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13. 지인용(知仁勇)
이 도덕적 덕성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知)·인(仁)·용(勇)이라는 겁니다. 지(知)·인(仁)·용(勇)의 문제에서 주자는 지(知)·인(仁)·용(勇) 각각을 다른 어떤 것에다가 대입시키고 있는데, 중용(中庸)의 저자는 대입관계에서 이 말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 앎, 지(知)
지(知)라고 하는 것은 지식(knowledgy)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에 차별성을 두지 않아도 좋겠으나, 굳이 분별을 한다면, 지혜와 지식이 서로 대적적인 관계는 아니면서도 반비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증가하면 지혜가 줄어들고, 지혜가 늘어나면 지식이 불필요해지게 되는 것이죠. 점점 지식에 대한 갈망이 적어진다는 겁니다. 지식과 지혜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식은 부분적인 앎이지만 지혜는 전체적인 앎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항상 전체를 파악하는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앎이 폐하리라”, “내가 어리숙하고 미숙할 때는 거울을 보는 듯이 희미했으나, 장성하여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같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사랑은 성내지 아니 하며,.”은 사실 이 ‘사랑장‘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요.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거울이 아니라, 청동거울[銅鏡]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옛날에 아무리 청동거울을 빤질빤질하게 잘 만들었어도 거기에 비친 모습은 부옇고 희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어렸을 적에는 (청동)거울로 보는 것 같이 모든 것이 부옇게 흐릿했으나, 장성하여 지혜가 들고 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막바로 보는 것처럼 명백해졌다”는 말입니다. 고린도는 희랍의 도시 이름으로서(코린트식. 이오니아식. 도리아식 할 때의 그 코린트를 말한다), 그곳은 유명한 거울생산지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코린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다가 그곳 사람들이 잘 알아들 수 있도록 거울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죠.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보게 하는 힘이요, 부분적인 앎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왜 온유하고 참느냐, 전체를 보기 위해서 온유하고 참고 시기하지 말고 그러라는 겁니다.
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제대로 해석하는 목사를 여태 본 적이 없어요. 고전을 모르니까 그렇지요. 그저 한다는 소리가 “사랑은 온유하다, 남편이 화낼 때 참고 어쩌고, 서로 싸우지 말아라 그게 사랑이다” 맨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해석을 하고 있으니 성경이 제대로 눈에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고전학을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사랑이죠. 사도 바울이 쓴 사랑이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항상 전체를 보는 눈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이 없어도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사실은 많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지식은 없을지라도 삶의 본질을 터득하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습니다!
민감성의 인(仁)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센시티비티(sensitivity)이고, 용(勇)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용기입니다. 뒤에 나오는 지·인·용에 대한 설명문장을 보면, ‘호학근호지 력행근호인 지치근호용(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이라고 했는데, 지(知)와 인(仁)을 풀어 설명하면,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전체적 앎으로의 나아감이고, 힘들여 행하는 것이 인(仁)이다”는 말입니다. 실행하는 것, 실천하는 것은 센시티비티가 없으면 못합니다. 걷는 것조차도 걷는 것에 대한 지적인 앎이 있어서가 아니라, 막상 걸을 때는 걸음걸음에 대해 인(仁)해야 걸을 수 있습니다. 력행(力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감성적인 것이고 센시티비티의 문제인 것입니다. 무엇을 힘들여 행한다는 것, 행동이라는 것은 막상 해볼려고 하면 감성의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표한 것에 도달하는 용(勇)
그런데, “용기라는 것은 지치야(知恥也)”라고 했습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수치를 알 적에 생긴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수치를 알 적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 실천의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용(勇)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힘(Driving power), 즉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죠. 도올서원에 등록했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은 용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간에 불가피한 일이나 그럴 만한 핑계도 많을 수 있으나 용기 있는 자, 드라이빙 파워를 지닌 자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이행지자 일야(所以行之者 一也)’ 여기의 이 ‘일(一)’은 뒤에서 성(誠)으로 나타납니다. 중용(中庸)의 ‘성론(誠論)’이 도입되는 지점인 것이지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의 5가지, 지인용(知仁勇) 3가지에서 성(誠) 하나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 중용(中庸)의 진짜 맛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인용
'고전 > 대학&학기&중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15. 문명화된 인간이 문명국가를 유지한다 (0) | 2021.09.19 |
---|---|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14. 앎과 행동의 세 가지 스타일 (0) | 2021.09.19 |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12. 이미 주어진 도(道)와 이루어나가야 할 덕(德) (0) | 2021.09.19 |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11. 대학과 중용의 스케일 (0) | 2021.09.19 |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10. 올바른 수신법 (0) | 2021.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