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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늙음의 여유로움이 담긴 서거정의 한시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늙음의 여유로움이 담긴 서거정의 한시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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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의 여유로움이 담긴 서거정의 한시

 

 

소화시평권하 64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사람은 서거정이다. 서거정은 조선시대의 뭇 학자들과는 달리 흔한 유배조차 가지 않았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아 외직조차 맡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고 그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그가 살았던 시기는 권력이 안정되고 문제가 없던 시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가 일어나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런 변화무쌍한 권력의 흐름 속에서도 목숨 부지를 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가 얼마나 처세술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여기에 인용된 시는 아마도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던 말년 때의 시일 것이다. 제목 자체도 용종(龍鍾)’이라고 했으니 말년의 작품이란 걸 당연히 알 수 있고, 설혹 제목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이력을 보면 이 시에서 드러나는 여유롭고 한가한 정취는 젊었을 때나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때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天地龍鍾一病翁 천지의 늙고 병든 한 늙은이가
岸巾危坐小窓中 두건 젖히고 작은 창에 꼿꼿하게 앉아 있자니,
黑雲暗淡葡萄雨 검은 구름 어둑하다가 포도에 비 내리고,
紅霧霏微菡萏風 붉은 노을 자욱하다가 연꽃엔 바람 부네.
燕語自能知主客 제비의 말은 스스로 주객을 가릴 줄 알지만
蛙鳴元不管私公 개구리 울음은 원래 공사를 관섭(管攝)하지 않지.
了無官事眠初覺 관사의 일 전혀 없어 잠들다 막 깨어서는
只把詩聯課小童 다만 시구를 붙잡고 아이를 가르친다네. 四佳詩集補遺一

 

수련에선 자신의 모습과 하는 행동을 묘사하며 시작을 열고 있다. 자신을 늙고 병든 늙은이로 자칭하며 그런 자기가 작은 창에 복장도 잘 갖추지 못한 채 꼿꼿이 앉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는 무얼 하기 위해 그렇게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앉아 있었던 걸까?

 

함련과 경련에선 그런 그가 작은 창을 통해 무엇을 했는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함련과 경련의 미감은 확실히 다르다. 함련에선 시각적인 느낌을 강화하여 본 것에 대해 묘사하고 있지만 경련에선 들었던 것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함련에선 그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핍진하게 묘사하는데 그치는 반면, 경련에선 들리는 것만을 단순히 묘사하는 게 아닌 들리는 걸 통해 자신의 소감까지 곁들여 묘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함련과 경련이 이 시에선 어떻게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읽는 게 중요하다.

 

함련의 3구에선 시간의 변화와 함께 날씨의 변화를 담고 있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비가 한 방울씩 포도에 떨어지고, 그러다 또 시간이 흘러 언제 비가 내렸나 싶게 노을이 자욱해지더니 연꽃에 바람이 부는지 흔들린다고 눈에 보이는 광경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다. 함련엔 눈에 보이는 광경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고 날씨가 변해감에 따라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14자의 한자에 오롯이 담아냈다.

 

경련에선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청각을 중심에 두고 펼쳐나가며 거기에 자기의 감상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제비가 둥지에 들락거리며 울음소리를 내는 걸 들으며 마치 제비는 공사(公私)를 구분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고, 개구리가 어딘가에서 울어대는 걸 들으며 개구리는 공사를 관섭(管攝)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구리가 공사에 관섭하지 않는다는 건 고사(故事)가 있기 때문에 그 고사를 한 번 봐두는 것도 이 부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 역할을 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과연 제비와 개구리의 소리를 들으면서 왜 공사(公私) 타령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 말의 주체는 당연히 자신이며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묘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말은 제비는 새소리를 낼 때도 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개구리는 끊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비는 소리 내지 말아야 할 때가 언제인 줄을 알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공사를 안다고 표현한 것이고, 개구리는 그런 것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대기에 공사를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창가에 꼿꼿이 앉아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심상을 풀어내다가 미련에서 왜 자기가 그렇게 하릴없이 보고 들으며 있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당시에 자신은 무얼 하는 사람이었는지 말하며 시를 끝맺고 있다.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관사의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곧 서거정은 아직도 관직을 맡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며, 젊었을 때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한직으로 밀려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 현실적인 이미지로 읽는 것보단 곽예가 쓴 제직려(題直廬)라는 시와 같은 정조로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시에서 곽예도 정오라 참으로 한가하여 공무가 거의 없으니[午漏正閑公事少]’라고 거의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으며, 이 말은 단순히 업무가 없는 한직이란 뜻이 아니라 그만큼 태평성대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처럼 서거정도 이 구절을 통해 이 시를 짓던 당시가 태평성대에 가깝다는 말을 7구를 통해 하고 싶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그는 잠들다가 깨어서 창을 내다본 후에 마음을 정돈하고선 곧바로 아이들에게 시구를 가르친다고 끝을 맺었다. 이 시는 서거정의 제법 여유로운 풍취가 물씬 느껴진다.

 

 

 

 

 

 

 

 

인용

목차

상권 목차

하권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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