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대기조
02년 3월 24일(일) 맑고도 바람 붐
3월도 이제 끝을 항해 치닫고 있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4월이라는 전혀 다른 시간으로 접어든다. 분명 그다지 시기 상으로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 좀 다른 시간에 치닫게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고 내 꿈을 새롭게 모으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언제나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어지는데, 그렇게 시간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 시간에 나의 희망과 꿈을 투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가울 뿐이다. 시간이란 걸 만들어 놓고 그 절기 절기로 나누어 놓은 최초의 아무개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다.
지금은 5대기(5분대기조) 기간이다. 그래서 오늘은 주일인데도 교회에 가지도 못하고 계속 내무실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처음하는 오대기는 GOP에 있을 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저번 일병휴가 때 국민이가 “요즘엔 중대장이 하루에 한 번씩 오대기를 걸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이번에 휴가 나가서 씻은 게 며칠만의 일인지도 모르겠어”하고 말할 정도로 힘든 것이었다. 사실 그 당시엔 오대기라는 게 뭔지를 몰랐기에 나에게 심각한 말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데 이렇게 내 상황이 되어서 늘 대기 중인 상태에 있다 보니 뭘 하더라도 긴장이 되긴 하더라. 오대기란 늘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지역 내에 침입한 적을 완전 제압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도망갈 시간적 여유를 없애려 5분이란 시간 내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60트럭에 몸을 싣는 걸 말한다.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그 단계 단계가 아주 체계적이어야 하기에 아주 잘 숙지해야만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화장실에서 편하게 볼 일을 볼 수도, 샤워를 맘 놓고 할 수도 없이 전투복을 입은 채 생활해야 하는 거다. 어제는 최초로 입영소 총기 탈취에 관한 오대기가 걸렸었는데, 사실 그 짧은 순간에 그 전투태새를 완전히 갖춘 것이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런 정신 없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 오대기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까 그냥 생각해 봤다. 하다 보니 오대기가 생각보다 재밌고 또 오대기원들에겐 작업을 시키는 경우도 비교적 적기에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헐었던 잇몸이 나으며 깨달은 것
02년 3월 24일(일) 맑고도 바람 붐
며칠 전만 해도 입속의 잇몸이 헐었기에 좀 자극적인 음식을 먹게 되면 쓰리고 예리고 아팠다. 그땐 그게 영겁의 짐을 계속하여 짊어지고 있었던 것마냥 힘들고 빨리 낫기만 바랐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낫기를 바라다가 낫게 되었을 땐 전혀 아무런 감흥이 없게 되었을까? 이런 게 바로 인간의 ‘똥 싸러 들어갈 때 맘 다르고, 나올 때 맘 다르다’와 비슷한 심리인가?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었다. 왜 그렇게 달라지는지 새삼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런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이기에 어쩜 인간은 영원히 죄악성을 지녀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고 이 세계는 영원히 이기와 자만이 넘치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단지 이 일을 통해 느끼는 것은 나 혼자의 가치로 이루어진 것은 절대 아무 것도 없기에 늘 감사하는 삶쯤은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한 가지 더 느끼는 것을, 내 몸에 일어나는 무통증적인 요소들은 미처 느끼지 못하고 한참 후에, 심해진 다음에야 겨우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러한 증후군이 좋은 요소에 있다면 해될 건 없다. 예컨대 나의 잇몸이 나은 것과 같은 일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반대의 요소일 경우다. 내 몸의 파고드는 악의 손길을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난 어느 순간 악한 놈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일이 그렇다. 그런 건 전혀 무감각적인 일일 테니깐 몸이나 생각이 그걸 느낄 리는 만무하잖아. 그러는 사이에 우리 점점 악해져가는 거겠지. 그렇기에 순간순간 자기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며 순간순간 자기를 남이 전해주는 얘기를 통해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걸 거다. 그리고 덧붙여 왜 몸에 일어나는 그런 외적인 변화 하나하나에 좀 더 신경 쓸 필요도 있는 거겠지.
아쉽고 섭섭해하던 전역자
02년 3월 24일(일) 맑고도 바람 붐
오늘 아침에 FEBA 첫 전역자 이강석씨와 박진수씨가 집으로 떠났다. 사실 지금껏 여러 전역자들을 보아온 가운데 뭐 그냥 나도 덩달아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 본 적은 1월 29일에 전역한 임종훈, 강현근씨 때의 일이기 때문에 새삼 오늘 그러한 생각을 또 한번 해보려니 아쉬울 뿐이다.
그동안 말로 규정된 한정된 공간에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온 스무살 남짓의 남자들이 들어온 순서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고 그런 계급을 받아들이며 생활해야 한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해나가다가 전역할 때(하긴 처음부터 정해진 시간이긴 하지만 그 끝이 절대 보이진 않는다)가 되어 정들었던(?) 이곳을 나가라는 거다.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재밌게도 이곳에서의 생활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되며 그토록 싫었던 계급에 따른 인간관계가 나름의 합리적인 구조로 보인다. 그러니 그 순간만은 눈물이 날 것 같고 섭섭한 마음도 어리는 것이다.
분명 주제 넘는 말이고 내 계급을 넘는 말임을 너무 잘 알지만 난 벌써부터 전역할 선임병들을 보고 있으면, ‘자기들은 지금까지 늘상 꿈꿔왔던 전역의 꿈을 이뤄서 미처 생각지 못할 정도로 행복할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 갑자기 여길 떠나려고 하니깐 얼마나 아쉽고도 섭섭할까?’라는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지. 비록 이러한 생각이 빠른 것이든, 아니면 지금부터 생각할 수 있는 것이든, 상관 없이 난 그들을 보면서 그런 게 느껴질 뿐이니까.
이강석씨는 “과분하다고 생각할진 모르지만, 사실 난 지금 기분이 아주 이상해. 기쁘다는 게 아니고…… 사실 기쁠지만 알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거든. 내일이면 이곳도 떠나고 너희들도 떠나게 된다는 게 믿기진 않지만 너무나 아쉽고 섭섭해 죽겠어.”라고 말하면서 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 존재겠지. 오래 염원과 꿈이 이루어졌을 때,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 말이다. 아무래도 인간이란 존재의 그 감정을 누가 알랴? 미묘하다 못해 복잡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사실 나도 지금은 전역만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면 그땐 나도 꽤나 아쉬워라 하며 울적해 하려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현실이 됐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일지 기대되기만 한다.
우여곡절 끝에 군종이 되다
02년 3월 24일(일) 맑고도 바람 붐
소대의 군종이 되던 때가 생각난다. 작년 8월 9일에 소대의 군종이었던 한솔씨가 나가면서 “네가 이제부터 소대 군종이다”라고 했기에 그게 진실인 걸 알면서도 내심 믿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의사를 묻는다거나 투표를 했다거나 하는 게 없었기에 믿을 수 없었던 거다. 몇 주간 소대 군종 현황을 보니 빈칸으로 계속 비어 있을 뿐, 내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몇 주 더 지나니 기어코 내 이름이 소대 군종란에 당당히 올라가 기입되어 있더라. 그걸 보고 있으니 되게 흡족하기까지 하더라.
단순히 생각해보면 쉽게 군종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생각 이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 몇 주의 시간이 긴가민가하는 얼렁뚱땅함을 안겨 주었기에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게 꽤나 지리하면서도 길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리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소대 군종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중대 군종이 되는 일도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갑작스런 선출 과정에선 어떻게든 너무 쉽게 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분대장님에게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니 “왜 중간 과정은 없이 니 맘대로 생각하고, 되었다는 얘기만을 하냐?”라고 말하더라. 사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물론 곧장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예상은 됐다. 나야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거 같아 손을 들어 자천했고 투표 결과로 뽑혔을 뿐이다. 그리고 그 투표 전날엔 중대 군종인 박영헌 병장이 직접 찾아와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는데, 그런 일련의 과정은 무시한 채 그런 식으로 얘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껏 몰아붙이고 혹 중대 군종이 되는 걸 나쁜 것으로 보고 있으니 그게 너무나 기분이 나빴다. 암튼 그런 후일담 때문에 막상 투표로는 중대 군종이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진짜 군종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애매한 상황이다.
며칠 전만 해도 군종이 되던, 되지 않던 주님의 뜻이니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나, 이젠 ‘꼭 되었으면 좋겠다’하고 비라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이제 주님께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려고 작정 중이다. 만약 된다면 이 결단과 회유의 시간을 통해 좀 더 깊은 신앙심을 갖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며 이렇게 어렵게 군종이 되었으니 열심히 하라는 뜻일 거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아직은 너의 때가 아닐 뿐더러 너의 기도에 대한 열정마저 부족했으니까 섭섭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중을 기약하며 너 자신을 더 잘 갈고 다듬으라는 걸 거다. 과연, 앞으로의 추이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아무도 알지 못할 거다. 된다면 원래 결론은 이럴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겠지만 그 반대라면 비통해하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할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인간이니까 인간적인 감정으로 생각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든 결말이 나올 것이고, 나온 결과가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한다. 나한테 간절한 마음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말이다. 이런 여러 생각들을 두서없이 하며 3월을 보내고 4월을 맞이하고 있다.
후일담
30(토)에 드디어 중대 군종이 되었다고 발표가 났고 내일은 부활절이기에 중대 작업까지 빠져 가면서 계란에 색지 붙이는 작업을 했다. 부대에서 상병으로 활동을 하면서 주일마다 군종의 활동을 해야 하니 더 바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이 걱정되기보단 기대만이 된다. 13개월 남은 군 생활에 이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군 생활이 기대되긴 처음이다.
화생방 전사상자 처리 훈련 중 K-3로 인한 고초
02년 3월 28일(목) 맑음
이번 일주일 내내 M.O.P.P 4단계를 다 적용한 상태로 하루하루의 나날을 보냈다. 무슨 말이냐면, 금요일에 사단장님 앞에서 화생방 전사상자 처리 훈련이 아니라 시범식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보호의ㆍ전투화 덮개ㆍ방독면ㆍ보호수갑을 하고서 짜여져 있는 각본대로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야. 말이 쉽지 방독면을 쓰고서 움직여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대는 감히 알라나?
상황이라면 화생방 탄이 떨어져 진지에 투입되어 있던 대다수 병력들이 부상 당했고 그로 인해 그 인원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어쩐지 갑자기 주일에 방독면 쓰는 연습을 시키고 월요일엔 하루종일 화생방 물자를 착용하는 연습을 시키더니, 화요일부턴 실전 연습을 하기 위해 시범식 교육 장소인 77포대로 이동하더라니. 다른 소대는 모두 걸어가야 했지만 우리 소대만은 오분대기조였기에 60을 타고서 아주 편안하게 77포대로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린 더위와 짜증에 맞서가며 모든 피복을 다 착용한 채 교육 수련을 해야 했다. 특히 방독면을 10분 이상 쓰고 있어 머리가 지끈지끈해지고 정신이 혼몽해질 때면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지?’라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런 역경과 시련을 잘 이겨나가는 주위 선후임들을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이번 교육 수련 땐 내가 K-3 사수라는 게 무척이나 서럽게 느껴졌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우리 소대원들은 인체제독소(人體除毒所)에 있었기에 나 또한 거기로 뽑혔었는데 K-3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곳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 상황이 발생하는 탄약고 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곳은 3소대 전담이었는데 거기에서 최초의 상황인, 화생방탄이 떨어지면 그 탄에 맞은 사람들이나, 질식된 사람들이 쓰러지는 데, 그때 조금 다친 사람들이 나와서 방독면을 씌워주고 그들을 부축하여 의무대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조금 연습하다가 K-3란 이유만으로 또 다른 데로 옮겨가야 했다. 이번에 옮겨 온 곳은 환자들이 있는 곳이다. 나는 경상자(輕傷者) 역할이었기에 발목에 압박붕대를 조금만 매고서 차량 쪽으로 이동하면 되는 거였지만 방독면을 오래 쓰고 있어야 했기에 그게 힘들 뿐이었다. 이쯤만 해도 세 번을 K-3라는 이유만으로 옮겼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불운은 거기에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K-3란 이유만으로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으니 말이다. 바로 포진 뒤에서 나오는 환자 역할을 맡게 됐다. 사실 제일 월 때리는 역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역할이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인체 샤워까지 가서 옷을 다 벗고 샤워를 해야만 했기에 누구든 피하고픈 역할에 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덕에 두 번째로 60을 타게 되었고 인체 샤워팀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은 돌고 돌아 좋은 역할로 귀결된 채 당당한 K-3를 들고서 화요일에 소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만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겠냐 만은, 이런 해피엔딩이라면 초반에 조금 짜증났다 할지라도 얼마나 행복했겠냐 만은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K-3의 태클은 또 다시 이어졌으니 말이다. 저녁에 부소대장님이 부르더니, 그 자리에 K-3가 있어서 안 된다며 다시 최초 환자 쪽으로 옮겨 가라는 것이다. 그 역할이 바로 인체 샤워를 해야 하는 역할임을 알기에 K-3를 원망하며 잠에 들었다.
군에서 배운 한 가지, 뻗대기
02년 3월 28일(목) 맑음
수요일엔 역시 환자역을 했는데 최대한 첫 60에 안 타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타서 인체제독소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군수 장교님이 어제 연습 안 한 놈이 누구냐며 그 인원들은 빠지랬다. 그런데 최초 환자들은 인체 샤워를 다 하는 쪽으로 몰아가더라. 그래서 최대한 버티며 아닌 척을 했다.
군에서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어떤 일도 그런 척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무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정의만이 옳은 것인 양 취급되어지고 그것만이 떳떳한 일인 양 취급되어져야 한다고 말해지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최대의 선(善)이며 최대의 의(義)라고 생각되어지는 법률이 정말로 제대로 작동하는가? 떳떳함 위에 서서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며, 옳은 이에게 상을 주고 그런 이에겐 벌을 줄을 아는가? 이 세상은 요즘 선악(善惡) 혼돈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무엇이 얼마나 선한 것이지, 무엇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헛갈리기 때문에 무엇에 떳떳해야 하고 무엇에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기에 잘못을 하고도 떳떳한 척 소리를 지르면 모든 게 선인 양 귀결되어지는 현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노래 말마따나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건 군이란 특이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년이란 군 생활 끝에 난 그걸 터득했고 이번 기회를 통해 그걸 몸소 실천해보려는 것이었다.
환자인 척(포진에서 나온) 가만히 앉아 있었다. 중대장님이 와서 최초 환자들을 찾을 때에도 난 가만히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대단할 정도의 떳떳함이었지만,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티다가 동주가 최초 환자들을 부를 때 거기에 갔었는데, 이미 인체 샤워 인원 12명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인체샤워를 하지 않는 일반 환자역할만 하면 됐다. 무심한 떳떳함이 나름 좋은 결과로 귀결된 예다. 하지만 이걸 끝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아니 될 생각이다.
등산과 군 생활의 공통점
02년 3월 28일(목) 맑음
뻗대기를 통해 인체샤워를 하지 않는 경상자 역할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잘 마무리 되어지는 듯했는데, 이번엔 ‘아무 것도 아닌 환자’가 문제였다. ‘아무 것도 아닌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거기서도 쫓겨나 최초의 상황을 하는 데로 가야 했던 것이다. 도대체 몇 번을 옮겨다녀야 하는 거야? 아무리 군대라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내 성격도 참 많이 좋아졌다.
역시 환자역을 하면서 그곳이 제일 월 때리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해보니 정말 월중의 월인 곳이었다. 나는 하헌태 상병을 업고서 내려와 배수구로 짱박히면 되는 일이었기에 처음만 빡시게 하면 그 다음부터 쭉 쉬어도 되는 그런 역할이었다. 이쯤 되니 돌고 돌아 이 역할을 맡게 됐지만 참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까지 들더라. 그에 반해 동주와 지용이와 희규는 딱 인체제독 인원으로 뽑혔다. 이럴 땐 내가 서 있던 줄이 꽤 괜찮기도 하다. 좀 짜증 나는 점이라면 갑자기 현실성을 고려해서 산을 타고 내려오라고 하는 바람에 산의 비탈을 까야만 하는 어이없는 작업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작업이기에 짜증을 내며 작업을 해야 했다. 아무튼 그렇게 목요일까지 월 같지 않은 월을 때렸고 금요일에 사단 참모들 앞에서 시범식 교육을 몸소 해야 했다. 일주일 내내 진행됐던 시범식 훈련을 마치고 보호의와 전투화 덮개와 영원히 헤어지려니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더라. 정말 답답하고도 짜증 나는 일이었으니 다신 이런 훈련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더라.
그렇게 끝내고 부대로 복귀하면서 CⅢ를 보았는데 그 높게 뻗은 봉우리에 나무들과 절벽이 너무도 잘 조화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절로 감탄이 나오며 감상에 젖게 됐다. 산에 오르는 거, 정말 좋은 일이라 건 잘 안다. 하지만 거기에 오르기 위해선 순탄한 길만 있는 건 아니다. 오르다 보면 평지도, 경사가 심한 비탈길도 있고 험한 외다리도, 험준한 절벽을 지나야 할 때도 있다. 그건 그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한 길이며 그 길이 너무 힘들다고 해서 도중에 내려갔다가는 지금껏 오른 시간만 허비할 뿐아니라, 정상에 올랐을 때의 통쾌함은 포기해야 할 뿐이다. 당신도 그걸 알지 않던가?
그건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역이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훈련이란 힘듦, 갈굼이란 짜증, 휴가란 행복, 면회란 기쁨을 몸소 하나하나 거쳐 가야만 결국 전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을 한 걸음씩 밟아가며 산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지역을 내려다볼 때 비로소 뿌듯함과 산뜻함이 가슴 깊이 어리는 것처럼 그런 하나하나의 과정을 다 겪어내야지만 마침내 전역을 할 때의 해냈다는 성취감이 어리는 것이다. 그제야 지금까지의 그 수많은 역경들이 비로소 하나의 40여명의 공유된 추억으로 받아들여져 ‘찬란했던 젊은 시기의 잃지 못할 기억’으로 남는 거겠지. 산에 오르므로 나에게 어떠한 장애물도 나의 발치에 닿는 땅일 뿐이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처럼 군 생활도 전역하므로 세상에 어떠한 불의나 부당함에도 넘어지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등산하는 과정과 군 생활 과정의 공통점을 생각하며 부대에 복귀했다.
끝이란 시간은 어떤 일을 하든 늘 있다. 하지만 그 끝을 향한 발걸음들이 버겁고 더딜 뿐이다. 그 더딤을 받아들이고 참고 이겨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 따위는 없다. 끝이 눈앞에 당도했을 땐 좀 더 색다른 세상이 펼쳐질지 그 누가 아는가? 그러니 어떻게든 가봐야만 안다.
03년 1월 16일(목) 301고지의 1분대원들 오른 후에. 전역을 3개월 앞 둔 시점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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