜 갔고 날 그렇게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어딜 가더라도, 이를테면 도청, 과학관 등을 갈 때 꼭 나를 챙겨주었다. 그러한 관심은 나에게 많은 힘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도청에 갈 때, 버스가 오기에 그 버스인 줄 알고 150원을 내고 탔는데, 글쎄 그 버스가 아니라는 거다. 순간 당황해서, 부끄러워서 자빠지는 줄 알았다.
그러한 에피소드 외에 그 당시의 나의 순진성을 극악히 잘 드러내주는 게 있다. 그렇게 나에게 들어온 그 아이가 난 그렇게도 좋았는가 보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갈 때가 되면 자동반사적으로 난 그 아이 집으로 무의식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의식이란 게, 나의 생각 중 드러내지 않았던 부분이 어느 순간 결국 드러나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 아이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난 선미가 집에서 나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선미가 집에서 나올라치면, 난 무의식적으로 모레에 얼굴을 파묻고 못 본 체 했던 게 기만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도 그렇게 그 아이네 집에 가서 기다리는 데 그날따라 그 아인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하고 집으로 가려고 골목길로 접어드는 찰나, 바로 앞에서 선미가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피하고픈 생각까지 들엇다. 정말 아이러니컬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보고 싶다고 찾아갔고 그렇게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눈앞에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이자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왜 그리도 복잡하고 생각만 같지 않은지. 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미 외딴길의 골목길이었기에 그 아이도 이미 나를 봤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제야 피하기엔 내 자신이 너무 용기 없어 보이기도 했고 비겁해 보이기도 해서 피하진 않았다. 그때 최대한 용기를 내어서 했던 행동, “안녕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부끄러움을 주체하지 못한 채 뛰어 도망가 버렸다. 순수함의 극치이며 순진함의 극치이기에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그런 좋아함의 감정이 부럽기도 하고 좋게 느껴진다.
그렇게 3학년의 시기가 흘러 4학년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난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길 바랐다. 지금까지 학교생활을 하며 누군가와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바랐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 아인 나에게 있어 크나큰 의미였고 동행자로서의 의미가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주었고 그 아이와 난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 기쁨의 쾌재를 외치며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쁨을 잠시 흔드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한 반을 더 늘리게 되며 반 아이들 중에 몇 명은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미와 떨어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닥쳤다. 그래서 얼마나 두근두근 거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곁에 있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쉽게 그 아이와 난 같은 반이 되었던 것이다. 너무 다행이었고 행복했다. 그렇게 계속되었던 인연(因緣)을 난 쉽게 깨버렸다. 학교를 전학을 가므로 다신 그녀를 볼 수 없었으니까. 그 후로도 난 그녀를 추억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 행복하게 살아왔다.
인연이란 때론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나쁘게도 좋게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작은 인연들로 우리의 사고관과 인생이 변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함 없이 나름대로 잘 이끌어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며 이 글을 통해 선미를 추억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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