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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싯달타가 깨달은 것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싯달타가 깨달은 것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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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가 깨달은 것

 

 

나는 일찌기 말했다. 붓다는 엉터리로 안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안 사람이다. 무얼 어떻게 알았나? 붓다의 깨달음, 붓다의 얇은 삼법인(三法印)으로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붓다의 얇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던가? 나는 이 어려운 질문에 또 다시 매우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연기였다.

 

나는 근본불교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으로 실존한 X가 있었고, X가 싯달타였으며, 그가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명상 끝에 득도하였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즉 역사적 붓다(the historical Buddha)의 실존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역사적 붓다의 사유과정을 추론하는 데 있어서 이 연기라는 한마디처럼 유용한 실마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추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마하박가를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첫 칸드하카(Khandhaka)의 깨달음의 순간이다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Ⅰ, pp 40..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신 세존께서는,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동안 오로지 한 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그러던 중 밤이 시작될 무렵에 연기(pațiccasamuppāda)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

At that time the blessed Buddha dwelt at Uruvelā, on the bank of the river Nerañgarā, at the foot of the Bodhi tree (tree of wisdom), just after he had become Sambuddha. And the blessed Buddha sat cross-legged at the foot of the Bodhi tree uninterruptedly during seven days, enjoying the bliss of emancipation.

Then the Blessed One (at the end of these seven days) during the first watch of the night fixed his mind upon the Chain of Causation, in direct and in reverse order.

Sacred Books of the East, Vol. XIII, pp.73~5.

 

 

나는 이러한 마하박가의 구절을 읽을 때, 뭉클 내 가슴의 심연을 치고 솟아올라오는 감동, 영롱하게 반짝이는 나의 눈물 맺힌 두 눈동자, 이러한 것들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6년간의 치열한 고행(苦行) 끝에 얻은 한 인간의 깨달음! 그 깨달음, 그 앞의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최초의 언사는, 다름아닌 이 연기라는 한마디였던 것이다. 그것은 삼법인(三法印)도 아니요,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도 아니요, 삼보도 아니요 진여도 아니요, 해탈(解脫, mokṣa)도 아니요 열반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연기, 이 한마디였던 것이다.

 

그가 보리수밑에 명상을 통해 얻은 앎, ‘일체를 알았다고 표현한 그 앎의 내용은 국부적인 하나의 앎이 아니라, 최소한 그의 45년간의 기나긴 설법의 전체내용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붓다가 되었다. 친구들이여! 이제 나를 싯달타라고 부르지 말라! 나는 여래요, 세존이요, 아라한이요, 정등각자이다라고 서슴없이 외쳐대는 한 인간의 절대적 지적 자신감, 그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연기이 한마디로써 그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연기는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연기는 붓다의 처음이요 끝이다. 연기는 두 밀레니엄 이상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인류에게 끊임없는 지혜를 제공한 샘물이다. 연기는 45년간의 불타의 설법의 모든 구절에 배어있다. 불타의 모든 언어는 결국 연기 이 하나의 깨달음의 다양한 표현일 뿐인 것이다. 연기를 빼놓고는 한 치도 불타를 말할 수 없다. 팔만대장경이 연기, 이 한 글자인 것이다.

 

 

 간지스 강변 창공을 훨훨 나르는 새들의 제행도 예외없이 연기 속에 있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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