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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인 - 등조령(登鳥嶺) / 등조점(登鳥岾)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유호인 - 등조령(登鳥嶺) / 등조점(登鳥岾)

건방진방랑자 2019. 5. 2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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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에 올라

등조점(登鳥岾)

 

유호인(兪好仁)

 

 

凌晨登雪嶺 春意政濛濛

능신등설령 춘의정몽몽

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

북망군신격 남래모자동

蒼茫迷宿霧 迢遞倚層空

창망미숙무 초체의층공

更欲裁書札 愁邊有北鴻

갱욕재서찰 수변유북홍 㵢谿集卷之五

 

 

 

 

해석

凌晨登雪嶺 春意政濛濛 새벽을 타고 눈 내린 새재에 올랐지만 봄의 뜻이 정히 뿌옇네.
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 북으로 바라보니 군신 간이 막혀 있고 남으로 오니 모자가 함께 하네.
蒼茫迷宿霧 迢遞倚層空 아득하여[蒼茫] 묵은 이슬에서 헤매고 아스라이[迢遞] 층층의 허공에 기대네.
更欲裁書札 愁邊有北鴻 다시 편지 쓰려 하지만 근심의 끝에 북쪽 기러기 있네. 㵢谿集卷之五

 

 

해설

이 시는 조령에 올라 지은 시로, 임금에 대한 충성과 어버이에 대한 효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이와 관련된 일화(逸話)가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호인이 성종조(成宗朝)에 문장을 잘한다 하여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어버이가 늙어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므로, 수찬으로 있다가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있다가 의성(義城) 원에 제수되었으며, 최후에는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또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그 모친을 서울로 태워 오게 하였는데, 병들어 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이조에 내리기를, ‘호인은 어버이 섬길 날이 짧으니, 그 고향 이웃인 진주 목사로 제수하라.’ 하였는데, 이조에서 아뢰기를, ‘진주 목사를 까닭 없이 중간에 갈아서 법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마침 결원된 합천으로 제수하였다. 호인이 비록 외직에 있었으나, 임금이 그로 하여금 해마다 저술한 시문(詩文)을 초록하여 올리게 하고는 그때마다 표창하여 장려하였으며, 그의 모친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었다. 당시 매계(梅溪) 조위(曹偉)도 역시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갔었는데, 호인과 같이 임금의 총애를 입어 보통 사람과 특이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兪好仁在成廟朝, 以文章最承恩寵. 親老乞養, 由修撰除居昌, 由校理除義城, 最後以掌令, 又乞歸養, 上使之輦母來京, 病不能致. 御札下詮曹曰: ‘好仁事親日短, 可除其隣晉州牧使.’ 銓曹辭: ‘以不可無故經遞, 以毀成憲.’ 乃待陜川闕除之. 好仁雖在外任, 上令歲抄錄進所著詩文, 輒褒美賜母食物. 時曹梅溪偉, 亦爲養補外, 與好仁同被睿渥, 逈出常數, 人皆榮之.].”

 

비슷한 이야기가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4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극기(克己), 호는 뇌계(㵢溪)로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성종 때 급제하였다. 시를 지으면 맑고 고우며 단아하고 건실하여 성종에게 매우 중망을 받아 저술한 것을 등사하여 바치게 하였다. 일찍이 장령이 되었다가 어버이가 늙음으로 인하여 합천 수령으로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어버이를 위하여 봉양하기를 주청하여 수찬에서 산음 수령을 제수받고, 교리에서 의성(義城) 수령을 제수받고, 최후로는 장령으로서 또한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주청하였다. 임금께서는 그의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서 서울에 오게 하였으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니, 임금은 어찰(御札)을 이조에 보내어 이르기를, ‘호인(好仁)은 어버이 섬길 날이 짧으니 그 이웃인 진주(晉州) 수령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조에서는 까닭 없이 바로 갈면 기존의 법과 어긋나므로 불가하다고 아뢰니, 이에 합천(陜川)의 수령이 비게 됨을 기다려서 이를 제수하였다. 임금께서, 지은 시문을 기록해서 올리게 하여 곧 칭찬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리시니, 사람마다 영광스럽게 여겼다. 성종께서는 글을 좋아하시어 유림을 사랑하고 권장하시어서 한때 문장으로 으뜸이요, 걸출한 선비들로 홍문관을 빛나게 하였는데, 호인이 늙은 어버이를 봉양한다는 것으로 외직을 주청하여 나가게 되었다. 일찍이 올린 시고(詩稿), ……하는 구절이 있었다. 임금께서 조용히 칭찬하며 읊조리기를, ‘호인은 몸은 비록 외지에 있으나 마음으로는 임금을 잊지 않고 있구나.’ 하였다[高靈人, 字克己, 號㵢溪, 受業於佔畢齋門下. 我成廟朝登第. 爲詩淸厲雅健, 大爲成廟所重, 常令繕寫所著以進. 嘗爲掌令, 以親老守陜川而卒. 有集行于世. 爲親乞養, 由修撰除山陰, 由校理除義城, 最後以掌令又乞歸養. 上使之輦母來京, 病不能致, 御札下銓曹曰: ‘好仁事親日短, 可除其隣晉州.’ 銓曹辭以不可無故徑遞以毀成憲, 乃待陜川之闕除之. 上令錄進所著詩文, 輒褒美, 賜母食物, 人皆榮之. 我成廟好文, 寵奬儒林, 一時文章魁傑之士, 彪炳玉署, 好仁以親老乞外. 嘗進詩稿, 有北望君臣隔南來母子同之句. 上從容賞詠曰: ‘好仁身雖在外, 心不忘君矣.’].”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13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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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력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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