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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건방진방랑자 2021. 6. 3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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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우리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아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이다.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선을 행해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1. 보편적 앎에 대한 장자의 비판

 

 

1. 나를 대상화하는 문제점

 

 

철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설명(explanation)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런 보편성과 합리성을 회의하면서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을 기술(description)하려는 철학이다. 앞으로 편의상 전자를 합리적 철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기술적 철학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물론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주어진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적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합리적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야만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할 합리적 체계를 모색하고 이것을 도달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하는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합리적 철학도 설명적인 합리적 철학과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설명(explanation) 기술(description)
세계와 인간의 포괄적 설명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 기술
합리적 철학 기술적 철학
설명적인 합리적 철학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  

 

 

장자의 철학은 분명 합리적 철학이라기보다는 기술적 철학에 가깝다. 장자철학의 이런 성격은 그가 항상 반복적으로 우리의 앎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데 그쳐야 지극한 것이다[知止其所不知, 至矣]’라고 말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이런 장자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는 청년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정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자의 철학은 기술적 철학을 넘어서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기술적 철학은 나에게 주어지는 경험들을 기술하는 데에서 그칠 뿐이다. 그러나 앞서의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장자의 나는 혼탁한 물[濁水]과 같은 마음을 가진 나와 맑은 연못[淸淵]과 같은 마음을 가진 나, 즉 인칭적인 나와 비인칭적인 나로 나누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전자의 나가 경험하는 것과 후자의 나가 경험하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어진 경험을 기술하는 내용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엄격하게 말해서 장자는 비인칭적인 나가 경험하는 사태를 기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맑은 연못과 같은 마음, 즉 비인칭적 마음은 기본적으로 기술의 전제인 인칭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음에는 기술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 보자면 비인칭적 나는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실천적인 문맥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경우 기술(description)이라는 거리둠은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비인칭적인 나를 기술하지만 이것은 항상 인칭적인 나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글라이더를 탄 내가 바람과 분리 불가능한 소통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행글라이더가 바람인 듯 바람이 행글라이더인 듯 움직이고 있다. 만약 이런 비인칭성의 상태를 기술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내가 나 자신을 대상화하자마자 나는 바람과의 분리 불가능한 공존의 흐름에서 이탈하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곧 추락하고 말 것이다.

 

 

 

 

 

2. 세 가지 인식론을 비판하다

 

 

합리적 철학에 대한 장자의 비판이 가장 분명하게 전개되어 있는 편이 바로 제물론(齊物論)편이다. 그가 얼마나 합리적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설결(齧缺)이 스승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同是]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 “吾惡乎知之!”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子知子之所不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 “吾惡乎知之!”

 

그러면 사물이란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然則物無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 “吾惡乎知之! 雖然, 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耶?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耶?”

 

 

위의 대화를 읽어 보면 설결이 왕예에게 물어본 세 질문들에 대해, 왕예는 단호하게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는 마치 장자가 지금 왕예의 입을 빌려서 인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근본적인 회의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예의 이어지는 언설을 통해 우리의 이런 표면적 인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우선 설결의 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자. 그의 첫째 질문은 일반성(generality)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에게 동시에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同是]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인식주관을 떠나서 모든 인식주관이 동의할 수 있는 진리가 있느냐는 객관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모르겠다고 왕예가 대답하자 설결의 둘째 질문이 이어진다. 이 둘째 질문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반성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모르겠다고 왕예는 대답한다.

그러자 설결은 셋째 질문을 통해 근본적 회의주의가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왕예는 부정하고 있다. 결국 장자는 왕예의 입을 빌려서 객관적 인식, 반성적 인식, 근본적 회의주의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첫 번째 질문 일반성(generality)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질문
두 번째 질문 반성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
세 번째 질문 근본적 회의주의가 가냥하냐는 질문

 

 

장자는 왕예의 입을 빌려서 언어가 자신의 의미대상과 필연적 관계를 지닐 수 없다는 원론적 이야기를 반복한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안다고 한 것이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자신이 모른다고 한 것이 아는 것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말은 안다[]는 것과 모른다[不知]는 것은 언어의 대대[待對]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뿐이라는 함축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언어의 대대 관계란 개념들이 상호 차이와 배제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선의 의미는 악의 의미에 의존하고, 따라서 악이 아니다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장자는 지금 안다는 것도 모른다는 개념과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을 뿐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이 정도의 지적만으로 우리는 장자가 무슨 근거로 세 가지 인식론적 입장을 비판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3. 객관적인 옳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그의 입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자.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는가?”

民濕寢則腰疾偏死, 鰌然乎哉? 木處則惴慄恂懼猨, 猴然乎哉? 三者孰知正處? 民食芻豢, 麋鹿食薦, 蝍且甘帶, 鴟鴉耆鼠, 四者孰知正味? 猨猵狙以爲雌, 麋與鹿交, 鰌與魚游.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이 이야기는 왜 장자가 객관적 인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객관적 인식 혹은 사유는 객관적으로 옳은 것[同是]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장자는 올바른 거주지’, ‘올바른 맛’, 그리고 올바른 아름다움을 예로 들면서 객관적 인식은 우리가 자임하는 것처럼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장자에 따르면 사람ㆍ원숭이ㆍ미꾸라지ㆍ새 따위는 각각 자신의 종에 따라 선호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두가 옳다고 동의하는 객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인식주관과 관련되지 않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의 의미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수영은 좋은 운동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 사람은 수영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좋아졌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수영을 배우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만약이 사람이 귀에 염증이 있는 사람에게도 이런 주장을 권고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귀에 염증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믿고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장자가 우리에게 주는 권고는 모든 인식과 진리가 삶이라는 구체적 문맥에서 의미 있는 것이지 결코 모든 문맥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 반성적 인식의 한계

 

 

다음으로 반성적 인식과 근본적 회의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다른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새벽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새벽에 (즐겁게) 사냥을 하러 나간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완전히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자세하게 인식하고 있는 척하며 왕이시여!’ ‘하인들아!’라고 말하는데, 진실로 교정할 수 없을 정도로 고루한 사람들이구나! 나와 당신도 모두 꿈이고, 당신을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도 또한 하나의 꿈이다.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 牧乎!” 固哉! 丘也與女皆夢也, 予謂女夢亦夢也.

 

 

사유와 인식의 기저에는 의식의 자기동일성,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유와 인식은 파편화되고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에 있는 의자가 의자라는 것을 인식하거나 사유한다는 것, 즉 의자가 의자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전자(주어로서의 의자)를 의식하는 나와 후자(의자라는 술어)를 의식하는 나가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자기로의 복귀, 즉 인칭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한 것일 수 있을까? 단지 과거의 나나 현재의 나는 모두 나라는 용어로 자신을 지칭했다는 점에서만 같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항상 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에 내가 자기동일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의 나, 고등학교 때의 나, 대학교 때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나아가 노인이 되었을 때의 나는 과연 같은 것인가? 이 모든 경우에 나로 지시되는 것은 같은 인격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지 문법적인 착각(grammatical illusion)일 뿐이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은 자서전이라는 것을 쓴다. 자서전은 이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희박해졌을 때 회고적으로(retrospectively) 쓰는 글이다. 자서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나일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 밑에서, 몇 번째로 태어났다든가, 아니면 나는 어느 학교에 가서 어느 선생을 만났다든가, 혹은 나는 누구를 만나서 결혼했다는가 등등. 그러나 자서전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것은 자신이 만난 타자들에 대한 기록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타자와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떻게 다르게 생성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자서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서전은 자신이 만난 타자들과 그로부터 기원하는 나 자신의 생성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서전의 진정한 주인은 나가 아니라 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란 단지 비어 있는 형식, 타자들이 묵고 돌아가는 여인숙과 같은 곳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동일성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고, 목동이라고 불리던 나도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나의 본질적인 자리인 양 착각하면서, ‘나는 왕이다라든가 아니면 나는 목동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기본적으로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인칭성을 근거로 우리는 반성을 한다. 장자는 그것을 꿈꾸고 있으면서 그 꿈속에서 꾼 꿈의 의미를 점친다는 비유로 분명하게 밝혀준다. 꿈꾸고 있는 나는 인칭적인 나이고, 꿈속에 꾼 꿈의 의미를 헤아린다는 것은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이다. 장자가 보았을 때 이것은 단지 자신의 꿈을 무한히 증식시킬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그 다음에 이것을 반성해보고 또 그 반성을 반성해보자. ‘나는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안다.’ 등등. 이처럼 반성이 아무리 심오해 보여도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인칭적인 나가 자리를 바꾸면서 반복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5. 장자의 회의주의는 합리적 철학의 허구성을 비판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장자는 근본적 회의주의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표면적 평가는, ‘깨어난 후에야 자신의 인식이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는 장자의 말에서, 여지없이 부서진다. 장자는 깨어남[]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자기충족적인 언어와 인식의 닫힌 체계로부터,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단서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장자가 권고하는 깨어난 상태는 맑은 연못[淸淵]과도 같은 마음, ‘나는 나다는 생각을 제거한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렇다면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장자의 회의주의는 하나의 학설로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치료적(therapeutic)인 기능을 수행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장자의 회의주의는 단지 합리적 철학이 주는 허구적인 보편성만을 문제삼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합리적 철학은 삶의 유한성과 문맥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꿈과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어구(列禦寇)편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는 이런 장자의 정신을 재미있게 비유하고 있다.

 

 

주팽만(朱泙漫)이라는 사람은 지리익(支離益)이라는 사람한테 용을 잡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 수업료로 천금이 나가는 집을 새 채나 팔았다. 그러나 기술을 습득한 다음에는 그 기술을 쓸 곳이 없었다.

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技成而無所用其巧.

 

 

 

 

 

 

2. 나는 누구인가?

 

 

1. 주체란 초자아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한다

 

 

어느 여성이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립스틱을 바른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모습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을까? ‘거울 속의 모습=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 속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3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불가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거울 안의 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결코 자리잡을 수 없는 그 제3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지만 상상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이 제3의 자리는 상상된 자리(= 믿음의 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제3의 자리를 바로 초자아(superego)의 자리라고 부른다.

 

이 초자아의 자리는 우리가 공동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내면화한 규칙의 자리다. 이 내면화된 규칙을 통해서만 나는 나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들로 분열되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내면화된 규칙으로서의 초자아, 이 규칙을 적용하는 나, 그리고 이 규칙의 적용 대상인 나, 나는 최소한 이렇게 세 가지 차원의 나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장을 하는 여성은 아름다움의 내면화된 기준인 초자아, 화장을 바르는 나, 화장을 당하는 나로 분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화장하는 여성의 초자아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이 여성이 결코 화장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장을 한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아름다운 얼굴로 변화시키는 행동인데, 위의 여성의 경우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거울을 바라보는 그 여성의 시선은 결코 그녀 자신의 시선이 아니라 제3자의 시선, 즉 내 안에 내면화된 공동체의 미적 규칙이라는 시선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공동체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화장한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화장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아름다움과 추함[美醜]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그것은 선함과 악함[善惡]이나 참과 거짓[眞僞]에도 모두 통용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탐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며, 진리를 구하려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규칙인가?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오히려 잘못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라는 주체는 결국 최소한 세 가지 차원에서의 분열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차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거된다면 나는 나로서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주체란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결국 주체란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어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내면화하게 되었을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그것이 우리에게 가해진 공동체의 폭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우리는 주체로서 탄생하기 위해서 공동체적 규칙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우리는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선악의 규칙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과연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초자아를 기존의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한 인간이란 동물의 자기 배려라고 이해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가 아니면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초자아를 공동체의 폭력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란 동물의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타인들의 애정과 관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라깡(J. Lacan)에 따르면 갓난아이 때부터 우리는 타자가 원하는 대상, 즉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한다. 우리에게 최초의 타자는 물론 어머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나를 낳아준 어머니일 이유는 전혀 없다. 단지 아직 걷지도 못하고 먹이를 스스로 구하지도 못하는 나를 보살펴주고 돌봐줄 수 있는 그 누구라도 이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 어쨌든 타자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그 타자를 지속적으로 유혹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타자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최초의 타자인 그 어머니는 나를 계속 사랑할 것이고 따라서 내게 안정과 평화를 계속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초의 타자, 즉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갓난아기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만약 아이가 울 때마다 안아주면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슬프게 우는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만약 아이가 웃을 때마다 안아주면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밝게 웃는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라고 상상된 것이 그 아이에게는 최초의 초자아로 등장하게 된다. 이 경우 아이의 초자아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서 아이는 주체로 만들어지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란 기본적으로 분열된 존재다. 달리 말하면 주체는 초자아에 입각해서 자신을 초자아에 맞게 가꾸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3.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아이가 더 자라게 되면, 이제 이유식을 떼고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김치 등의 음식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불쾌하겠는가? 그럼에도 그 아이는 먹게 된다. 왜냐하면 김치를 먹는 자신을 어머니는 우리 아기 이쁘구나, 김치도 잘 먹고!”하면서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머니라는 타자를 통해 그 타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공부 잘하는 자신을 욕망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공부 잘하는 자신으로 만들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억지로하지 않는 것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한 극단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자가 욕망한다고 상상한 것에 맞게 만들어온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직접 욕망한다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욕망의 기원을 따라 분석해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만났던 타자들이 원하던 것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욕망할 수 없다. 라깡의 말대로 우리는 항상 타인이 욕망하는 것만을 욕망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첫 번째, 우리는 결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재로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우리가 상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회한에 가득 차서 중얼거리곤 한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했는데,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두 번째, 타인의 욕망마저도 다른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타인이 욕망하는 것은,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그 자신이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결국 주체란 상상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이 타자가 원한다고 상상한 모습을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아무리 변형시켜 보았자, 우리는 결코 타자가 원하는 모습을 실재로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자가 원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상상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가 만든 자신도 상상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은 이처럼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꿈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이런 꿈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 그들과 관계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꿈, 그들의 초자아와 관계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가 만나는 타자들도 자신들의 초자아를 매개로 나와 관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엄연한 현실적인 문제다. 만약 어떤 타자와 충돌을 한다면 그것은 그 타자의 초자아와 나의 초자아의 충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떻게 충돌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확히 말해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의 철학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이유가 이것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장자는 이런 불가피한 타자와의 충돌을 외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삶의 조건으로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과연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3. 공동체에서의 삶

 

 

1. 비합리적으로 보이던 타공동체의 풍속들

 

 

공동체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들을 가지고 유지되어 왔다. 봉건시대에서 여자가 재혼하는 것은 악으로 그리고 여자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선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의 재혼을 권장하는 것이 선이고, 여자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상이한 규정들과는 달리 모든 공동체들이 기본적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공유하고, 이 구조에서 자신들이 선이라고 부르던 내용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모든 공동체들의 규칙은 내용은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보면 모든 공동체의 선/악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떤가? 우리는 특정 공동체에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특정한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규칙은 엄연한 현실적 물리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부일처제라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 현실일 뿐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 생각을 현실화해서 일부일처제를 어기고 몇 명의 아내를 가진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바로 법의 제재를 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탄(指彈)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내편」 「인간세(人間世)편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분석을 피하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장자가 공자의 입을 빌려서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이야기다.

 

 

세상에는 지킬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이고, 다른 하나는 의().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명이므로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인데 어디를 가나 임금이 없는 데는 없다. 하늘과 땅 사이 어디를 가도 이 두 가지를 피할 수는 없기에 이를 크게 경계할 것[大戒]’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녀가 언제 어디서나 부모를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고, 신하가 언제 어디서나 임금을 편안하게 섬기는 것이 충의 성대함이다. 자기 마음을 부릴 때 슬픔과 기쁨이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말고, 불가능한 일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운명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지극함이다. 신하나 자식 된 사람이 부득이한 일을 당하면 사물의 실정에 맞게 행하면서, 자신을 잊어버려야 한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天下有大戒二: 其一命也, 其一義也. 子之愛親, 命也, 不可解於心; 臣之事君, 義也, 無適而非君也, 無所逃於天地之間. 是之謂大戒. 是以夫事其親者, 不擇地而安之, 孝之至也; 夫事其君者, 不擇事而安之, 忠之盛也; 自事其心者, 哀樂不易施乎前,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德之至也. 爲人臣子者, 固有所不得已. 行事之情而忘其身, 何暇至於悅生而惡死!

 

 

분명 장자는 지금 충효(忠孝)라는 유가적 이념을 따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의 초탈과 자유를 강조하는 철학자로 장자를 이해하고 있던 기존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조릉에서 터득한 장자의 깨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릉에서 장자는 다른 곳의 풍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곳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入其俗, 從其令]”고 깨달았었다. 이런 깨달음은 사실 진부한 것 같지만 그 함축하는 뜻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면 그 공동체의 규칙들이 처음에는 비합리적이고 기이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길러준 공동체의 규칙에 길들여져서 그것만이 자명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의 형식이 보편적이라고 맹신하면서 살고 있다.

 

 

 

 

2. 타자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속한 공동체가 드러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는 물이나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도 의식하지 않지만, 물 바깥에 나와서는 물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물고기라는 것을 의식한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공동체와 조우해야만 한다. 문제는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에 병적으로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우스갯소리로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애국자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애국자와 다른 나라를 미워하는 것은 동시적인 사태다.

 

조선말기에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온 적이 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의 삶의 규칙인 제사를 금기시했고, 기독교적인 삶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선교사들과 기독교도들은 조선정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지금 우리는 선교사들의 이런 죽음을 순교라고, 혹은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구화된 결과로 인해 이런 사후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 만약 우리가 유교사회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이들은 여전히 죽어 마땅한 금수들로서 간주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죽은 선교사들과 구별되는 사람이 바로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왔었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왜냐하면 이 사람은 중국의 유교적 삶의 규칙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 마카오에서 오랫동안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문화를 익혔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어떤 특정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어려서 늑대 곁에서 자랐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늑대라는 공동체의 삶의 규칙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이 인간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의 경계는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서나 타자와 만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공동체를 상이하게 의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단지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서 사후에 확인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는 크게는 인간과 동물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 철학과 물리학 사이, 가족과 가족 사이의 차이에서 사후적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인간 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미국문화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한국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전라도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물리학자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철학자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속한다고 자임하는 공동체는 항상 우리가 어떤 타자와 만나느냐에 의해 사후에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806년 어느 프랑스 화가의 판화 작품으로, 제목은 한국의 남녀.

 

 

 

3.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장자의 탁월한 점은 충효라는 유가적 이념이 비록 꿈과 같이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특정 공동체에서는 현실적인 물리력을 갖는다는 것을 그가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다. 충효가 삶의 규칙인 공동체에서 충효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만약 그 공동체의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동체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을까?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우리는 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산 속에서도 다른 삶의 규칙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산 속에서도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의 법칙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달생(達生)편에 실려 있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전개지(田開之)가 주()나라 위공(威公)을 보자 위공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축신(祝腎)은 양생(養生)을 배웠다 합니다. 선생께선 축신과 함께 배웠다는데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田開之見周威公, 威公曰: “吾聞祝腎學生, 吾子與祝腎游, 亦何聞焉?”

 

전개지가 말하였다. “저는 비를 들고서 뜰 앞에서 시중을 들었을 뿐이니 선생님으로부터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田開之曰: “開之操拔篲以侍門庭, 亦何聞於夫子!”

 

위공이 말하였다. “선생은 너무 겸손하십니다. 나는 듣고 싶소이다.”

威公曰: “田子無讓, 寡人願聞之.”

 

전개지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 중 뒤지는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開之曰: “聞之夫子曰: ‘善養生者, 若牧羊然, 視其後者而鞭之.’”

 

위공이 말하였다. “무슨 뜻이지요?”

威公曰: “何謂也?”

 

전개지가 말하였다. “()나라에 선표(單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위 굴 속에 살면서 골짜기 물을 마시고 지냈습니다.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나이가 70이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빛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버렸습니다. 또 장의(張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어디에나 뛰어다니며 사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40세에 열병에 걸려 죽어 버렸습니다. 선표는 그의 속마음을 길렀으나 그의 외형을 호랑이가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장의는 그의 외부와의 사귐을 잘하였으나 그의 내부에서 병이 그를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중 뒤지는 놈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田開之曰: “魯有單豹者, 岩居而水飮, 不與民共利, 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 不幸遇餓虎, 餓虎殺而食之. 有張毅者, 高門縣薄, 無不走也, 行年四十而有內熱之病以死. 豹養其內而虎食其外, 毅養其外而病攻其內. 此二子者, 皆不鞭其後者也.”

 

 

사실 이런 모든 한계 상황들은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외적인 것과 관계해야만 하는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도 아니며, 자신의 실존을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substance)도 아니다. 중국 위진(魏晋) 시대에 현학(玄學)이라는 풍조가 있었다. 한마디로 이 풍조는 정치 및 사회와 관계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시나 지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학이 추구하였던 자유는 허구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당시의 정취를 그린 중국화를 보면, 현학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꽃이 가득 핀 들판에 나가 뜻이 맞는 친구들과 화사한 얼굴로 술을 마시는 그림들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그림을 살펴보면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날라다주는 하인들,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아주 작게나마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들은 호족들이었던 것이고, 이런 경제적인 풍족함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발제 원문의 후반부를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불가피하게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방법으로 장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선을 행해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행해서는 안 된다[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선한 사람으로 유명해지거나 악한 사람으로 벌을 받아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지금 속한 공동체의 규칙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왜냐하면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의 운신의 폭은 그만큼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가 그만큼 부자유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마련이다. 선한 사람 혹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유명해지면 우리는 자신이 마치 주체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인격자나 혹은 본질적으로 천재인 줄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런 나는 공동체의 규칙을 자신의 규칙인 양 잘 따르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우리가 악한 행위로 공동체의 처벌을 받게 되면, 우리는 전과자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살거나 아니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게 된다. 결국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유명해지게 되면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는 자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게 될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부자유스럽게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장자의 진단이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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