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통해 나를 찾고 확장하라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신체를 조성(造成)한다.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 그런 소명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사명이 되었다. 그건 어느 하나의 일에 매진하도록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을진 모르지만, 결국 그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나 이뤄지고 난 후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쯤에서 무엇을 생각해보려 하는 것일까?

프로그램화된 교사의 경로
불행히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기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잣대, 그리고 우리가 되고 싶은 이미지, 가장 갖고 싶은 것, 최고로 생각하는 가치 등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그것들은 어느샌가 우리 머릿속에 프로그램화된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비추어 다른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프로그램이 입력되는 과정은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실존하는 방식 그 자체이므로 완전히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다.
-고병권,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42쪽
내가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어느 사회적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찌하다 보니 사범대에, 안정적이라는 말을 따라 사범대에 온 경우가 많다.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망각한 프로그램화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리라. 그런 프로그램화된 신체로 사범대에 왔고 그 커리큘럼을 잘 마무리하여 교사가 되려 한다. 이런 이가 교사가 된 다음에 학생들에게 강요할 것은 뻔하다. 바로 ‘현실 체제에 잘 순응하라는 것’, ‘그것을 벗어나면 실패의 고통만 있을 거라는 것’ 이리라.
하지만 우린 이때까지 내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음을 상기하자. 주위의 여건들이 날 교사가 될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램화 시켰고 결국엔 그게 나의 주어진 소명인 양 합리화하며 그 루트를 충실히 따라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목표가 하나로 정해졌으니 무섭도록 요령 익히기 공부만을 한다. 그리고 합격하고 나선 그 삶의 분위기에 맞춰 살아갈 것이다. 우린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늘 반복되는 행동만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하는 기계의 일상과 다를 바 없잖은가.

경로를 벗어나기 위한 발걸음
그렇기 때문에 우린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의 조건부터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길, 프로그램화된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실존의 문제를 대입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내가 지닌 생각조차 프로그램화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나라고 규정했었던 수많은 자의식들 또한 허구임을 알아야 한다. 타자화된 자화상, 나라는 실체가 국가에 귀속되어 국가적인 자화상이 투영되었으며, 화폐에 귀속되어 자본만능주의의 자화상이 투영되었으며, 분과화된 학문에 귀속되어 우물 안 개구리의 자화상이 투영되었으며, 종교에 귀속되어 난 특별하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적 자아가 투영되었다. 그런 총체적인 자화상들이 모여 나의 실체를 이루는 고로, 지금의 나의 생각과 나의 사고, 그 모든 것은 나 자신의 본래면목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린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고 절대적인 자화상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애초부터 우리의 본래면목은 없었으므로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것은 ‘천국’이란 내세를 규정하고서 희구하는 것과도 같을 뿐인 것이다. 또한 나만의 자의식을 구성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난 저 사람과 이런 것들이 달라’라고 규정되는 것이 곧 자신의 자화상이 되는 까닭에, 나 자신을 규정할수록 타인과 경계를 만들며 사회와 격리될 뿐이다. 그건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자아정체감의 혼란 속에 극복하려 하지 않고 회피를 거듭하였던 것과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자아정체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신념임을 안다면 그걸 과감하게 허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나를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이 다른 나를 만드는데 제약으로 다가온다. 이제 나는 나를 바꾸어줄 방대한 정보와 네트를 가진 다른 신체와의 만남을 꿈꾼다.
-고병권,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48쪽
우린 현실에 기반하여 삶을 사는 인간이다. 그 현실이 우리를 프로그램했고 지금껏 살아오게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오류를 알았다고 하여 현실을 박차고 나갈 수 있을까? 그건 죽으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린 어떠한 방법을 통해 이 제약들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는가? 그건 바로 다른 신체와의 접속을 통해 신체의 변이를 유도할 때 가능하다. 들뢰즈식으로 이야기하면 ‘되기’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과의 차이를 전제한 신체와의 능동적으로 신체의 변이를 조성해 나갈 때 우리에게 짐 쥐어졌던 모든 체제들 또한 허물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행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지금 못하는 것들은 나중에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며 위로를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나 그건 한심한 소리이다. 미래로 미뤄둔 행복은 결코 오지 않으며 그 미래가 현재가 되는 순간 또다른 미래로 미뤄지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예전 거기’에서나 ‘미래의 저기’엔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속하며 공부 그 자체를 즐기자. 그리고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보고 그 물음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하자. 난 지금 공부하고 있다. 물론 공부가 재밌으니깐 한다. 그리고 맘껏 사유할 수 있으니깐 한다. 그리고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물론 안정적이니까. 그리고 학생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광경을 볼 수 있으니까. 정말 생각 같아선 분교에 발령 받아 다기세트를 구입해서 아이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만남을 유도하고 싶다.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 보면 원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고미숙, 『호모 쿵푸스』, 그린비출판사, 2007년, 177p
확장의 기본은 내가 능동적인 신체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 신체가 되기 위해선 더욱 즐기며 공부해야 할지니, 공부와 지식의 본래면목은 즐거움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 즐거움 속에서 얻은 지식만이 우리의 삶을 살찌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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