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의 허와 실③
그것으로 수양은 모든 게 끝났다고 믿었다. 비록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물려받은 격이라서 적법한 왕위 승계는 아니지만, 어차피 개국 초부터 장자 승계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얼마 전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선례도 있었으니 그리 허물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데서 터진다. 집현전 학자 출신의 소장파 관료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년 전 계유정난으로 수양이 실권을 차지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중립을 취했다. 왕의 삼촌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한명회처럼 출신도 모르는 모리배가 권세를 휘두르는 꼴이 결코 보기 좋을 리는 없지만(한명회는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문음, 즉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당이 다른 세력으로 대체되었다는 정도로 여기고 꾹 참았다. 그러나 단종이 폐위되자 그들의 태도는 급변한다. 비록 어지럽고 혼돈스런 정국이지만 그래도 국왕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중심을 유지하는 축이자 마음 한 구석의 자부심이 아니었던가? 세조의 즉위는 그 축과 자부심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것이었다.
특히 성삼문과 박팽년은 박탈감이 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삼문은 예법을 관장하는 예조에 재직하다가 단종의 승지(承旨, 비서)로서 예법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지만 사법을 관장하는 형조에 몸담은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단종의 폐위에 흥분해서 자살하려 했던 박팽년은 성삼문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려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세조가 즉위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쿠데타지만 단종 복위라는 대의명분에 비추어 보면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니 양심상 거리낄 게 전혀 없다. 이들은 점차 이개, 유성원, 하위지 등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유응부 등 소장파 무신들을 끌어들여 비밀리에 공작을 전개한다【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는 말로 지칭하게 된 것은 나중에 남효온(南孝溫, 1454 ~ 92)이 쓴 『추강집(秋江集)』 때문이다. 이 책에 「육신전(六臣傳)」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 마치 단종 복위를 꾀한 세력이 이들 여섯 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추후 세조가 직접 행한 국문(鞠問)에 의하면 적어도 13~17명이 사건에 관련된 게 확실하다. 따라서 그냥 주동자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는 정도만 알면 된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피살된 김문기(金文起, 1399 ~ 1456)의 후손들은 1970년대까지도 자기들 조상을 포함시켜야 한다며 법석을 떨기도 했는데, 사육신이든 ‘사칠신’이든 뭐가 그리 대단할까? 참고로, 남효온은 김시습(金時習, 1435 ~ 93), 원호(元昊, ? ~ ?), 이맹전(李孟專. 1392 ~ 1480), 조여(趙旅, 1420 ~ 80), 성담수(成聃壽, ? ~ 1456) 등과 함께 새 정권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리지만, 이 사실도 퀴즈쇼 같은 데 나갈 게 아니라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명분에만 집착하고 정열에만 호소할 뿐 현실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그들이 꾀하는 쿠데타란 어설프기 짝이 없다. 기회는 좋았다. 마침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을 맞는 연회 자리에 별운검(別雲劍, 어전 행사시에 경비 역할로 참석하는 무관)으로 임명된 무장 세 명이 유응부를 포함하여 모두 그들 일파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기회에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 한다. 연회장에는 세조와 폐위된 단종이 동석하게 되므로 여러 모로 유리하다. 그러나 하늘이 세조의 편이었는지 불행히도 세조는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는 불발되었는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 반역 or 충절 세조의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엄연히 왕실 내부의 일이다. 그럼에도 왕권에 도전한 학자들이 왜 후대에 반역자로 남지 않고 충절의 대명사가 된 걸까? 그 이유는 나중에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체제로 형질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死六臣)묘인데, 이들이 품은 사대부 국가의 꿈은 50년 뒤에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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