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장님과 설날을 보낸 사연
02년 2월 12일(화) 맑음
2월 12일은 민족 대명절 설날이었다. 이 날은 보통 설에 비해 아주 특이한 날이었는데 기본적으로 군에서 보내는 첫 번째로 보내는 설이란 게 그것이며 특히 사단장님하고 동석 식사를 하며 새해를 열었다는 게 그것이다. 새해 첫날에 전망대에서 해돋이를 본다며 사단장은 1월 1일에 우리 부대에 오신다는 거다. 그래서 아침 식사를 우리 중대 대기 막사에서 하신다는 것이었는데, 그걸로 인해 우리들은 동석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단장님을 맞이한다는 건 그렇게 그저 친구를 맞이하듯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단장이 지나가는 곳에서 지적을 받아선 안 되기 때문에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청소하고 또 청소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린 며칠간 대기 막사 대청소를 해야 했고 심지어 그 전날엔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아예 대기 막사를 쓰지 않고 놓아둬야 했다. 대기 막사는 밤 근무할 때 근무의 힘듦을 푸는 장소이자 식사를 하는 장소인데도 말이다. 그건 계급이 높은 사람에 대한 예의이자 내일 있을 식사 시간에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어둡고 지치며 불편했던 며칠간의 힘든 시간을 지나 설 당일을 맞이했다. 일개복으로 말끔히 차려 입은 우리는 대기막사에서 3007-1호가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주임원사님의 왔다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필승”이란 경례 소리가 천지를 울리듯 큼지막하게 들려왔다. 드디어 그토록 뵙고 싶었던 사단장이 오신 것이다. 사실 사단장님을 뵙고 싶단 표현보단 별 두 개를 단 계급장이 어떤지 보고 싶다고 표현하는 맞겠다. 수행인원 여럿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단장님은 “새해 복 많이 받아라”라는 말씀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우리들도 박수로 맞이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덕담과 덕담이 오고 가는 가운데 굴이 들어 있는 최고급 떡국을 10분 만에 뚝딱 먹어 치웠다. 며칠간의 그런 노력과 힘듦이 한 시간 만에 마무리되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 그렇게 끝나고 나서 밖에서 사단장님과 함께 전망대를 배경으로 당당한 모습을 카메라의 필름에 담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3월 5일(화)이 되어서야 이런 글을 왜 쓰느냐고? 여기에 이렇게 좀 특이한 사실이 전혀 기록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내 서술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래도 표현력이 중요시 되는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실 위주의 짧은 일기만을 쓰다 보니 생긴 문제인지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앞으론 사실에 좀 더 접근해서 그 상황에 따른 일련의 과정들을 그려나가듯 스케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를 계기로 글쓰기도 한 단계 나아지게 될 거다.
사단장님의 설날 방문에 우리 중대는 며칠 전부터 끙끙 앓아야 했다.
소대 중간에 대한 조언
02년 2월 16일(토) 조금 눈 옴
그렇게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2월이 오고야 말았다. 2월엔 내가 군에 온 지 1주년 되는 날이기도 하고 G.O.P에서 보내는 마지막 달이기도 해서 아주 많이 뜻깊은 한 달임에 틀림 없다.
상병이 되었다. 덩달아 군 생활을 한 지 1년이 됐단 뜻이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다는 건 무언가에 많이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어 보면 타성에 많이 젖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선뜻 부인하기가 힘들다. 시시때때로 수양록을 쓰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달라진 점이 뭔지, 잘못된 점이 뭔지 되새겨 보고 바꾸려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익숙해진 삶 속에 타성에 쪄들어버릴 대로 쪄들어 버린 내 의식이 그런 걸 쉽게 감지해내지 못할 뿐더러, 혹 느꼈다손 치더라도 그건 편한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에 애써 외면해 버리곤 한다.
법정(法頂)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에 보면 타성에 젖어버린 삶이야말로 죽은 획일화된 삶이며 버러지(버러지는 본능을 따라 살지라도 저만의 원하는 바를 충족하며 살기에 삶다운 삶이라 볼 수 있다)만도 못한 삶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에 골방에 들어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진정 어리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진정 어린 주관(그러니깐 진정한 옳음)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선 사실 나도 나 자신이 얼마나 빠졌고 야비해졌고 더러워졌는지 잘 모르겠거니와 그런 기대와 이런 사회에서 원하는 중간의 모습에 얼마나 다가갔는지 의심스럽고 그렇게 혹 고민했더라도 그게 얼마나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하고도 명확한 사실이 있다. 결코 ‘이건 아니다’라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음으로 타성에 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정 옳다고 생각한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진정한 선일 테니 말이다.
다음 달이면 우리 세 동기(나, 상남, 지용)들이 중간이 된다. 중간이 되면 소대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아이들 통제, 소대 재산 관리는 당연히 우리들 몫이 되는 것이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벌써부터 선임 중간들(형국, 영주, 원기)은 우릴 붙잡고 감히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카리스마를 키우고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므로 우리들의 존재를 각인시키라고 주문을 하고 한다. 사람을 통제하려면, 그만한 위압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감히 넘보지 못한다는 소리이리라. 그건 당연하고도 평범한 진리임에 분명하다. 아무래도 편하다는 건 그 사람이 나한테 별말 없이 그저 잘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혹 도를 지나친 행동을 해도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참들은 이제 악역이 되길 바라는 것이며 그에 따라 끊고 맺음을 확실히 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뇌리 속에 스치는 것들이 있다. 윽박지름, 성냄 뭐 이런 표독(慓毒)한 것만이 타인을 진정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냐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느끼기론 뭔가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러한 것들이 그저 시비조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며, 시비조로 들린다는 것은 반감만 사는 일쯤이기에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걸 싫어하게 되고 덩달아 아무리 일리 있는 말로 가까이하려 할지라도 그런 것 조차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윽박지름을 당한다고 느끼면, 더욱이 그게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계속 반복되다 보면, 은연 중 그런 것에 익숙해지게 되어 진정 잘못한 것에 대해 말해줄지라도 반성은 커녕 ‘또 시작이네’하는 반항심만 커진다는 거다. 그런 관계의 악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기보단 선임들이 그렇게 이끈 결과라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게 적은 것의 중요함이요 소중함이다.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에 보면, 만년필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가 필요해서 산 만년필로 집필 활동을 할 땐, 그렇게 산뜻하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소중한 한 획 한 획에 다 실을 수 있었단다. 그렇게 만연필을 좋아하시는 스님을 잘 아는 사람이 여행 중 만년필을 보고서 스님이 생각난 나머지 그 만년필을 사서 스님한테 보내드렸단다. 그 만년필을 받은 스님은 처음에 무지 기뻤단다. 아무리 수도에 정진하는 도량자일지라도 인간의 소유 욕망에는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게 두 가지 만년필로 집필 활동을 하다 보니,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의 그 귀중함(애지중지함)이랄지, 산뜻함은 온데 간데 없고 두 개 다 소홀히 하게 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단다. 그제야 그 소홀함을 벗어나고자 앗싸리 그 만년필 하나를 친한 다른 이한테 줘버렸단다(이런 깨달음과 결단의 과정 속에 그가 진정 도량자임이 담겨 있다) 그렇다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대표되는 무한한 소유욕은 결코 좋은 것 만은 아니다.
위에서 얘기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후임에게 지적해줄 때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한두 번일 땐 내가 진정 잘못했기에 ‘이런 지적을 받는 건 당연하구나’하고 맘 속 깊이 되새기며 고치려 할 테지만 그게 수도 없이(볼 때마다) 계속 된다면, 그 한두 번일 때의 애틋함은 사라지게 되고 그 고참이 원래 그런 고참이려니 생각하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고참들이 바라는 많은 양을 강조하는 가르침엔 따르고 싶지 않다. 난 여전히 내 식으로 진정 잘못된 것들에 대해 짚고 넘어갈 것이며 조금이라도 내가 솔선을 보이는 수준에서 후임들을 통제할 것이다. 어떤 중간이 될 수 있을지 이제부턴 실전이다.
건강에 대해
02년 2월 16일(토) 조금 눈 옴
요새 우리 소대에는 병이라도 번진 듯, 다들 이래저래 아프고 픽픽 쓰러져 외진을 가거나 앓고 있다. 아무래도 장시간 춥디 추운 날씨 속에 있다 보니깐 몸이 못 견디질 못하는 것일 테다. 요즘 내 동기인 상남이 특히 매우 안 좋아 보인다. 천식기가 있었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며칠 전 결산 때 드디어 그 필사의 몸부림이 시작된 것이다. 몸이 꽉 막혀 죽을 듯했던 상남이를 보면서 ‘사람의 생이라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찌 보면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으며 늘 붙어 있기 때문에 먼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실상은 너무나도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생사 길은 이에 있으매 머뭇거리고’라는 구절은 결코 문학적 표현이 아니었던 거다. 사는 것은 육체적인 삶이고 죽는다는 건 영혼적인 삶이기에 다만 표현된 현실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 삶의 방식은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생과 사가 결국 같은 것이건 다른 무엇이건 간에 우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고 그 죽음에 짓눌려 살고 있다.
그건 그렇고 상남이는 천식을 앓고 있었으나, 그게 발작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긴가민가하던 찰나에 그렇게 발작이 나서 며칠씩이나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뭐니 뭐니해도 건강만한 것이 없음을 새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인간이 건강할 때, 그 진정을 소중히 여기고 당연히 그러한 건강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면서 그 건강을 지키기 위해 조심스레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인지 능력이 뛰어나다면 어느 인간에게 불만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에 따라 늘 감사의 삶이 이어졌겠지. 그건 또 바꿔 말하면, 그저 획일화된 로봇 같은 인간이기에 어쩜 하나님께서 그런 잊어버림, 있는 것에 대한 무감각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필수불가결하게 있는 것이며 그런 자유 의지를 통해 사는 갖가지 재미를 느끼게 해주시는 거겠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우리 소대에는 병자가 유난히 많다. 과연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보고 있는 입장으로서는 안타깝기만 하다. 그와 같이 내가 좋아하는 은화도 요새 심하게 감기에 걸려서 전화 목소리도 한결 깔아 앉아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러지 못해 걸렸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건강에 대한 열정이 꼭 있어야 할 것이며 관심과 낫고자 하는 방법들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자연히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러시안룰렛 같은 허무맹랑한 사행심 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덧붙여 난 지금 건강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행복보다도 더 큰 행복을 가지고 있다. 이 행복의 요소를 잊지 말고 살아가자.
계급과 성장시기
02년 2월 25일(월) 맑음
입대하고 나서 자대에서 한 좌담회에서 ‘이래도 저래도 2년 2개월이니 잘 지내보자’란 얘기를 나누면서 안 가는 시간에 불만을 토로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과연 일 년이란 시간이 순간순간마다 빠르게 흘러갔냐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 생활이 그렇게까지 즐겁다거나 슬프지 않다는 얘기이며 생각 이상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닐까?
상병을 달았다. 군 생활한 지 일 년이면 누구나 달게 되는 계급이기에 별 감흥은 없다. 단지 일 년이란 시간이 더디게라도 이렇게 지나갔다는 것이 기쁠 뿐이요, 계급장의 크기가 더욱 커졌기에 시각적인 만족감이 있다는 것이요, 작년으로서의 오늘과 올해로서의 오늘을 즐거운 맘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다. 군에 오기 전에 성민이 형이 휴가 나온 것을 보고서, “형! 다음달이면, 상병이니까 이제 군 생활 폈구나”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때도, 그리고 군에 입대하고 나서도 훈련병 시기에 상병만 달면 군 생활도 편해지고 그에 따라 할 만해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을 보고서 전체를 망각한 우(愚)일 뿐이라는 걸 생활을 해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등병 초 시절 때 난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치 대단한 생각을 했다. 바로 군의 계급을 사회의 시기(유아기, 청소년기, 성년기, 노년기란 분류)에 적절히 대응시킨 것이다.
이등병 시긴 혼자서 아무 것도 못하고 누군가가 뒷치닥꺼리를 해줘야 하는 유아기와 같고
일병 시긴 무엇이 무언지를 대충 알기에 혼자서 할 수 있긴 하지만 역시 잘못 행동할 가능성이 많은 질풍노도의 시기이기이며 위에 치이고 아래에 치이는 어중간한 입장의 청소년기와 같으며
상병 시긴 이제 거의 모든 것을 알기에 그만큼 예우를 받아 웬만한 것들에도 터치 당하지 않는 성년기와 같으며
병장 시긴 이제 모든 걸 체득한 절대의 경지이며 윗선들이 거의 없기에 아주 편히 지낼 수 있는 노년기와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활을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대충 매칭시켜본 것인데, 막상 생활을 해보고 상병까지 달고 보니 그런 매칭이 제대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어서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매칭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것을 빼먹었다. 바로 사회에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누구도 제재를 하지 않기에 편해진다 할지라도, 그런 편함엔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 곧 상병이 되어 그냥 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 또한 책임지는 상황에서의 편함이란 얘기이다. 어쩌면 계급이 올라간다는 건 그런 책임이 커져 가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이병 시기엔 자기 한 몸만 잘 돌보면 그걸로 오케이지만, 일병 시기엔 조금씩 늘어나는 후임들을 잘 이끌어줘야 하며 군 생활에 적응도 충실히 해야 하며, 상병 시기엔 큰소리까지 쳐가며 후임들과 좋은 소대 만들기에 동참해야 하고 당연히 선임들을 대우해줘서 같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병장 시기엔 특히 분대장이 되어서 한 분대를 이끌어야 하기에 더욱 책임감이 무거워진다.
요즘 들어서 난 이런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계급이 올라간 만큼 내 생활도 편해지고 더욱 풀어준 게 많지만 그에 따라 신경 써야 할 게 많이 있다. 이래저래 군 생활 일 년만에 사회에서 미쳐 제대로 경험해보지 않은 성년기 시기를 간접 체험해볼 수 있게 되었기에 좋은 기억이자 체험이라 생각한다. 그런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당연히 필요한 게 능력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에겐 어떤 능력이 있는지 14개월 간 생활해보며 경험해보며 찾아갈 테다.
GOP 생활 정리기
02년 2월 25일(월) 맑음
이제 다음주면 GOP 철수다. 과연 내 자대 생활 내내 있었던 GOP를 다음 주면 정말 떠나게 될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역시 이래서 ‘백문불여일견 백견불여일행(百聞不如一見 百見不如一行)’이라 하는가 보다.
이쯤에 이르러서 사람들 반응이 참 이채롭다. 몇 달 전만해도 ‘빨리 나가고 싶다’를 연발하던 사람들 입에서 이상하게도 ‘잔류’라는 말이 드문드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FEBA가 더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기대와 함께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정말로 너무나 익숙해져서 뭘 해도 편해져 버린 이곳에 남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든다. ‘도전의식’과 ‘현실 안주의식’ 사이의 충돌, 도전은 전혀 생소한 것이기에 많은 위험 요소가 따르는 게 사실이고, 현실 안주는 늘 그랬던 것이기에 아무런 위험 부담도 없이 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전 후의 현실이 더욱 가치 있고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뜻 그렇게 맘먹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한비야씨의 『중국견문록』이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를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모두 다 불가능이라 여겼던 일을 아무 스스럼 없이 해내며 결국 ‘해보지 않고 포기하지 말자’ ‘한 걸음의 철학’이란 말로 도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절대 불가능한 것도, 절대 어려운 것도 없다. 당시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며 정신적인 속박 때문에 지레 생각지 않는 것이다. 난 FEBA로 나갈 것이다(물론 선택불가능한 것이기에 마음을 다잡는 거다). 나의 현실이기에 회피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 말대로 ‘GOP보다 FEBA’가 더 좋기 때문에 난 좋음을 직접 내 몸으로 느껴볼 것이다. 올 테면 와라 내가 그까짓 것들에 쓰러질쏘나!
GOP에서 1년을 보냈다. 자대 생활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돌아보지 않으려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 신교대에서 이곳으로 배치 받았을 때 어디로 팔려 가는지 모르게 막막했던 순간, 부소대장님을 따라 남이와 나는 전망대에 올라가 ‘떡볶이와 카스타드’를 원없이 먹으며 좀 자유로운 자대 생활에 기대를 품었던 순간, 그때 오전 취침을 하러 누웠을 때 침낭을 머리까지 덮었는데 그제야 집이 너무나 그리워 눈망울이 붉게 물들어졌던 그리움의 순간, 선임들에게 이도저도 아닌 일들로 충고를 들으면서 더럽고 야비한 군현실이라고 느꼈던 참혹했던 순간, 그 한 여름에 연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이 빗줄기를 뚫고 투입해야 하는 구나’하는 짜증 섞인 기분을 느끼던 순간, 9월 연대종합전술훈련평가(RCT)로 인해 준비태세를 계속하다 보니 거기서 느껴지는 짜증과 9월 23일에 비박임에도 불구하고 11시 30분에 기상해서 2시 30분까지 완전 군장을 하고서 강점 진지에 투입한 후 방벽까지 들고서 투입해 근무를 서야 했던 힘겨움의 순간, 10월 10일에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쉴 거라 기대했던 그 기대감을 와장창 깨고서 그 굵은 빗방울을 다 맞아가면서 작업을 했기에 내복이 다 젖어 몸에 들러붙는 바람에 그 시리디 시린 추위에 몸서리치던 순간, 새해 1월 1일에 12월 31일에 내린 폭설을 재설작업하느라 철수도 하지 못하다가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철수를 해선 겨우 2시간 정도 자고 다시 일어나 다시 제설작업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의 참기 힘든 화남의 순간.
이런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과 함께 나를 버티게 만든 좋은 기억들도 있다. 처음 자대에 왔을 때 고참들의 참다운 관심들을 느껴져 인간미가 한가득 느껴졌던 순간, 중대 그림 작업을 투입되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데서 나오는 뿌듯함을 느끼던 순간, 그 일로 인하여 너무나 이른 시기에 포상 휴가를 받았을 때의 날아갈 것만 같았던 기쁨의 순간, 흐를 것 같지 않던 시간이 흘러 한 계급씩 진급할 때의 은근한 행복이 있던 순간.
이런 상반의 기분을 느끼면서 군 생활, 그것도 GOP에서의 1년을 마쳤다. 다음 주면 철수해야 할 이 시점에 이르러서 길고도 길었던 시간이 정말 꿈인 양 느껴지며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덩달아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도 든다. 이렇게 뭔가를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전혀 새로운 곳에서도 생활한다면 지옥보다 더한 곳이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고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추위를 몸소 겪어냈으며,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서 근무를 섰던 그 패기만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더디고 더디지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일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한 걸음의 철학’을 몸소 느꼈다. 언제나 이 모든 게 추억이자 아련한 기억, 그리움이 될 날을 상기하며 마지막 1년 2개월, FEBA를 향해 끊이지 않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을 이어나가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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