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25. 성(誠)과 성지(誠之)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25. 성(誠)과 성지(誠之)

건방진방랑자 2021. 9. 19. 13:35
728x90
반응형

2025. ()과 성지(誠之)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 그 자체는 하늘의 도(),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도()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아지며 유유자적하게 도()에 착 들어맞는 경지이니, 이것은 곧 성인(聖人)의 경지이다. ‘()하려고 하는 것즉 뭇사람의 도()는 선()을 택하여 이것을 꿋꿋이 지키는 것이다.
 
此承上文誠身而言. 誠者, 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 誠之者, 未能眞實無妄, 而欲其眞實無妄之謂, 人事之當然也. 聖人之德, 渾然天理, 眞實無妄, 不待思勉而從容中道, 則亦天之道也. 未至於聖, 則不能無人欲之私, 而其爲德 不能皆實. 故未能不思而得, 則必擇善, 然後可以明善; 未能不勉而中, 則必固執, 然後可以誠身, 此則所謂人之道也. 不思而得, 生知. 不勉而中, 安行也. 擇善, 學知以下之事. 固執, 利行以下之事也.
여기선 윗 문장의 몸을 성실히 한다는 것을 이어 말했다. ()은 진실무망(眞實無妄)하는 것을 말하니, 천리(天理)의 본연이다. 성지(誠之)란 진실무망(眞實無妄)하지 않고 진실무망(眞實無妄)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인사(人事)의 당연함이다. 성인의 덕은 천지와 어우러져 진실무망(眞實無妄)하여 생각하고 힘쓰길 기다리지 않아도 유유자적하게 도에 합치되니 또한 하늘의 도(). 성인에 이르지 못하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지 않아, 덕 됨이 모두 진실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선을 택한 후에 선을 밝힐 수 있다.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굳게 잡은 후에 몸을 성실히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사람의 도라 한다. 생각하지 않고도 얻는 것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이고,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는 것은 안이행지(安而行之). 선을 택하는 것은 학이지지(學而知之) 이하의 일이다. 굳게 잡는 것은 리이행지(利而行之) 이하의 일이다.

 

 

()은 천지자연의 끊임없는 운행을 체득하는 것

 

()’이라는 것은 보통 성실하다(sinceritive)고들 하는데, 중용(中庸)성론(誠論)’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런 의미에서 그치는 게 아니고, ‘천지론(天地論)’적인 코스믹(Cosmic)한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지천(知天)’의 세계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또한,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이라는 것은 사도(邪道)가 아니고 정도(正道)이다(authentic하다)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이란 천지도(天之道)’라고 했습니다. 중용(中庸)의 저자는 성론(誠論)’으로 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간세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해왔는데,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간()에서 결정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따지는 데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도덕성의 궁극적 기준을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결정되어 버리면 도덕이 임의적인 게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서양의 종교는 갓(God)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이 초월적 입법자가 제시하는 계명에 도덕성의 기준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니 우리가 그것을 지키자! 이겁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십계명과 같은 것이 없고, 인간의 도덕성을 ()’에서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자연의 운행인데, 그러니까 천지도(天之道)’라는 것, 하늘의 움직임은 늘 부단하게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낮이 왔다가는 밤이 오고, 달이 기울었다가는 다시 차고 또다시 기울고 등등 변화에 어김이 없다, 성실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저녁에 잠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낮이 되버린다면 참으로 곤란해지겠죠? 모든 게 교란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인간 도덕성의 근원을 자연운행의 부단히 늘 그러함에서 찾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는 자연 변화의 기본적인 질서가 성실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성실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도덕성이 만약에 인위적이 되어버린다고 하면 곤란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양사상에는 의인화된 신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질투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았다가, 핏대난다고 밤을 낮으로 돌려라!” 신이 그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구약성경에 실제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 할지어다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아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 하였다고 기록 하지 아니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여호수아 1012~14). 여호수아가 적들과 싸우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도우려고 태양이고 달이고 멈춰라! 그래서 잘 싸우고 어쩌고··· 일식 월식이 있었으니까 이런 내용이 만들어졌겠지만, 하여튼 동양사상에는 이런 인격적 존재로서의 창조주 초월신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천()의 질서, 하늘이 성실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성실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이 동양사상에서는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가끔 지진도 생기도 태풍도 불고 하지만, 기본적인 질서는 틀림이 없다는 겁니다. 김장 담으려고 다 준비해 놓고 있는데 갑자기 여름이 와버리면 뒤죽박죽되어 버려요. 단순하고 유치한 것 같이 보일런지 모르지만, 동양사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데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에콜로지의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적에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환경생태 문제와 인간생존의 문제를 나의 구체적인 생활과 관련시켜 하나의 질문으로 제시한다면, 아주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과연 나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내 자신과 내 가족의 건강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가?” 내 몸과 내 가정 그리고 이 사회의 건강(健康)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아니 지금의 상태로라면 거의 불가능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상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고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 아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추구를 교란시키거나 봉쇄해 버리기 딱 좋은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추구하려는 나의 역량을 박탈해 버리고, 심지어는 건강하고 싶은 욕구마저도 왜곡시켜버리기 쉬운 그런 세태(世態)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 천지도야 성지자 인지도야(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는 것입니다.

 

 

 

자연에 합치(合致)되려는 노력의 성지(誠之)

 

여기서 성지자(誠之者)’()’()’을 동사화시키는 지()입니다. 그러니까 ()‘은 궁극적인 도달점(goal)이고 성지(誠之)’는 그 도달점에 이르는 과정(process)을 말합니다. ‘성지(誠之)’의 프로세스가 ()’을 향해서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모습, 인류문명의 모습도 궁극적으로 하늘에 합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동양사상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늘에 합치되지 않는 인간문명의 질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서양인들에게는 동양사상이 낙후된 듯이 보였을 런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것은 틀림이 없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나는 오늘날 에콜로지가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여기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자 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 성인야(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이거 멋있는 말입니다. ‘종용(從容)’이라는 것은 유유자적함을 말하는데, “()이라고 하는 것은, 유유자적하면서도 도()에 짝 들어맞는다. 이러한 경지에 달한 게 성인(聖人)이다.”

 

 

성지자 택선이고집지자야선(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善)”

성인의 도()는 종용중도(從容中道)이고, 그러나 성()하려고 하는 평범한 인간의 도()는 택선이고집지자야(擇善而固執之者也).” ()을 택해서 그것을 딱 굳세게 잡고 가야만 성()하려고 하는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작 시기 1단계 2단계 3단계
본문 공자가어 중용 맹자』「이루12

 

 

 

 

 

 

 

 

 

 

인용

목차

전문

본문

공자가어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