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폭설에 바뀐 감정
01년 12월 1일(토) 폭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린다던 철원에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작년엔 11월 초순에 첫 눈이 왔다던데 여긴, 아니 올해는 이상하게도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작업이란 의미 밖에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은근히 군에서 맞이하는 첫눈이니만치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사실 신교대에 도착하던 날에 눈이 엄청 내리긴 했다).
그렇게 나름의 조바심을 느끼게 하던 눈이 지금 밖에 엄청 내리고 있다. 그것도 화려한 신고식이라도 하려는 듯 진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리고 있다. 싸리눈이었기에 쌓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작은 눈들도 계속적으로 많이 내리다 보니 어느덧 보지 못하던 사이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곳이 남한 최북단 철원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간혹 이곳이 정령 철원이란 곳임을 잊고 살 때가 있다. 많이 익숙해졌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그만큼 정신없이 산다는 얘기도 되리라. 우린 쏟아지는 눈살을 뚫고 탄박스를 가지러 갔고, 그렇게 싸리비를 가지고 돌아왔다. 투입로부터 교통호 구석구석을 후반야 및 비번자들이 다 쓸어야 한단다. 앞으론 그게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이다. 사회에선 인공눈까지 만들며 눈이 가지고 있는 속성(차가우면서도 미끄러우며 뭉쳐지려는 본질)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고, 관계와 관계를 더욱 돈독히 유지케 해주는 하나의 관계물로 여길 것이며 하얗게 덮힌 세상을 하나의 관조물처럼 보듯이 관망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사회에 있어서의 눈이 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눈을 보고 있노라면(눈을 억지로 채우지 않는 곳이기에 관망할 때가 좀 많다). 예전에 나의 일기에 쓴 것처럼(눈으로 덮힌 세상을 평등한 예스런 세상이라 했다) 순수방울, 나의 옆구리 허전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에 대한 사치스러울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내가 너무도 부럽다. 역시 모든 행복은 내 곁에 있을 때, 느낄 수 없나 보다. 뭐든 그것이 우리 곁을 떠났을 때, 그것이 얼마나 좋았던 것이었고 우리에게 거대한 의미였는지를 느끼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어제 전원투입 간에 후반야들이 제설작업을 했고 오늘 전원 투입 때부터 10시까지 거의 4시간 정도를 제설작업했다. B블로 전술도로 상에 쌓인 눈을 정신없이 다 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길목이었지만 오늘은 주말이었기에 이제 쉴 수 있다는 기쁨에 그 힘듦을 다 마다한 것이다. 하지만 그 힘듦을 감안하지 않고 회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깐. 정말 쉬엄쉬엄 작업을 했음에도 버거움이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다. 하긴 요즘 들어 빡세디 빡센 작업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열심히 싸리비로 쓸다 보니 거의 끝이 보였다. 끝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쓸었다. 그땐 눈이 별로 안 쌓였다는 현실에 그나마 감사를 했다. 쓸고 마무리를 짓고 정렬한 후 복귀를 했다.
그때까지 만해도 그게 끝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제 쉴 수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 중 오산이었다. 중대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병장 전체 제설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넓디 넓은 연병장 눈을 어떻게 다 치우란 말인가! 정말 너무 헛짓 잘 시키는 군대임을 알지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작업을 하라는 데에 이르러선 혀를 내둘렀다. 처음으로 넉가래질을 해봤다. 처음엔 좀 폐급을 잡아서 힘들었는데 결국 좋은 걸로 바뀌어서 수월히 할 수 있었다. 진짜 너무 넓은 면적을 치워야 했기에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그 작업으로 인해 눈이 우리에게 끼칠 엄청난 비감을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이번 한 번의 경험으로 인해 처음엔 반가운 감정이 들었던 눈이 지겹다 못해 저주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게 바로 삶이다.
1년 뒤인 02년 12월 2일에 페바에서 병장이 되어 동기들과 찍은 사진. 철원은 눈이 정말 많이 내린다. 짬이 안 되던 GOP시절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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