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갈이
01년 11월 5일(월) 어둡고 비내림
11월 1일(목)엔 비가 부슬부슬 온 터라 춥지도 않아서 근무를 서기에 정말 좋았다. 영상 8℃에서 그날의 근무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11월 2일의 근무는 무엇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11월 2일(금)은 후반야 근무였다. 전원투입 때도 왠지 어제완 다른 차디찬, 아니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지만 말이다. 전반야 말대기였던 민호가 “영하입니다.”라는 말을 되뇌이며 있었던 건 암담한 현실을 직시해줬던 것이리라. 그 말에 이어 부소대장님은 모든 동계용품을 다 갖춰입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로 춥단 말이던가!’라는 생각을 하며 처음 입어보는 방상내피(깔깔이와 조끼), 방상외피(스컷파카)와 방하내피(깔깔이 바지), 방하외피(건빵바지)를 어떻게 입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주섬주섬 입었다. 역시 처음 입는 것이니 빨리 입을 순 없었고 치수 같은 것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고른 터라 제대로 입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10분 가량을 동계피복과 씨름하다가 합동근무에 투입하게 되었다. 많이 껴입어선지 경황이 없어선지 처음엔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매섭도록 차가운 바람이 암울하게 참담한 현실을 상기시키며 그렇게 무장한 우리들의 뼈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처음 군에 입대해서 306에 있을 때의 그 답답함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그렇게 벌벌 떨면서 근무를 서다 보니 어느덧 철수 시간이 다가왔다. 죽으려다 살아난 마냥 행복했고 이제 1시 30분까지 잘 수 있다는 현실이 크나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땐 영하 5℃였고 온 천지는 서리로 인해 새하얀 상태였다.
11월 3일(토)부턴 난로를 피우기 시작했다. 영하의 온도에 따라 대기막사와 세면장 두 곳에 말이다. 혹시 당신은 난로란 말에 기름 난로를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기름 난로였다면 오죽 좋겠냐만은 그건 군의 현실을 무시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일 뿐이다. 연탄 난로, 바로 안도현씨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로 일갈했던 그 연탄으로 우린 32공탄을 피우고 그걸 땐다. 연탄이라 하면 밤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셔서 가시던 아련한 기억이 있고 그 연탄재를 뿌려서 미끄러짐을 방지하던 어렴풋한 기억만이 있다. 그런데 그 연탄을 떠나 생활해본 지 어언 십년 아니던가. 여기서 더 이상 그걸 기억 내지는 추억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냉혹한 현실이며 진짜인 것이다. 연탄을 며칠 전에 수백장 날라 수공구 창고에 쌓는 걸 보았을 땐, 그저 별 느낌이 없었다. 그게 내 현실이 아닐 것만 같았으니깐. 하지만 그건 언젠가 아련히 나에게 다가올 현실이었다.
저녁 투입 후 대기를 먹을 때, 상황실 양경석 상병님은 연탄불 볼 줄 아느냐며 물어보셨다. 하지만 난 본 적만 있지 해본 적이 없기에 당연히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연탄불을 언제 가는 지에 대해 장황히 설명해주셨고 난 대충 알고 있었던 거에 덧붙여 양호입감했다. 그래서 바로 실전 투입을 했고 갈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지식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낀 채 갈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구세주 같은 분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분대장님이었다. 분대장님은 예전 그 체험들을 살려 능숙하게 구멍을 맞춰가며 갈기 시작했고 나도 그걸 보면서 많이 배웠던 터였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인지라, 백번 세세히 듣는 게 한 번 틱 보는 것보다 못하다니깐. 그렇게 우린 겨울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며 우린 겨울나기에 들어선 것이다. 그대여 추위에 지친다 생각되면, 그 추위를 즐겨보라 그리하면 그 지침은 즐거움 될 것이다. 연탄을 갈면서 우린 대기, 그 짧던 대기의 버거움을 느끼며 나날이 추워질 날씨 속에 움츠려 갈 것이다. 나의 군대에서의 첫 겨울을 이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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