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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결론: 벼락경과 아상 버리기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결론: 벼락경과 아상 버리기

건방진방랑자 2021. 7. 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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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벼락경과 아상 버리기

 

 

여기서 아예 결론을 내버리는 것이 좋겠군요. 여러분들께서 제 금강경강해를 읽으셨다는 전제하에서 아예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동일한 주제를 전달하는 대승경전인데, 금강경의 주제는 초장에 이미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있습니다.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열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불타가 말합니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예수가 말합니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사람들의 죄업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다. 그러나 나는 실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불타는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구문명은 영원히 유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치하다(childish)’하는 것은 열등한 도그마의 절대적 선을 주장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서구역사에서는 진정한 혁명이 불가능합니다. 정치적 혁명이 성공한다 해도 곧바로 기존의 도그마로 회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타나 예수나, 그들의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위대성은 단 하나! ‘아상(我相)’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승은 전혀 초기불교ㆍ부파불교와는 다른 갈래에서 나온 매우 혁명적인 새로운 교설이었지만 결국 무아(無我)’라는 이 한 가르침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무한한 혁명을 수용합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불교가 무한한 혁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최초의 원초적 핵심에 불교가 이래야만 한다는 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혜의 완성’ ‘지혜의 배를 타고 피안으로 고해를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바로 아상(我相)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이라는 번역어가 나올 때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은 없었습니다. ‘금강경다이아몬드 수트라라고 영역하는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금강은 금강저를 말하는데 그것은 희랍의 제신 중의 대왕인 제우스가 휘두르는 무기나 인도신화에 나오는 바즈라(vajra)’라는 것인데, 그것은 벼락(thunderbol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실제로 벼락경’ ‘벽력경(霹靂經)’으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멸집(滅執)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벼락을 보통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죠.

 

 

  벼락
 

집착
대상

 

 

그러나 금강경』 『반야심경(般若心經)이 말하는 멸집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벼락
   

집착
대상

 

 

벼락이 나에게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죽습니다. 나는 가루가 되어버립니다. 벼락을 맞아 가루가 된 나!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오온(五蘊)해체된 나, 그것을 바로 ()’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온 그 자체가 공이지요.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항상 아상(我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최소한 이런 계율은 지켜야지’ ‘나는……지혜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상을 죽이는 수행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계율이기는 하지만 타율적 수율(守律)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기수련입니다. 예수도 구세주라는 아상을 가지고 있다면 구세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학자들도 예수가 십자가상에 울부짖은 한마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אלי אלי למה סואחטאני,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기부정의 인간이었다는 것이죠.

 

과연 아상을 버린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무아는 아트만의 부정이다! 아트만의 부정은 실체의 부정이다! 이런 말을 천만 번 뇌까려도 그 의미가 뼛속 깊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무 살 초경에 광덕사 변소깐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260자와 석 달 동안 진검대결을 벌인 후에 제가 쓴 오도송 하나를 여기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쓴 최초의 오도송은 한문이 아닌 순한글로 썼습니다. 그것도 일곱 자입니다.

 

나는 좆도 아니다.

 

 

이것이 나의 오도송의 전부입니다. 아 씨발 나는 좆도 아니다. ……

이런 아주 비근한 의식 속에서 나는 향후 50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평론을 한 것을 가지고 고소를 당하고 경찰서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의 오도송은 여전합니다. 나는 좆도 아니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피 흘린 가없는 중생들, 좆도 아니라고 무시당한 수없는 이 민족의 원혼들을 달랠 수가 있다면 좆도 아닌 내가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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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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