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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 탐방 보고서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 탐방 보고서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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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고대문명 제2차 탐방 보고서

 

 

예수의 기적과 참혹한 현대사 공존하는 땅, 인류문명 새 패러다임은 어디쯤 있는 걸까?

 

 

나는 2008410, 인천공항을 떠나 28일 오후 다시 고국 땅을 밟을 때까지 근 스무 날동안 내 생애에서 두 번 다시 하기 어려운 버거운 여행을 했다. 무사히 귀국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너무도 짙은 감회에 사로잡혀 붓을 옮기기 어렵다. ‘영적 소요(a spiritual journey)’라 해야 할까, 일말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적진 속의 행군이었다고 할까, 사막의 모래바람 속의 신기루를 헤매는 인디아나 존스의 문명 탐험이었다고 해야 할까, 도무지 형언하기 어려운 인간 삶의 다양한 양태에 묻어나는 태고의 영상들이 일천 척 폭포수의 비단결처럼 눈앞을 가린다.

 

410일 두바이를 거쳐 나는 헤즈볼라(Hezbollah)가 장악하고 있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가서 아메리카대 박물관 큐레이터들의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예수의 활동지, 두로(Tyre)와 시돈(Sidon)을 갔다. 시돈에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기다렸다는 막두쉐 언덕을 가본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두로에서 나는 예수시대 문명의 현주소를 확인했다. 지구상에서 건설된 최대 규모의 대전차경기장(Roman Hippodrome, 5만 명 이상 수용),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이적을 행한 가나 혼인 잔치의 현장과, 그 옆에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한 가족 29명이 몰살당한 불행한 현대사의 잔상을 목격하고, 또 히람왕(Hiram, 두로의 왕, 다윗과 솔로몬과 동시대)의 무덤을 보았다.

 

그리고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 사이의 베카밸리(al-Bigāʿ Valley, or the Bekaa Valley),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설계한 헬리오폴리스 바알베크(Baalbek)의 웅장한 모습,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며 바이블이라는 명사의 어원이 된 비블로스(Byblos or Jbail, 그발), 그리고 1세기부터 초대교인들의 혈거(穴居)가 있는 카디샤계곡(the Qadisha Valley)의 영험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바로 이 카디샤계곡의 영성 속에서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레바논의 철학자, 시인, 화가)의 예언자 함성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트리폴리의 십자군 성채를 보고 시리아 국경을 넘어 쐐기문자의 대규모 도서관이 발견된 우가리트(Ugarit, Ras Shamra)지중해 연안의 최고 문명중의 하나. 가나안문명의 원조, BC 2000~1800년대부터 번성하기 시작하여 BC 1450~1200년에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BC 1200년경 황금기에 북방민족의 침입, 지진, 기근의 요소로 갑자기 소멸되었다의 폐허를 감명 깊게 바라보았다. 로마시대의 변형을 거치지 않은 가나안ㆍ페니키아 문명의 원래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있어서 나에게 주는 감동은 특별했다. 삼손이 무너뜨렸다는 다곤 신전의 원형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터키 국경을 넘었다.

 

 

  바울과 베드로의 포교 지역이었으며 초기기독교의 요람 중 하나인 카파도키아 남근석군(男根石群). 이런 바위 속을 파서 수백 개의 동굴교회를 만들었다. 2008 4 20일 터키 러브밸리에서.

 

 

문명의 여로는 오늘 우리 모습에 대한 끝없는 반문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바울의 선교활동의 중심지 안티옥(Antioch, Antakya, Hatay)의 다양한 모습, 헬레니즘 시대의 또 하나의 알렉산드리아인 이스켄데룬(Iskenderun)【『후한서를 쓴 반고(班固)의 동생 반초(班超)가 여기까지 왔다, 알렉산더대왕이 다리우스 3세를 굴복시킨 잇수스전투(the Battle of Issus, BC 333)의 현장, 길리기아의 중심지 아다나(Adana)를 탐색하고, 바울의 생가가 있는 다소(Tarsus)에서 사도 바울의 체취를 더듬었다. 그리고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가서 너무도 영적인 산하와 1세기부터 내려오는 동굴교회들의 지금도 생동하는 벽화를 보았다. 초대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판 데린쿠유의 거대한 지하도시는 베트콩이 판 구찌터널을 무색하게 했다. 카이세리를 거쳐 1000km에 달하는 고대 실크로드를 달려 도마기독교의 중추이며 에데사왕국의 수도이며, 아브라함의 생가로 추정되는 우르의 고장(이슬람 전승), 우르파(Urfa, Şanliurfa)로 갔다. 아브라함이 가족과 함께 유목 생활을 했던 하란 평야를 거쳐 알렙포(Aleppo)로 가서, 그 유명한 난공불락의 성채의 위용을 보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을 초라하게 만드는 거대한 바알신전의 웅혼한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팔미라의 고대도시를 샅샅이 훑고, 바울의 개종사건이 일어났던 다메섹(다마스쿠스)을 거쳐 요르단 국경을 넘었다.

 

데가볼리(Decapolis)시리아 남쪽,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 북쪽지역에 있었던 열개의 희랍 폴리스 지방의 펠라, 제라시, 느보산, 마다바, 그리고 세례요한의 목이 잘린 마캐루스 성채, 아라비아 사막, 에돔 광야, 나바태안(나밭) 왕국의 중심지 페트라(Petra)의 기암협곡과 거대석굴 무덤군을 충격 속에 바라보았다. 다윗왕에게 아내를 빼앗긴 충직한 장군 우리야의 원혼이 서린 암만의 암몬성(Amman)을 마지막 일정으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에 또 하나의 사막의 신기루, 두바이의 현주소를 점검했다.

 

나는 이 모든 일정에서 내가 본 광경들을 매일 일출에서 일몰까지 모조리 카메라에 담았다. 많은 충격적 영상들을 독자들은 지금부터 이 책에서 접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단순히 초기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르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역사적 예수의 탐색이 단순히 인간 예수의 삶의 현주소를 조명하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원시기독교의 정체성 탐구는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질문이다. 김우중회장은 언젠가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고 했다. 한 문명의 가능성은 참으로 많고, 그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 국민이 해야 할일은 너무도 많다. 우리 문명의 진로에 관하여 우리 국민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 책임도 결국 국민들 스스로에게 돌아간다. 찬란했던 문명의 무덤 속에 나뒹구는 뼈다귀를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 길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도마복음한글역주를 가능케한 이 여행에는 하기의 안내자들이 있었다. 이집트 지역은 아랍어와 고대상형문자에 능통한 이종희선생, 콥틱크리스챤으로서 콥트문화전통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가르켜준 현지가이드 알프레도, 이스라엘 지역은 히브리대학 구약학박사 정세호목사, 시리아ㆍ레바논·터키ㆍ요르단 지역은 이현주 실장, 터키의 현지가이드 오스만, 이 사람들은 안내자이자 나의 사상의 멘토(mentors)였다. 특히 광대한 지역을 위험을 무릎쓰고 헌신적으로 탐방하면서 나의 모든 어려운 요구들을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수용해준, 요르단 암만에서 씩씩하게 살고 있는 이현주 실장님의 노고가 독자들의 행운이 되었음을 밝힌다.

 

 

 

 

예수의 본거지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터키 하란평야에 우르파라는 매력적 도시가 있다. 예수시대에 이 도시는 오스로외네왕국의 수도였으며 에데사라고 불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활약한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최초의 기독교 교회사를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에데사의 왕이 당대의 살아있었던 예수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에데사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국가였다. 이 사실은 도마복음서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지도를 펼쳐놓고 메소포타미아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보자!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희랍어로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인데 그 두 강은 아시다시피 티그리스강(Tigris)과 유프라테스강(Euphrates)을 지칭한다. 바그다드는 이 두 강이 가장 가깝게 오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메포소타미아는 현재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 걸쳐 있다.

 

우리는 예수의 활동지인 갈릴리(Galilee)하면, 이상하게도 옛 강원도 감자바위 동네와 같은 인상을 지니기 쉽다. 왜냐하면 복음서(福音書)는 후대 초기기독교의 기술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중심의 가치관을 지닌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설화(Passion Narrative) 자체가 갈릴리 시골에서 놀던 촌사람 예수가 대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어떤 직선적 시간 라인을 그리고 있고, 예수복음의 핵심인 수난(Passion)이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요한복음은 이런 직선적 시간라인을 파괴한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보다 리얼하게 생각해보면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본거지는 갈릴리이지 결코 예루살렘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매우 마이너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해프닝의 배경일 뿐이다. 예루살렘성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면 갈릴리는 화려한 성전건물도 없는 초라한 시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지역 문명의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였다.

 

이스라엘 문명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도 최근 이라크전쟁의 집중 피폭지 중 하나였던 바스라 항구 근처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유프라테스 상류지역인 하란(Haran)평야에서 살다가 세겜, 벧엘을 거쳐 이집트로 갔다가 브엘세바(Beer-sheba)에 정착한 인물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태어났고, 갈릴리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장성하여 예수운동을 펼쳤다. 그 갈릴리는 남쪽의 유대와는 비교적 격절된 문명지였으며 그 아이덴티티는 역사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바빌론, 소아시아문명권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더구나 예수가 태어나기 3세기 전에는 알렉산더대제가 이 지역을 헬라화하면서 이 지역은 헬레니즘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갈릴리바다 주변에도 헬라식 폴리스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것은 페니키아, 남부 시리아, 데카폴리스(Decapolis)성서 이름은 데가볼리인데, 갈릴리바다 동남쪽으로 형성된 10개의 희랍식 폴리스도시를 말한다, 북부 팔레스타인 지중해 해안도시들과 연계를 이루고 있었다. 신전, 극장, 학교, 스타디움, 경기장, 목욕탕, 주랑 있는 아고라(시장) 등등의 헬라화된 도시 풍경은 갈릴리 지역의 다반사였다. 복음서(福音書)에는 예수가 극장을 가거나 목욕을 엔조이하거나 하는 장면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가 비교적 토착적 하층민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지만, 예수가 산 문명의 환경과 지적 풍토는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 있어서 최첨단의 개방적 분위기였다.

 

갈릴리는 우선 인종적으로 복잡했으며 언어도 유대지역과는 달랐다. 따라서 이방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북쪽의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트랜스요르단, 다마스쿠스 지역과 남쪽의 사마리아, 유대지역의 완충지대였기에 예루살렘에 대한 예속감이 없었다. 갈릴리에는 수도도 없었고, 왕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으며, 제사장들의 하이어라키(hierachy, 계층제)도 없었다. 어떤 초월신이나 왕에 대한 충성심이란 갈릴리사람들의 덕성이 아니었다. 갈릴리사람들은 로마에게도, 헤롯에게도, 예루살렘의 성전 이스태블리쉬먼트(establishment, 질서, 기득권세력)에게도 충성을 표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Burton L. Mack, The Lost Gospel 62). 이런 배경 속에서 소피스트들과 같은 헬라화된 지식인들이 대중운동을 리드하고, 많은 코이노니아이(koinoniai) 소규모 친목단체들이 활약하고, 다양한 희랍철학 유파사상과 지중해 문명권의 모든 신화적 사상의 홍류가 휩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라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사상운동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지에 있는 이 지중해 해변도시는 헤롯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에 의하여 유대왕으로 책봉되자, 이에 감읍하여 이 도시를 지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했기 때문에 카이사레아 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BC 22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찬란한 도시는 예수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가 예루살렘보다도 훨씬 더 당대 문명의 첨단 이기를 향유한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였기 때문에 로마총독의 관저가 여기 있었다.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 총독도 이곳에 상주하였고 유 같은 큰 명절에만 예루살렘을 잠깐씩 다녀갔다. 극장, 신전, 원형경기장,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전차경기장, 고급 목욕탕, 총독관저, 수로시설 등이 지중해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데 예수시대의 삶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의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예수시대 유적으로서 가장 리얼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꼭 가볼만한 곳이다. 베드로가 설교를 행한 곳이며, 바울이 구류된 곳이기도 하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f1.4c.)는 이곳의 주교였다.

  

 

예수 생전에 예수를 초청한 에데사의 왕()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비옥한 하란평야 위로 유프라테스 상류지역, 지금은 터키에 속해 있지만 우르파(Urfa)라는 매력적인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예로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 지역)와 북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연결하는 교통요지로서, BC 14세기 히타이트에 멸망되기 이전에는 후리안 왕조(a Hurrian state)의 수도로서 독자적인 고문명의 정체성이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지니는 오스로외네왕국(Osrhoëne)이 되었고 그 수도가 에데사(Edessa)였는데, 현재의 우르파가 바로 에데사인 것이다.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50년까지 에데사를 다스린 왕이 아브가르 우카마(Abgar Ukkama)였는데, 그의 통치기간이 예수의 생애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브가르왕과 예수의 관계에 대하여 최초의 기독교 교회사가인 비숍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ia,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는 그의 유명한 교회사(The Ecclesiastical History)(AD 312~324 집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의 기적을 듣게 된 아브가르왕은 예수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고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왕은 예수에게 자신의 고향을 안전한 거처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자기를 간절히 소망한 아브가르왕의 믿음을 축복하였으나,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왕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아브가르왕은 다시 편지를 보낸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에데사로 와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고쳐줄 것을 편지로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도마라고 불리는 유다72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에데사로 보내 아브가르왕과 많은 백성들을 고친 후, 모든 주민들에게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소기천, 예수말씀복음서 Q개론에도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이야기들로부터 우리는 역사적 정황을 어떻게 추론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비록 픽션 같은 야사일지라도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에데사야말로 인류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기독교국가(the earliest Christian state)라는 사실이다. 2세기 말부터는 에데사의 왕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에데사왕국이야말로 시리아어로 된 초기기독교 문헌의 생산지였던 것이다. 여기 유세비우스의 기록 중에 중요한 사실은 도마라고 불리는 유다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 작가 아루노비우스가 저술한 이방민족지(Adversus Gentes)에 의하면 도마는 직접 에데사로 갔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참고). 그가 바로 도마복음서의 저자였다는 추론도 가능하겠지만, 도마복음서의 저자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는 보다 폭넓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로마에서 직접 가져온 대리석으로 지은 카이사레아 목욕탕의 일부. 이 육각형 구조로 보아 후대의 작품이라면 대성당 부속의 세례당일 가능성도 있다. 요즈음의 감각으로 보아도 탁월한 건축물이다.

 

 

 헤르몬산에 올라가는 골란고원 길목에서 마이달 샴스(Majdal Shams)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 원래 시리아 땅이었는데 1967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었다. 드루즈(Druze)족이 사는 곳인데 시장통 그들의 특별한 의상이 눈에 띈다. 메시아는 남자 가랑이에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애가 풍 빠질 것을 염려하여 가랑이 밑에 포대가 형성되는 큰 바지를 입고 발목은 단단히 묶는다. 일설에 이들은 모세가 시내광야에서 만난 현명한 장인 미디안족장 이드로(Jethro)의 후예라고 한다. 이들은 불교, 기독교, 유대교, 그리스철학이 융합된 이슬람을 신봉하는데 유일신과 7명의 선지자를 믿는다. 그들의 세계관에는 네오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이 깔려있다.

  

 

마르코 폴로와 도마의 최후

기독교는 원래 서양종교가 아니다

 

 

20세기 세계문화사가 서구중심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서양종교라고 생각하지만, 초기기독교운동은 서양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기독교에 아시아적 사유를 회복시켜야 한다.

 

 

기독교를 생각할 때 검토되지 않은 우리의 일반관념 중에서 가장 거대한 오류가 기독교를 그냥 맹목적으로 서양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코배기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들에 의하여 팽창되었으며 그들에 의하여 최근에 동방에 전도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거개(擧皆)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서양사람이며, 기독교신학은 서양사람들이 만든 교리체계이며, 따라서 기독교에 관한 한 서양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이 정통이고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생각하는 서양(the West)’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이탈리아나 불란서, 스페인, 영국, 독일 등등을 떠올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라틴 웨스트(Latin West), 즉 서유럽문화권을 두루뭉실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초기기독교운동은 라틴 웨스트와 전혀 관련이 없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로마중심의 가톨릭 정통성을 확립한 이후의 기독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며, 예루살렘에 특별한 예속감(隸屬感)을 지니지 않았던 갈릴리지역의 사상가요 운동가였다. 나는 1972년 대만대학에 유학갔을 때,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학생으로 입학한 동기생 중에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었다. 이름은 요아브 아리엘(Yoav Ariel)! 그는 히브리 바이블과 탈무드, 카발라 미스티시즘(Kabbala mysticism)에 정통한 학자였는데 텔아비브대학 철학과에서 그를 중국 철학전공 교수로 키우기 위해 대만대학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말이나 한문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기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나와 단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대만대학 유학생활이란 아이러니칼하게도 중국철학을 공독(工讀)하는 본업보다 이 유대인 이방인에게 영어로 중국철학을 가르쳐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어야 했다. 그것은 심오한 사상투쟁의 과정이었다. 그가 유대교전통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과 중국철학적 가치를 편견없이 습득한다고 하는 노력 사이에는 태양열보다 더 뜨거운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유대인들은 성격이 한국인처럼 직선적이고 활달하고 다혈질이다. 그리고 말습관이 에두를 줄을 모른다. 우리들의 충돌은 가관이었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에 존속했던 첨예한 사상대결의 이면에는 진리를 향한 청춘의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우정을 나누었다. 기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도마복음서 주해를 집필하게 되는 이면에는 이러한 20대의 치열한 사상역정(史上歷程)이 뚜렷한 여로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난 그를 서양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왜 서양인인 당신이 중국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대만까지 와서 날 괴롭히냐고 반문했을 때 그는 매우 명쾌하게 답변했다.

 

“I am an Asian(나는 아시아사람이오).”

 

예수는 아시아사람이다. 아시아대륙의 서단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사람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활약한 지역도 코엘레 시리아(Coele Syria 지역)현 레바논의 알비카(al Biqa이고, 바울이 초대교회를 개척한 곳도 소아시아지역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국가종교로서 최초의 공인을 얻은 곳도 서구의 어느 곳이 아닌 동방의 나라 에데사(Edessa)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동방견문록에 바로 도마복음서의 저자이자 예수의 쌍둥이형제로 알려진 도마의 최후를 전하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가 17년간의 중국체류를 끝내고 베니스로 돌아오는 길에 남인도 서해안 말라바르지방(the Malabar Coast)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 도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 내려오는 도마의 이적이야기를 듣게된다. 그리고 도마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듣게된다. 폴로는 말한다: “기적에 관해서는 이상으로 충분히 말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성 도마가 살해된 광경을 그곳 사람들로부터 전승되어온 대로 이야기할까 한다.“

 

 

 정직, 충성, , 박애, 희생 그리고 유일신이 드루즈 삶의 원칙이다. 첩제도, 담배, , 돼지고기, 드루즈족 외혼을 금한다. 이들은 매우 점잖고 개방적이며 친절했다. 시리아문명의 깊이를 전해준다.

  

 

도마는 어느날 숲 속에 있는 암자에서 밖으로 나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방은 공작새가 많이 사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그때도 도마 주변으로 공작새가 떼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마가 열중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가비족의 사냥꾼이 도마 주변으로 떼지어 날고있는 공작을 잡으려고 화살을 당겼다. 가비족 사람은 그곳에 도마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화살이 공작에 맞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화살은 도마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관통했다. 화살을 맞고도 도마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는 그런 가운데 평온히 잠들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도마는 오순절사건 이후 사도들이 세계각지로 책임선교를 맡아 떠나는데 인도로 배정되었다고 한다. 가는 길이 너무도 험난하여 병약을 구실로 이를 피하려 하자, 예수가 꿈에 나타나, “도마야! 두려워 말라. 나의 축복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너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하고 도마를 고무(鼓舞)했다. 때마침 인도 서북부 아라코시아(Arachosia)와 인더스강 상류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곤다포루스(Gondaphorus)왕이 건축공을 물색하기 위하여 파견한 상인 압바네스(Abbanes)를 예루살렘에서 만난다. 도마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여 상인 압바네스와 함께 인도로 가 왕의 부탁으로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러나 도마는 받은 건축비로 궁전을 짓지 않고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일에 다 써버린다. 왕이 대노(大怒) 운운(云云).

 

이방민족지에 의하면 도마는 예수승천 2년 후에 전도사명을 띠고 인도로 가던 중, 에데사와 파르티아(Parthia), 부카라(Bukhara), 박트리아(Bactria)에 들러 기독교를 전했다. 도마가 인도에 온 것은 AD 52년이며 그가 죽은 것은 AD 72년으로 사료되고 있다. 그러니까 도마가 에데사에서 기독교를 전파한 것은 AD 52년 이전의 사건이 된다. 에데사는 헬라문명권과 교류가 있었지만 시리아문화권의 센터였으며 시리아어문학의 전통을 유지했다.

 

에데사에 첫 동방교회가 건립되고 타티안(Tatian, 110~180), 바르데산(Bardesane, 154~222), 바루트(Barut) 등 탁월한 기독교 학자들이 나타나 초기기독교 교리와 복음을 정리했다. 아브가르왕이 박해받고 있는 예수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훗날 신앙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에데사로 모여들어 기독교를 동방으로, 전 세계로 전하게 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에데사의 타티안이 바로 최초의 4복음서 체제인 디아테사론 (Diatessaron)의 편집자이다. 바르데산은 타티안의 시리아어로 된 디아테사론을 후세에 전했다. 그리고 AD 144, 구약의 하나님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구약의 전면적 폐기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한 마르시온(Marcion, ?~160)의 신봉자들이 세운 마르시온교회(Marcionism)의 활동무대가 바로 에데사였다. 그리고 에데사는 마니교(Manichaeism)의 주요한 활동지였다.

 

바울이 기독교를 소아시아와 희랍지역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있게 들리지만, 동시대에 도마가 기독교를 에데사와 인도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전설로 취급해버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저변에는 자료빈곤 이외로도 기독교는 서방종교라는 선입견이 짙게 깔려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와 말씀 전승에 새롭게 아시아적 사유를 복원시켜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아시아대륙문화의 유기적 일부로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평화로운 동산이 예수가 산상수훈을 행한 곳이다. “이제 우는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그 동산 언덕 중턱에 산상수훈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저 산 너머에 갈릴리 바다가 있고 그 주변으로 가버나움, 벳새다, 고라신이 있다.

  

 

예수와 페니키아 문명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서구문명을 우리는 기껏해야 그레코ㆍ로만문명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다. 서구문명의 뿌리는 희랍문명에 선행하는 페니키아문명에 있다. 페니키아인들이 BC 15세기에 발명한 문자가 희랍문자의 모태가 되었고 오늘 영어 알파벳의 조형이 되었다. 예수는 율법에 쩔은 유대인들보다 개방적 페니키아(시리아)인들을 더 사랑했다. 에데사왕국은 시리아문명의 한 중심이었고, 예수의 제자들이 그곳에 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독자들은 누구든지 예수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산은 갈릴리바다(호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 부근 타브가(Tabga) 지역에 있다. 이 자그만 동산에서 예수는 가난한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주린 그대들, 부드러운 그대들, 자비를 베푸는 그대들, 마음이 깨끗한 그대들, 평화를 만드는 그대들, 나로 인하여 핍박받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천국의 지복(Beatitudes)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굶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고, 우는 자가 기쁨으로 충만케 되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소외된 민중들에게 기쁜 소식’, 즉 복음(유앙겔리온)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들으러 온 군중들은 결코 갈릴리의 헐벗은 농민들만은 아니었다.

 

이 산상수훈의 핵심은 Q복음서에 들어가 있으므로 예수운동의 리얼한 정황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설교를 들으러 갈릴리바다 북단에 몰려든 사람들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6:17).

 

 

여기 제자의 허다한 무리(a great crowd of his disciples)’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는 결코 12명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12명의 제자라는 것은 불트만이 주장하는 바 후대 초기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 혹은 최후의 심판 이후 12제자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리게 되리라는 유대화파 교인들(Judaizers)의 선민의식을 반영한 것이다(22:30, 19:28).

 

문제는 그 다음의 군중에 대한 설명에 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이라는 표현은 매우 상이한 두 문화권 사이에 예수의 갈릴리 선교지역이 완충지대로서 끼어 있었던 지정학적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이란 갈릴리의 입장에서 보면 남방의 유대문명(Jewish Civilization)을 가리킨다. 그러나 두로(Tyre)와 시돈(Sidon)’은 갈릴리의 북방, 지중해 해안으로 펼쳐져 있는 페니키아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을 가리킨다. 두로와 시돈이야말로, 비블로스(Byblos, Gebal, Jbail), 베이루트(Beirut, Berot, Berytos)와 함께 페니키아문명의 4대 중심도시였다.

 

우리는 팔레스타인문명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에 젖어있다. 사실 그런 관념은 우리가 미국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난 편견일 수도 있다. 아니,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라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신·구약성서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바빌론문명이다. 그리고 바빌론문명과 더불어 생각해야만 하는 문명이 페니키아문명이다. 그러니까 현재 국가개념으로 생각하면 이라크ㆍ시리아ㆍ레바논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중동의 고문명요람지대. 미국 오리엔탈리스트 제임스 헨리 브레스티드(James Henry Breasted)가 명명 지대야말로 중동전체문명의 핵심적 주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갈릴리는 그 아이덴티티가 남방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지역보다는 이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개방적 선진문명에 더 근접해 있었고 더 동화되어 있었다. 당시 두로와 시돈의 찬란한 역사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관념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은 변방의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성전 하나 댕그렁 있는 촌구석으로 비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음의 예수의 말씀(로기온자료)을 한번 되씹어보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1~22, 10:13~14, Q31).

 

 

여기 예수의 저주의 언사 속에 나오는 고라신(Chorazin, Kirbet Keraze)과 벳새다(Bethsaida)는 예수가 활동한 가버나움 부근의 도시로서 갈릴리바다 북부의 부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배척하는 이 동네들을 향하여 저주를 말하면서 상대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념에서 본다면 두로와 시돈은 저주스러운 이방도시요, 바알신앙의 본거지며, 역사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오므리왕조의 왕 아합(King Ahab)의 부인 이세벨 여왕(Queen Jezebel)의 고향이었다(왕상 16:31~33), 이세벨은 사마리아에 바알산 당을 짓고 바알제단을 세워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한다. 결국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기손 시내(the Kishon Valley)에서 도륙하는 참극을 벌인다.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쓴다는 것은 낙타털로 짠 거친 옷을 맨살 위에 입고 재를 머리에 부어 누추한 모습을 만드는 유대인의 관습을 말하는데 이것은 참회를 상징하는 것이다(3:5~6).

 

예수는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이야말로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참회하고 삶의 자세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희망과 기대에 찬 언사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심판의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도시보다 더 축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러한 성서구절들을 역사적 정황과 단절시켜 간과하고만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입장에서 이 도시들을 감지하는 느낌을 말한다면 주변의 고라신과 벳새다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비유된다면 두로와 시돈은 뉴욕 맨해튼의 느낌이었다. 당시 지중해연안 최대의 도시였다. 지금도 두로에 가면 예수와 동시대의 히포드롬(Roman hippodrome, 대전차경기장)이 남아있는데 길이 500m에 달하는 세계최대의 규모이다.

 

 

 산상수훈교회(Church of the Beatitudes)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발루치의 설계로 1938년에 완공되었다. 8복설교를 상징하여 8각의 돔이 있다. 로마 가톨릭 프란시스칸 신부들이 이 교회를 주지하고 있다.

  

 

페니키아문명은 상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도시국가들의 연합체형식을 견지했으며 따라서 제국문명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서구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립한 제4왕조(BC 2613~2494) 시절부터 이미 왕성한 무역을 통하여 이집트문명을 흡수하였고, 아카디아, 힛타이트, 필리스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배합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벌 때도 두로는 극렬하게 저항하였다. 알렉산더대왕 사후 프톨레미 왕조에 속했다가 셀레우코스왕조에 병합되었다가 BC 64년에는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로마제국에 복속되어 시리아주로 편입된다. 그러나 두로와 시돈은 상인들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형태의 자치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페니키아문명은 희랍문명보다도 훨씬 오래된 고문명이며 BC 15세기에 이미 22글자의 알파벳을 발명하였고 그것이 희랍문자의 모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근세 서방 알파벳의 조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서양문명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희랍문명보다는 페니키아문명에 도달케 된다. 예수는 이 페니키아문명의 역사적 배경과 개방적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가 말한 아람어(Aramaic)도 페니키아어에 속하는 것이다. ‘페니키아라는 말 자체가 후대에 희랍인들이 명명한 것이며, 그들 자신은 가나안(Canaanites, 아카디아말로는 Kinahna)이라고 불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동경했던 그 가나안이 페니키아의 별칭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페니키아 시리아문명에 속한 에데사왕국의 아브가르왕이 갈릴리의 예수를 초청했다는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며 제자인 도마는 예수의 사후 에데사왕국으로 갔고 거기서 도마기독교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두로는 원래 섬이었는데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리고 페니키아함대(Phoenician fleet)가 정박해 있었다. 알렉산더대왕의 원정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7개월을 저항한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왕은 육지에서 두로섬까지 방파제를 쌓아 두로를 함락시킨다. 두로가 함락되자 시돈은 저항 없이 알렉산더대왕의 통치를 환영한다. 그리고 페르시아지배에 놀아난 왕을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한다. 알렉산더대왕은 그의 친구 헤파이스티온(Hephaistion)에게 그 일을 위임한다. 헤파이스티온이 새로 세운 시돈의 왕이 아브달로니 모스(Abdalonymos)이다. 위의 대리석 석관은 이 시돈의 왕 아브달로니모스를 위하여 BC 325~311 사이에 제작되었다. 그가 죽고나서 바로 이 석관은 완성되었다(BC 312), 이 석관은 시돈의 왕무덤에서 1887년에 발굴되었다.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페니키아ㆍ시리아정복을 결정적으로 만든 잇수스전투(the battle of Issus, BC 333) 장면을 조각하고 있고 알렉산더 대왕의 말 탄 모습(가장 왼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알렉산더석관(Alexander Sarcophagus)이라고 불린다. 시돈의 고문명의 찬란함을 과시하는 헬레니즘예술의 희대의 걸작품이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Istanbul Archaeology Museum) 소장.

  

 

예수 자신의 이방선교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가 이방의 나라 페니키아에 직접 갔다는 사실을 마가복음이 보고하고 있다. 게네사렛에서 두로로 갔다가, 시돈을 거쳐 다시 골란고원을 넘어 데카폴리스로 에둘러 갈릴리바다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미 이방선교를 몸소 실천한 국제적 사상가였다. 이방선교는 바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페니키아문명권에 직접 갔는가? 두로(Tyre)와 시돈(Sidon)에 간 적이 있는가? 이러한 나의 질문, 그 자체를 많은 독자들이 낯설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福音書)에 명료하게 주어져 있다. 자아! 마가복음 7을 펼쳐보라. 개역한글판을 정정함이 없이 그대로 여기 인용하겠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7:24~31).

 

 

지금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한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예수의 행적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지리적 표상은 그 스케일이 거대하다. 예수는 분명 맨발로 걸어다녔을 텐데, 그러기에는 한 큐에 움직이기 어려운 거대한 지역의 여정을 한순간에 지나치듯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화(短話)의 시작구인 거기를 떠나거기는 갈릴리호수 북단의 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Gennesaret)이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해변을 따라 서남쪽으로 15리 정도 떨어져 있다. 예수의 여정은 일단 이 게네사렛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약 200리 가량을 가면 나오는 지중해 해변의 항구도시 두로(Tyre)에 도착했다. 거기서 한 소녀의 치유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지중해 해변을 따라 한 150리를 걸어 올라가 당시 지중해연안의 가장 중심적 역할을 했던 화려한 항구도시 시돈(Sidon)에 도착한다.

 

시돈은 페르시아제국의 함대가 있었던 도시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선진의 유리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경주 왕릉에서 출토되는 유리병의 족보도 이 시돈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예수는 다시 이 시돈에서 내륙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골란고원을 가로지르고 트랜스요르단지역의 데가볼리(데카폴리스, Decapolis)를 경유하여 다시 갈릴리바다를 서쪽으로 에워싸고 북단의 가버나움 지역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우리나라 지형으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출발하여 해주항으로 갔다가, 다시 해변 따라 평양 부근의 남포항까지 북상하였다가, 다시 내륙지방으로 태백산맥을 건너 금강산으로 가서 속초, 강릉, 삼척까지 내려갔다가, 강원도ㆍ경기도를 통과하여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의 느낌인 것이다. 지금의 국가개념으로 말해도 이스라엘 북부에서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을 거쳐 다시 갈릴리 북단으로 돌아와야 한다.

 

불트만은 이 단화가 Q자료에 수록된 가버나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는 설화와 함께 원격치유(Fernheilung)를 주제로 하는 전형적 전기적 아포프테그마(Apophthegma)간략한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예수의 말씀들, 불트만은 아포프테그마를 논쟁 및 사제 대화(conflict and didactic sayings)와 전기적 아포프테그마(biographical apophthegms) 두 종류로 나누었다. 전자에 24, 후자에 22개를 할당하였다.에 속하는 문학장르이며, 아포프테그마에 있어서는 전혀 시간ㆍ공간을 나타내는 보도가 리얼한 상황에 기초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예수의 북방여행은 추리된 공상(phantasy)이라고 단정한다(공관복음서전승사, 허혁 역, 75). 불트만의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가의 기술은 당대의 어떤 구전에 일정한 기초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시대 사람들의 예수인식은 이미 예수의 활동영역이 갈릴리지역과 페니키아문명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북부지역공동체를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최근의 스칼라십(Scholarship, 학문)은 예수운동이 당대에 이미 페니키아문명권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숙지한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다라는 것은 예수가 자기를 잘 아는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서는 편하게 쉴 수가 없으므로, 조용히 지내고 싶을 때에는 타국의 대도시로 잠입하는 관행이 평소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숨길 수 없더라라는 것은 이미 이방의 대도시에까지 예수의 명성이 자자했다는 현실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두로에 나타난 여인은 누구였던가?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그 여자는 문화적 소양으로는 국제적 감각의 헬라인이었으나, 핏줄로 말하면 수로보니게사람이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개역판의 발음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채고 간과해버리지만, ‘수로보니게(Syrophoenician)’시리아계열의 페니키아인이란 뜻이다.

 

페니키아는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Carthage)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러니까 2차 포에니전쟁(BC 218~201)에서 코끼리부대까지 휘몰아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한니발 장군(Hannibal, BC 247~c.181)이 바로 페니키아인이었다. 이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페니키아사람들을 흔히 리비오페니키아인(the Libyo-Phoenicians)이라고 불렀는데, ‘수로보니게란 이에 대하여 시리아계 페니키아인을 지칭한 것이다.

 

이 시리아페니키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아람어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예수가 이 여인과 직접 희랍어로 소통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예수는 이미 당시의 희랍문명에 깊은 조예가 있는 인물로서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시돈의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소장품, BC 4세기 중엽, 고인이 된 주인의 영면을 애통해하는 18명의 여인들이 석관 삥 둘러 조각되어 있는데, 석관 그 자체가 이오니아식 석주회랑의 그리스 신전 모습이다. 그 석주 사이사이로 여인들이 서서 우는데 그 표현이 우아하기 그지 없다. 예수보다. 4세기나 앞선 이 페니키아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 문명의 찬란한 영화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예수에게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 중의 한 여인과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에게 귀신들려 집 병상에 누워있는 딸의 치유를 호소한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냉혹하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 자녀개들의 관계를 유대인이방인의 관계로 명료하게 규정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으나, 하여튼 예수는 인정머리 없게,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타국의 교양있는 여인을 개새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정된 공동식사테이블이 전제되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앉아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도 결정되어 있다. 이것을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들에게 던져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 개새끼 (kynarioi)’는 들판의 야생 늑대가 아니라, 집에서 식탁 주변을 맴도는 강아지(puppies)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알레고리가 아닌 직유(Vergleich)이다.

 

이러한 냉혹한 예수의 답변에 이 교양있는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의 논리를 이용하여 예수를 제압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페니키아 여인의 논리는 강렬한 자기주장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유머와 위트와 신념(faith)과 겸손(humility)을 은은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 속에도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는 표현은 이미 유대인의 구원의 특권에 대한 시간적 한정성을 암시하고 있다. ‘먼저먹게는 하겠지만, 그들이 먹기를 거부할 때는 그 구원의 밥상은 이방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시인한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는 기적적 치유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직 말씀으로 원격치유를 행한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좁은 예수운동의 동아리나 유대인의 민족의식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이방인에게 개방되어 있었다는 맥락에서 예수는 이미 세계인의 예수였다. 이방선교가 사도 바울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룩한 산 헤르몬을 바라보다. 2814m, 만년설로 뒤덮인 이 산은 요단강의 시원을 이룬다. 장엄한 헤르몬산은 이스라엘 정복의 북쪽 경계였다( 3:8). 안티레바논산맥의 꼭대기로 동북, 서남으로 30킬로 뻗어있다. 시돈 사람들은 이 헤르몬산을 시론이라 불렀고, 아모리 사람들은 스닐이라 불렀다( 3:9). 이 산은 가나안의 신 바알(Baal), 희랍신 판(Pan)과도 관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변모한 ‘높은 산’( 9:2)도 헤르몬산이라고 추정한다.

  

 

지브란과 견유(犬儒) 예수

샌달과 속옷,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

 

 

20세기의 예언자로 불리는 칼릴 지브란은 수로보니게여인의 아들이었다. 페니키아 전통을 이은 그의 사유 속에는 헬라적, 히브리적, 아시아적 가치가 자유롭게 왕래한다. 헬레니즘의 바탕에 깔린 아시아적 사유를 깊게 이해하면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지역의 견유학파적 실천운동가였다는 통찰에 도달하게 된다.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되어지지도 않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

사랑할 때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서는 안되리라, “신이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라.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노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사랑하는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수고로움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나니.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있지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거늘,

너는 진실로 자유로우리라.

너의 낮이 근심으로 가득차고, 너의 밤이 욕망과 슬픔으로 범벅이 되는 바로 그때에.

이런 것들이 너를 칭칭 감으나 네 스스로 발가벗고 사슬을 끊고,

이들 위로 솟아오를 그때에 너는 진실로 자유로우리.

너는 네 몸뚱이와 하나가 되었을 때 선하다.

그러나 네가 네 몸뚱이와 하나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내분(內分)된 집이라 하여 그것은 도둑의 소굴은 아니다. 오직 내분된 집일 뿐.

기도란 게 무엇이뇨? 생명의 하늘 속에 너 스스로를 활짝 펴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뇨?

허공 속에 너의 어둠을 쏟아 버리는 것이 너의 안락이라면,

너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새벽빛을 쏟아버리는 것 또한 너의 기쁨이리라.

죽음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느뇨?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단 말가?

낮에는 멀고 밤에만 뜨는 올빼미는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나니,

그대 진실로 죽음의 혼을 보고자 한다면

생명의 몸을 향해 너의 가슴을 활짝 열라!

삶과 죽음은 한몸,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희망과 욕망의 심연 속에 저 너머 세상의 고요한 깨달음이 조용히 출렁이도다.

알미트라는 말이 없었다. 안개 속으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면서.

그리고 사람들 모두 흩어질 때까지, 그녀는 홀로 방파제 위에 서서,

그녀의 가슴속에 새겨진 그의 말들을 되새겼다.

참만, 바람 위에 일순의 휴식이 오면 또 한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함석헌 선생께서 천안의 씨알농장에서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밭이랑에 웅크린 호기심어린 소년 도올에게 들려주시곤 했던 이 주옥같은 말들. 이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예언자적 외침을 회상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말같이도, 석가의 말같이도 들리는 이 언어들의 본류를 더듬지 않으면 안 된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두로, 시돈 저 윗켠 만년설로 덮여있는 레바논산 기슭의 아름다운 소읍, 브샤레(Bsharrī)에서 태어났다. 그야말로 수로보니게 여인’(7:26)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지브란의 엄마는 레바논 마론파 신부의 딸이었다마론파 기독교의 신부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 결혼한다. 그는 뉴욕에 정착하여 레바논의 동포들과 문학동맹(The Pen League)을 결성하면서 예언자의 언어를 쏟아내었지만, 그의 내면적 초월의 자유와 저항의 세계 속에는 페니키아문명의 오랜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지브란의 언어와 도마복음서의 언어 사이에서 어떤 공통된 흐름을 조망하는 우리의 시각 속에는, 역사적 예수의 실존을 지배하는 아시아적 사유의 진면목에 대한 직시가 있어야 한다. 헬라적 사유전통이 알렉산더대왕의 동정(東征)을 계기로, 우주론과 인식론에서 인간실존의 제문제를 탐색하는 인생론으로 사유패턴이 근원적으로 전환하는 그 이면에는, 제국문명의 정치적 분위기나 폴리스의 정체성 상실과 구성원의 자아상실의 허탈감을 운운하기 이전에, 아시아적 사유의 서점(西漸)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대변하는 고전시대(Hellenic Age)의 치열한 논리적 탐색이, 헬레니즘 시기(Hellenistic Age)로 들어서면서 스토아학파(Stoicism),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 견유학파(Cynicism), 회의학파(Skepticism) , 제사조(諸思潮)가 추구하는 인생의 궁극적 행복이나 평정과도 같은 비근한 주제로 자리를 양보하는 문명의 전환, 바로 그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 아시아적 사유였다.

 

 

 헤르몬산 기슭의 드루즈족 주민, 샌달과 지팡이가 인상적이다.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전륜성왕이라 불리는 아쇼카왕(King Ashoka, BC 265~238, 혹은 BC 273~232 재위)이 서방세계에 대규모의 불교 포교단을 파견한 사실도 전설로서만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다르마(Dharma, 佛法)에 의한 덕치주의를 표방한 아쇼카왕은 스리랑카와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불교 포교단을 공식 파견하여 불교를 세계 종교로 격상시켰던 것이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468).

 

서양철학사에서 알렉산더대왕 이전의 고대 우주론과 인식론에는 비중을 크게 두는 반면, 헬레니즘 시대의 인생철학적 신사조를 소략하게 다루는 경향성의 배면에는 아시아적 사유에 대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지식(Knowledge)이 아닌 지혜(Wisdom)였고, 우주의 원질(原質)에 대한 통찰이기보다는 인생의 아타락시아(ataraxia)의 체득이었다. ‘아타락시아란 과도한 쾌락이나 고통 그 어느 것에 의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이었다. 그것은 도마복음에서 안식(Res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의 해탈(解脫, mokṣa)이었다.

 

이 해탈을 가장 철저하게 구현하려고 하였던 사람들이 견유학파였다. ‘견유(犬儒)’란 문자 그대로 개처럼 사는 지식인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시닉(cynic)’이라고 부르는 것도 개를 뜻하는 희랍어 퀴온(kuōn)’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전통과 문명을 거부했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 의복, 주거, 음식, 일상예절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의 수단은 걸식(begging)’이었고, 끊임없는 무소유의 방랑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은 절구통 속에서만 생활하던 견유학파의 대가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BC 412~323)를 방문했다. 알렉산더는 절구통 속의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기까지 당신을 찾아왔으니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오?” 이에 디오게네스는 대답한다: “나의 햇빛이나 가리지 마시오(Please stand out of my light).” 이것은 권력에 대한 용감한 도전이나 무시만을 과시하는 사건은 아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추구하는 거대한 제국건설의 영욕과 무관하게 햇빛만 있어도 평온하게 살 수 있다는 디오게네스의 항변은 기존의 모든 문명적 가치에 대한 사유의 전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면서 동시에 나는 현존하는 모든 가치를 재주조한다(I recoin current values).’고 외쳤던 것이다. 그는 천상에서 불을 훔쳐와 인간세를 인위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든 프로메테우스를 저주했다. 니체가 주장하는 가치의 전도는 디오게네스 철학의 현대적 표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야말로 디오게네스의 제자였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견유학파적 리얼리즘을 철저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의 운동에 가담하는 제자들에게 돈을 담은 전대는 물론, 지팡이나 가죽샌달도, 그리고 속옷조차도 지니지 못하게 했다(10:9~10, 9:3, 10:4). 지나치는 사람들과 문안인사조차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견유학파의 덕목은 최소한의 질박한 삶(simplicity)이었고, 모든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절제(self-control)였다. 예수가 비유를 잘 들기로 유명한데 견유학파의 사람들이야말로 비유의 천재들이었다. 역사적 예수를 가장 잘 조명한 신학자 크로쌍(John Dominic Crossan)은 예수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규정한다: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의 견유(cynic)였다.”

 

 

 히브리 대학교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희랍정교회 신부, 이 신부는 히브리대학에서 구약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대세를 아르메니아정교회, 희랍정교회, 가톨릭으로 삼분하였다. 왜 프로테스탄티즘은 포함시키지 않냐고 묻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집안 내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은 후대의 이방문화전통이 마구 삽입된 비정통의 기독교집단이며, 초기 기독교 사도들의 전승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정교회와 희랍정교회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 감람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 예루살렘에 야고보의 교회가 있었을까?

  

 

 에데사의 도마행전

예수가 편지를 쓰다

 

 

4세기 초의 기독교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에데사의 왕실문서 보존창고에서 아브가르왕과 예수 사이에서 오간 편지가 실려있는 시리아어 문헌을 찾아냈다고 떠벌인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오간 편지내용을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 양 공개하고 있다. 이와 같이 4세기 초만 해도 초대교회사람들이 인식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왕과 편지를 주고받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예수가 마약이나 약초를 쓰지 않고 사람을 잘 고친다는 표현은 매우 재미있는 사가의 기술이다.

 

 

오스로외네왕국 에데사를 중심으로 일찍이 도마기독교(Thomas Christianity)의 전통이 성립했다는 사실에 관하여 많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후대에 대중적 인기를 얻은 마태기독교나 베드로기독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인, 야고보기독교나 도마기독교의 전통이 에데사와 관련되어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고보나 도마는, 모두 예수의 친형제라는 가설(假設)의 진위(眞僞)를 떠나, 역사적 예수와 보다 밀착된 어떤 로기온전승을 지킨 그룹의 상징이었다. 흔히 이들은 예루살렘중심으로 활약했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하여 시리아 동북지역의 에데사로 그 거점을 옮기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도마복음서 속에서는 야고보와 도마는 예수말씀의 정통적 지킴이로 등장한다. 그리고 살로메(Salome)와 마리아(Mary)는 진실한 제자를 대변하며, 바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베드로와 마태, 그리고 집단적인 용례로서의 따르는 자들(the followers)’나의 번역에서는 제자들(the disciples)’이라는 표현을 삼가하였다은 항상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며, 이들은 방랑자의 래디칼리즘(Wanderradikalismus)을 유지하던 도마전승의 정통파사람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예수그룹을 대표한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전쟁이 일어나면서 AD 70년 전후로 도마기독교사람들이 그들을 지원하는 안전한 북방의 에데사로 거점을 옮겼다는 가설은 쉽게 이해가 간다그리고 방랑하는 카리스마들(Wandering Charismatics)’에게는 북방의 언어가 더 편리했다. 팔레스타인의 지역방언보다 국제통용어(lingua franca)’였던 희랍어가 더 편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변의 예수운동가들은 점점 정착되어간 반면 북방은 방랑자 전통을 더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4세기 초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미 예수 당대에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와 역사적 예수 본인 사이에 구체적 서한의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가르왕은 질병과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소문으로 익히 알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에데사의 문서보존창고에서 아브가르왕과 예수 사이에 오간 편지를 기록한 시리아문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고 자랑하면서, 그것을 시리아어로부터 다음과 같이 희랍어로 번역해놓았다. 전령(courier) 아나니아스(Ananias)를 통해 예수에게 보내어진 아브가르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나 아브가르 우카마, 에데사의 군주, 예루살렘지역에 나타난 훌륭한 구세주 예수에게 문안하오.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치료에 관하여, 특별히, 마약(pharmakōn)이나 약초(botanōn)를 쓰지 않고 잘 고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소. 더욱이 장님에게 시력을 회복시키고, 절름발이가 걷도록 하며,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더러운 악령과 악마를 몰아내며, 고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익히 들었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신에 관하여 다음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소, 당신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하강한 하나님(theos)이거나, 하나님의 아들(a Son of God)일 수밖에 없소.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당신이 빨리 나에게로 와서 나의 고통을 해방시켜주도록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바이외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박해한다고 들었소. 나는 작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도시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이 지내기에 이상적인 곳이라 생각되오.

 

 

이 편지를 받은 예수는 아나니아스를 통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믿는 그대여, 복이 있도다. 나에 관하여 이미 기록된 바,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으려하지 않고 나를 보지 않은 자가 오히려 나를 믿고 생명을 얻는다 하였도다. 그대가 나에게 왕진을 요청하며 쓴 것에 관하여, 나는 먼저 이곳에서 내가 보내어진 사명을 완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노라. 이곳에서 나의 임무가 완수되면, 나는 나를 보낸 그이에게로 다시 들리우리라. 내가 들리울 때에 나는 나의 제자 중 한 사람을 그대의 고통을 고치기 위해 파견하리라. 그는 그대와, 또 그대와 같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리라.

 

 

그 편지 말미에 시리아어로 예수 사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도마(쌍둥이)인 유다는 아브가르왕에게 70제자 중의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보냈는데, 그는 에데사에서 토비아스(Tobias)의 아들, 토비아스의 집에 머물면서 이적을 행한다. 결국 다대오는 아브가르왕을 대면하기에 이른다. 다대오를 대면한 아브가르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그대의 스승 예수에게 무한한 신념을 품었노라. 로마제국의 권세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군대를 보내어 쳐부쉈을 것이다.” 다대오는 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대 머리 위에 손을 얹노라.” 그 순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질병과 고통이 사라졌다. 마약과 약초를 쓰지않는 다대오의 치유와 선교는 계속된다. 드디어 전 국민과 왕이 모여드는 광장에서 그는 설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지옥 하데스로 사흘간 내려가 있다가(descended into Hades), 모든 군중이 보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간 사건을 선포한다. 이 일들은 340년에 일어났다. 에데사 기원 340년이란 AD 30년을 의미한다.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공부를 하고 있는 폴란드인 희랍정교회 신부와 대화를 나누다.

  

 

과연 독자들은 이러한 문서기록을 진실한 역사의 기술이라고 믿을 것인가? 우리는 4세기 초의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예수상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쾨스터는 도마기독교가 에데사에 일찍 정착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에데사 도마기독교(Edessene Thomas Christianity)2세기에 마르시온파를 포용하는 등, 로마정통기독교와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자, 에데사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따라서 그 원조인 도마의 족보를 폄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팔루트(Palut)가 에데사의 비숍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에데사의 도마기독교를 서방 정통교회(Western orthodoxy)로 전향시켰고, 그에 대한 반발로 도마기독교 신봉자들의 상당수가 마니교로 흡수되었다고 본다. 하여튼 이러한 서방화의 과정 속에서, 아브가르의 전설도 원래는 도마가 주인공이었으나, 도마가 탈락되고 다대오가 대치되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AD 3세기 초에 에데사에서 성립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헌, 도마행전(Acts of Thomas)과의 관련성 때문에 도마복음서가 에데사에서 성립한 문헌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도마행전첫머리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유다 도마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바라 알란드(Barbara Aland)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에데사전승을 거부한다.

1) 에데사는 시리아어 권역이며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마복음서는 당초에 희랍어로 쓰여졌다.

2) ‘유다 도마라는 이름은 동부시리아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3) 도마행전의 저자가 도마복음서를 참고했다는 퓌에쉬(Peuch)의 분석은 문헌적 근거가 박약하다.

 

나 도올은 도마복음서가 에데사전승의 산물이라는 비정(批正)은 억측의 소산이라고 간주한다. 도마복음서는 예수운동의 가장 오리지날한 층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성립한 독자적인 문헌이라고 본다. 후대 도마기독교의 가설과 관련된 문제들은 모두 도마복음서 성립 이후의 발전양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이제 도마복음서 본문에 즉()하여 정교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아문신을 모신 룩소르 카르낙신전의 기둥들에 새겨진 성각문자들, 히에로글립스의 ‘히에로’는 성스럽다(sacred)는 의미이고, ‘글립스’는 글리페인(glyphein) 즉 각(刻)한다는 의미이다. 상형문자라는 의미는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성각문자(聖刻文字)’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 성각문자는 실제적으로 기념비적인 건물의 석벽이나 비문에 새겨진 것이며 특수한 지배계층에게만 통용된 것이다. 지식과 권위를 독점하려는 지배층들은 성각문자가 일반민중에게 해독되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사제들이나 서기관들은 파피루스에 ‘사제문자(Hieratic)’를 썼다. 나중에는 대중적인 ‘민용문자(Demotic)'가 발전하기에 이른다.

 

 

 콥트어와 성각문자

인간의 언어는 문자라기보다는 소리의 체계

 

 

도마복음서는 콥트어로 쓰여졌다.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 언어 발달사의 최후단계에 해당되는데 희랍문자를 차용한 알파벳언어이다.

 

 

도마복음서 텍스트는 콥트어(Coptic)로 되어있다. 물론 도마복음서가 최초로 콥트어로 집필되었다고 간주되지는 않는다. 앞서 우리가 논의했듯이, 옥시린쿠스 사본(POxy)을 통하여 콥트어 텍스트에 선행하는 희랍어 텍스트의 존재가 입증되기 때문이다(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1, 325~328). 그러나 희랍어 텍스트는 부분 편린(片鱗)만 남아있는 데 반하여 콥트어 텍스트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콥트어를 통하여 도마복음서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콥트어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희랍어의 자모를 빌리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집트말이다. 즉 희랍어 자모를 이집트말에 대한 이두식표기로서 활용한 것이다. 희랍어 자모는 24개가 있는데, 24개만 가지고는 이집트말의 발음체계를 다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전 단계의 민용(民用)문자인 디모틱문자(Demotic)에서 7개의 글자를 빌려왔다. 7개 글자의 음가만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Sch(Schei), F(Fei), Ch(Khei), H(Hori), Dsch(Djanjia), Sch(Shima), Ti(Ti).

 

콥트어는 함ㆍ셈어족(the Hamito-Semitic language family)에 속하는 고대 이집트언어의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집트 언어사에서 최초로 구어의 발음체계를 온전하게 표기하는 체계라는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전의 이집트말 표기방식은 우리가 흔히 상형문자(象形文字)’라고 알고 있는 것인데 그것으로는 이집트말의 발음체계를 온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고대 이집트문자의 발음체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콥트어라는 창문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1799년에 발견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의 해독을 놓고 영국의 의사이자 물리학자인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1829)과 불란서의 언어학자 샹폴리 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이 경쟁을 벌였을 때 토마스 영의 연구가 샹폴리옹에 필적할 수 없었던 것도, 샹폴리옹이 콥트어에 달통한 데 반하여 영은 콥트어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귀결된다.

 

콥트어는 1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7세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까지 거의 유일한 이집트의 공식언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파벳을 사용하여 구어를 표기하는 것이 너무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콥트어가 1세기부터 이미 이집트말의 표기방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언어발달 사적 이유로 고찰되는 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종교적 이유다. 즉 콥트어의 등장은 이집트가 기독교국가로 변해버렸다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사태이다.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문헌이나 제식을 민중에게 전달하는 데는 전통적 상형문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형문자는 그 자체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적 신념을 표방하는 성스러운 세계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융합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프톨레미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는 기간(BC 305~30) 동안에는 국제통용어인 희랍어가 상용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콥트어는 희랍어의 명사어휘를 대거 차용하였으며, 명사 이외로도 형용사, 동사, alla, gar, de, ē, men, hōs, hina와 같은 기능어도 차용하였다. 그리고 단어의 어근(語根)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콥트어 문학은 파코미우스를 계승한 수도원운동의 대부 셰누테(Shenute, c.360~c.450)의 저작활동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콥트어 자체가 기독교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인들은 콥트어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랍인들은 997년 공식적으로 콥트어를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콥틱 기독교는 무슬림의 탄압 속에서도 줄기차게 살아남았고 오늘날 이집트 인구의 10%콥틱 정교회(Coptic Orthodox)에 속해 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일상용어로서의 콥트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콥틱교회의 제식언어, 제식음악으로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어(死語)라 해야 할 것이다.

 

 

 영국박물관에 진열된 로제타 스톤의 일부, 1799 8월 알렉산드리아 부근의 로제타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불란서 장교가 발견했으나 불란서군이 패하자 영국 외교관이 전리품으로 압수했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들은 빼앗기기 전에 복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샹폴리옹은 12살 때 이 복사본을 보고 해독을 결심했다. 프톨레미5세의 칙령(BC 196)인데 같은 내용이 성각문자와 민용문자와 희랍어로 병기되어, 쉽게 알 수 있는 희랍어로부터 이집트 고대문자의 수수께끼를 파헤쳐나갈 수 있었다. 이 현무암이 근대 이집트학의 출발이다.

  

 

콥트어 이전의 이집트문자를 말할 때, 우리가 흔히 상형문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 상형(象形)이란 문자 그대로 사물의 형태()를 본뜨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뫼 산() 자는 산의 모양을 본뜬 것이고, 내 천() 자는 시내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문자이든 이집트문자이든 이런 상형자(象形字)는 지극히 제한된 것이다. ‘사랑이나 이나 은총이나 구한다와 같은 형체 없는 개념들을 상형의 방식으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이에 우리는 고대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의 언어에 대한 아주 근원적이고도 원칙적인 이해를 해야한다. 인간의 언어는 표기되기에 앞서 소리로서 소통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문자의 체계라기보다는 소리의 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소리의 체계와 무관한 표의문자(ideogram)와 표음문자(phonogram)를 이원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언어학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표의문자라고 알고 있는 한자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옛 고()라는 글자의 형태에서 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는 갑골문에 있어서도 상고할 길이 없다. 그런데 와 관련된 글자를 보면, , , , , , , , ,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라는 것은 단지 gu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성부(聲符)일 뿐이며, ‘이라는 의미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자를 단순히 뜻글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리글적인 요소를 단음절의 글자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문자가 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를 의미하는 표의자라고 한다면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다. 새 모양의 글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a라는 음가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상형자나 표의자가 아니라, 좀 회화적으로 약속된 알파벳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로제타 스톤에 1,419개의 싸인이 있었는데 겹치지 않는 모양은 66개밖에 없었다. 66개를 상형문자라고 해버리면 복잡한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의 토마스 영은 이집트 문자가 표음적 성격이 있음을 암시했으나 샹폴리옹은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고집을 피웠다. 그러다가 어느날 불란서의 중국학 학자로부터 한자도 표음적 요소로써 풍요롭게 발전한 언어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이집트 문자가 표음문자(phonogram)와 표어문자(表語文字, logogram)와 한정사(determinatives), 3요소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표음문자에 해당되는 싸인은 24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그 음가를 정확히 재구성해내었다. 1822년 이집트의 고대사가 개벽되는 순간이었다. 고대이집트의 24개의 알파벳 시스템은 페니키아 알파벳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오늘날 서구문명의 알파벳의 시원이 된 것이다.

 

현대언어학에서는 표의문자(ideogram)라는 말보다는 표어문자(logogram)라는 말을 즐겨쓴다. 지아비 부() 자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로고(logo)라고 파악한다. 한자의 경우에는 일자일어(一字一語)의 원칙이 고수되지만 이집트 문자나 그 이전의 설형문자에서는 복합적 자형들이 동원된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립스(hieroglyphs)를 상형문자라고 부르지 말자! 그것은 단어의 뜻 그대로 성각문자(聖刻文字)라고 불러야 한다. 보수적 성향의 성각문자는 BC 3200년경부터 AD 4세기까지 장례와 종교적 목적으로 줄기차게 쓰였다. 그리고 성각문자보다 한 5세기 늦게(2왕조 말기, BC 2686년경) 사제문자(hieratic)가 발전한다. 그리고 제26왕조(BC 6·7세기) 때부터 행정·상업·문학용의 민용문자(demotic, 민중문자라고도 함)가 널리 쓰였다. 민용문자는 희랍어와 병행되다가 콥트어의 발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 문자의 변천사는 인간의 말의 표기체계가 표어적 성격에서 표음적 성격으로 변천해가는 하나의 보편적 양태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우리말의 표기변천사도 비슷하다).

 

도마복음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다: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니라.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 문서를 둘러싼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세계인들의 양심의 호소와 협조에 따라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낫세르 대통령이 골동상의 소유물을 국유화시켰고, 심리학자 융이 소유했던 코우덱스도 결국 반환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오직 도마복음서 첫 두 페이지가 전시되고 있는데 콥틱 박물관은 일체의 촬영을 불허했다. 나는 박물관 사무실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도마복음서 하나만 촬영케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으나 절대불가라는 방침만 되풀이했다. 유네스코의 관계자들의 이름까지 들먹였어도 이집트 문화재청 장관의 허락서를 직접 받아오라고 호통쳤다. 나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하여 만리길 여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작은 카메라를 숨겨 극적으로 보안장치를 통과하여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무장경비원들이 여기저기 눈을 부라리고 있는 와중에 그들을 따돌리고 열 번째 홀의 진열장 속에 있는 도마복음서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큰 글씨는 ‘The Apocryphon of John’으로 앞 책의 제목이고, 그 다음부터 도마복음서의 장엄한 글씨들이 시작되고 있다. 파피루스 한 페이지 크기가 28.2×14.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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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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