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년 2월 25일(월) 맑음
이제 다음주면 GOP 철수다. 과연 내 자대 생활 내내 있었던 GOP를 다음 주면 정말 떠나게 될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역시 이래서 ‘백문불여일견 백견불여일행(百聞不如一見 百見不如一行)’이라 하는가 보다.
이쯤에 이르러서 사람들 반응이 참 이채롭다. 몇 달 전만해도 ‘빨리 나가고 싶다’를 연발하던 사람들 입에서 이상하게도 ‘잔류’라는 말이 드문드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FEBA가 더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기대와 함께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정말로 너무나 익숙해져서 뭘 해도 편해져 버린 이곳에 남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든다. ‘도전의식’과 ‘현실 안주의식’ 사이의 충돌, 도전은 전혀 생소한 것이기에 많은 위험 요소가 따르는 게 사실이고, 현실 안주는 늘 그랬던 것이기에 아무런 위험 부담도 없이 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전 후의 현실이 더욱 가치 있고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뜻 그렇게 맘먹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한비야씨의 『중국견문록』이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를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모두 다 불가능이라 여겼던 일을 아무 스스럼 없이 해내며 결국 ‘해보지 않고 포기하지 말자’ ‘한 걸음의 철학’이란 말로 도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절대 불가능한 것도, 절대 어려운 것도 없다. 당시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며 정신적인 속박 때문에 지레 생각지 않는 것이다. 난 FEBA로 나갈 것이다(물론 선택불가능한 것이기에 마음을 다잡는 거다). 나의 현실이기에 회피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 말대로 ‘GOP보다 FEBA’가 더 좋기 때문에 난 좋음을 직접 내 몸으로 느껴볼 것이다. 올 테면 와라 내가 그까짓 것들에 쓰러질쏘나!
GOP에서 1년을 보냈다. 자대 생활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돌아보지 않으려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 신교대에서 이곳으로 배치 받았을 때 어디로 팔려 가는지 모르게 막막했던 순간, 부소대장님을 따라 남이와 나는 전망대에 올라가 ‘떡볶이와 카스타드’를 원없이 먹으며 좀 자유로운 자대 생활에 기대를 품었던 순간, 그때 오전 취침을 하러 누웠을 때 침낭을 머리까지 덮었는데 그제야 집이 너무나 그리워 눈망울이 붉게 물들어졌던 그리움의 순간, 선임들에게 이도저도 아닌 일들로 충고를 들으면서 더럽고 야비한 군현실이라고 느꼈던 참혹했던 순간, 그 한 여름에 연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이 빗줄기를 뚫고 투입해야 하는 구나’하는 짜증 섞인 기분을 느끼던 순간, 9월 연대종합전술훈련평가(RCT)로 인해 준비태세를 계속하다 보니 거기서 느껴지는 짜증과 9월 23일에 비박임에도 불구하고 11시 30분에 기상해서 2시 30분까지 완전 군장을 하고서 강점 진지에 투입한 후 방벽까지 들고서 투입해 근무를 서야 했던 힘겨움의 순간, 10월 10일에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쉴 거라 기대했던 그 기대감을 와장창 깨고서 그 굵은 빗방울을 다 맞아가면서 작업을 했기에 내복이 다 젖어 몸에 들러붙는 바람에 그 시리디 시린 추위에 몸서리치던 순간, 새해 1월 1일에 12월 31일에 내린 폭설을 재설작업하느라 철수도 하지 못하다가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철수를 해선 겨우 2시간 정도 자고 다시 일어나 다시 제설작업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의 참기 힘든 화남의 순간.
이런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과 함께 나를 버티게 만든 좋은 기억들도 있다. 처음 자대에 왔을 때 고참들의 참다운 관심들을 느껴져 인간미가 한가득 느껴졌던 순간, 중대 그림 작업을 투입되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데서 나오는 뿌듯함을 느끼던 순간, 그 일로 인하여 너무나 이른 시기에 포상 휴가를 받았을 때의 날아갈 것만 같았던 기쁨의 순간, 흐를 것 같지 않던 시간이 흘러 한 계급씩 진급할 때의 은근한 행복이 있던 순간.
이런 상반의 기분을 느끼면서 군 생활, 그것도 GOP에서의 1년을 마쳤다. 다음 주면 철수해야 할 이 시점에 이르러서 길고도 길었던 시간이 정말 꿈인 양 느껴지며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덩달아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도 든다. 이렇게 뭔가를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전혀 새로운 곳에서도 생활한다면 지옥보다 더한 곳이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고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추위를 몸소 겪어냈으며,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서 근무를 섰던 그 패기만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더디고 더디지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일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한 걸음의 철학’을 몸소 느꼈다. 언제나 이 모든 게 추억이자 아련한 기억, 그리움이 될 날을 상기하며 마지막 1년 2개월, FEBA를 향해 끊이지 않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을 이어나가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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