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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4 何以故 ~ 卽非菩薩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4 何以故 ~ 卽非菩薩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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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바로 이 절에서 정종분(正宗分)은 피크를 이룬다. 이것은 불타의 무아론(無我論)의 본의로 회귀하자는 보살운동의 캣치프레이즈이기도 한 것이다. ‘Return to Buddha!’

 

역사적으로 보살의 의미규정은 이 한 절에 완료되고 완성된다. 바로 보살됨의 내용이 이 한 절을 벗어남이 없다. 역사적으로 대승의 규정은 이 한 절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이 사상(四相)이라고 하는 ()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에 대해서는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고 또 역대의 해석이 구구 분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모든 역대의 해석을 각설하고 간략하게 내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설파하겠다.

 

한마디로 이 사상(四相)의 부정은 곧 불타의 일법인(一法印)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론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멸도(滅度)의 행위의 부정의 인식론적 근거를 밝힌 것이다. 이미 앞 절에서 내가 어느 정도 약설(略說)했기에 장황설을 삼가하기로 하겠다.

 

보살에게는 어떠한 경우도 ()’라고 하는 실체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가 있으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다. 즉 보살됨의 규정은 곧 무아(無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실천이 없이는 반야의 지혜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우선 라집(羅什)의 번역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 원문의 개념을 상응시키면 다음과 같다.

 

라집역(羅什譯) 산스크리트 원문 현장역(玄奘譯)
아상(我相) ātman 아상(我想)
인상(人相) pudgala 보특가라상(補特伽羅想)
중생상(衆生相) sattva 유정상(有情想)
수자상(壽者相) jīva 명자상(命者想)

 

 

그런데 산스크리트 원문의 순서는, 아인중수(我人衆壽)의 순서가 아니라, ātman sattva jīva pudgala의 순서대로 되어 있다. 라집(羅什)이 그 순서를 바꾼 것은 그 나름대로 한역의 독립적 리듬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사상에 대한 한역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해석자에 따라 제멋대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의 개념적 이해는 비교적 명료한 것이므로 우선 그것을 해설해 보자! 모든 개념은 역사적 상황을 갖는 것이며, 이 네 개념은 기실 알고 보면 새로운 보살승운동이 기존의 그리고 당대(當代)의 모든 사념(邪念)들을 타파하기 위한 것으로서 설정한 대자적 개념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아트만(ātman)은 전통적 브라마니즘의 가치관의 부정이다.

그것은 브라마니즘이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상정한, 아트만이라고 하는 실체적 원리이며, 그것은 윤회(saṃsāra)의 주체인 것이다. 여기 아트만의 부정은 불교의 반()브라마니즘적 성격을 명료히 드러내는 것이다.

 

2) 다음, 사트바(sattva)는 초기대승불교의 자체 반성을 촉구하는 말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사트바는 곧 유정(有情)이다. 유정(有情) + 깨달음의 추구가 되면 그것은 곧 보살이 된다. 즉 보살(bodhisattva)과 중생(sattva)의 이원적 구분의 상()이 있어서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은 유정(有情, 중생衆生)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보살이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보살인 것이다. 중생과 보살이 따로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가 일승(一乘)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유정(有情)과 비정(非情)의 구분조차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지바(jīva)는 불교와 동시대에 흥기興起한 자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바(jīva) 혹은 지바아트만(명아命我)은 존재의 순수영혼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모든 생명에는 이 순수영혼인 지바가 실체로서 존재하며, 이 지바는 업()에 의하여 속박된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는 업을 바로 지바에 달라붙는 일종의 미세한 물질(pudgala)로 간주했다. 이 업물질(karma-pudgala)에 의해 지바는 때가 끼고 계박(繫縛)을 당한다. 따라서 자이나교의 추종자들은 이 업물질을 순수영혼으로부터 벗겨내는 고행(苦行)을 해야한다. 고행을 통해 이 때가 제거되면 순수영혼 지바는 순수한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상태가 곧 해탈(mokṣa)이요 열반(涅槃, nirvāṇa)이다. 그러나 대승사상은 이러한 사유의 전면부정이다.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엄존한다는 생각 자체가 무아론(無我論)에 위배되는 것이다.

 

4) 뿌드갈라(pudgala)는 소승 부파불교 중의 한 지파인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에 대한 비판으로 보여진다.

독자부이론은 바로 초기 불교의 고민거리였던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윤회의 주체로서 뿌드갈라를 설정했다. 뿌드갈라는 오온(五蘊)과는 다르지만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의 존재다. 이 뿌드갈라는 윤회의 업을 운반하는 자기동일체로서 인간에 대한 도덕적 수행의 요구의 존재론적 근원이 되는 것이다. 독자부의 뿌드갈라 이론은 명료한 아트만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뿌드갈라를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중간자적 존재로서 상정함으로써 실체의 오류를 최소화시키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윤회(saṃsāra)의 자기동일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실체론의 오류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부의 뿌드갈라 이론은 대승의 무아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인도불교가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홍명집(弘明集)같은 문헌에서 나타나는 신멸불멸논쟁(神滅不滅論爭)에서 불교가 무아론(無我論)의 입장과 상치되는 신불멸론(神不滅論)’의 입장을 고수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도 바로 당대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이 이 독자부(犢子部) 뿌드갈라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독자부(犢子部)는 뿌드갈라의 이론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pudgalavāda’라고도 불리운다.

 

이렇게 사상(四相)을 고구(考究)하면 사실 이 아()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는 무아론(無我論)의 네 개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를 말하는 중국인의 언어환경 속에서는 이것은 모종의 독자적 의미체계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에게 이 말은 하등의 정확한 원전적 레퍼런스를 동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상(四相)을 존재(存在)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한다. 먼저 아상(我相)이란 나라는 생각이다. 인상(人相)이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중생상(衆生相)이란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 저 죽어있는 돌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감이다. 수자상(壽者相)이란 시간의 존속을 가지는 모든 존재로 확대되어 나간다. ‘Ego Man Life Existence’의 실체관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    
  중생(衆生)  
수자(壽者)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아()와 인()을 한 쌍으로 보고, 중생(衆生)과 수자(壽者)를 한 쌍으로 보는 것이다. ()는 나요, ()은 타(). 내가 있다는 생각, 타인(他人)이 있다는 생각, 이것은 바로 실체적 사고의 전형이다. 즉 불타에게서 구원의 주체인 가 있고 구원의 대상인 가 있었다면 불타는 곧 자신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다. 보살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말 어원을 한어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하는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말의 짐승(즘생)은 곧 중생(衆生)’의 변행태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중생(衆生, sattva)은 유정을 통칭하며 유정의 개념에서는 식물의 외연이 빠진다는 나의 발언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우리말에 중생이 상말로 쓰일 때는 짐승의 의미가 내포된다.

 

중생상(衆生相)’이란 즘생(짐승) 같은 삶을 영위하는 뭇 인간들이다. 거기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수명(壽命)과 복락(福樂)을 구유한 고귀한 존재인 이다. 이렇게 보면 수자(壽者)와 중생(衆生)은 한 의미의 쌍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我相아상 人相인상
壽者相수자상 衆生相중생상

 

 

()현장(玄奘)의 번역대로 곧 ()’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요곧 생각인 것이다. ()가 있고 인()이 있고 중생(衆生)이 있고 수자(壽者)가 있다는 생각(), 그 모습()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살승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부처님은 문둥이! 십자가는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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