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을 칭송하는 품격 있는 김시습의 한시
『소화시평』 권하 64번에 초대된 사람은 김시습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산지를 떠돌았던 시인이자 문인인 김시습은 유교일색으로 변해가는 조선사회에 유불도를 망라하는 사상세계를 구축한 반항아이기도 했다. 김시습이 쓴 시를 해석했었는데 스터디를 하면서 완전히 포커스가 엇나갔다는 걸 느꼈다. 그건 애초에 전제해둔 방향이 잘못된 데서 비롯된 거였다. 나는 이 시를 해석할 때 ‘이 시는 김시습이 지은 것이니 당연히 김시습의 얘기를 담은 거겠지’라는 점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내용 자체가 도통한 스님과 같은 시였기에 김시습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증준상인(贈峻上人)」이란 시처럼 명약관화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문학이 그렇듯 시를 쓴 작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목을 유심히 보고 그에 따라 생각을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곧 제목에 따라 그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들어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이 시는 산 속에 살고 있는 도인에게 준 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말하는 대상은 당연히 작가 자신이 아닌 그 시를 준 상대방일 수밖에 없고 이 시를 통해 작가가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그에게 뭘 바라고 있는지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건 내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일기를 쓰는 게 아닌 이상, 누군가에게 주는 편지나 글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담기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으로 이 시를 해석할 때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나처럼 ‘김시습 자신의 이야기’라고 봤던 관점은 180도 어긋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작년 4월부터 시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 다시 한 번 시의 제목과 시의 내용의 연관성에 대해 좀 더 확실히 알게 됐다. 역시 실수는 좋은 것이다. 그런 실수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배워가니 말이다.
到老幽情頗轉深 | 늙자 그윽한 정이 매우 더 깊어졌고 |
林泉終不負初心 | 끝내 임천에 살겠다는 초심을 지켰다네. |
竹爐初撥三生火 | 대나무 화로에선 삼생의 불 막 지피고. |
石鼎新煎一味蔘 | 돌솥에선 최고의 삼을 새로 달이네. |
風曳洞雲歸遠壑 | 바람은 동굴의 구름을 끌고서 먼 골짜기로 돌아가고 |
雁拖寒日下遙岑 | 기러기는 찬 해를 끌어당겨 먼 봉우리로 내려오네. |
共君今夜不須睡 | 그대와 함께 오늘 밤 잠들지 않을 테니, |
月到小窓彈古琴 | 달이 작은 창에 이르면 옛 거문고를 탈 터이지.『梅月堂詩集』 卷之十三 |
수련(首聯)부터 묘사되는 인물은 위에서부터 말했다시피 도인에 대한 내용이다. 도인은 나이가 제법 든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데 단순히 나이가 든 게 아니라 산속에 은거하며 자신의 철학을 견지해온 도인이다. 그러니 수련에선 그런 도인의 풍모를 칭송하며 시를 열고 있다. 늙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인품의 깊이는 깊어졌고 그런 마음을 한결 같이 지켜 산속에 살겠다는 초심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란 말이 있지만 그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패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벌벌 떨며 어떻게든 미약해져가는 자신을 세우려 돈이나 권력으로 치장하거나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 끄집어내 한없이 포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도인은 마치 ‘멋있게 나이 드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인상을 가득 담고 있다.
함련에선 그런 도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묘사된다. 난 이 부분이 김시습 자신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는데 이 시 전체가 도인의 삶과 그에 대한 칭송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건 위에서 쭉 얘기했던 그대로다. 우선 이 부분은 도인이란 걸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그건 도가의 기본적인 상식 하에서 해석해야 한다. 기존의 나의 해석과 완전히 달라졌기에 그 차이를 표로 구성해보겠다.
竹爐初撥三生火 | 石鼎新煎一味蔘 | |
기존 | 대나무 화로 처음 켜 세 번 불을 지피고 | 돌솥 새로 달여 한 번 삼 맛을 본다네 |
수정 | 대나무 화로에선 삼생의 불 막 지피고, | 돌솥에선 최고의 삼을 새로 달이네. |
나의 경우엔 ‘발(撥)’과 ‘화(火)’와 ‘신(新)’과 ‘미(味)’를 서술어로 보며 해석하려 했다. 그러니 대략적인 상황에 대한 그림은 그려지지만 어색한 부분을 감출 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런 해석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명확하게 알려줬고 이건 도가란 배경지식과 연관 지어 해석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러니 전생ㆍ현생ㆍ후생의 개념을 담고 있는 삼생(三生)이란 단어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삼을 달인다는 게 정말 삼을 달인다는 게 아닌, 도가의 장생불사약인 단약을 달이는 ‘연단(煉丹)’이란 걸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구절을 도인은 산속에 은거하며 도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는 거였다.
미련(頸聯)에선 그런 도인이 살고 있는 곳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14개의 한자로 그곳의 풍경을 매우 환상적으로 잘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홍만종도 이 구절을 인용하며 ‘미상불탄기건아[未嘗不歎其雅健]’라고 비평했던 것이다. 14개의 글자로 표현된 한자의 환상적인 표현을 보고 싶은 사람은 경련을 여러 번 읽어보며 그 맛을 음미해보면 된다.
미련에서도 나의 새거은 교수님과 완전히 갈렸다. 나는 미련에서 거문고를 타는 주체를 당연히 김시습 자신으로 보았고 그렇게 해석했지만 교수님은 이곳의 주체는 당연히 도인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건 이 시 자체가 도인에게 준 시이고 당연히 도인의 풍모를 칭송하기 위한 시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런 정조를 이어간다고 봐야 한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옛 거문고[古琴]’란 단어의 숨겨진 의미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한다. 거문고를 생각하면 당연히 ‘무현금(無絃琴)’을 떠올려야 하고 무현금의 주인장인 도연명을 떠올려야 하며 그 의미엔 ‘고상하다’, ‘탁월하다’라는 의미를 떠올려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도인은 고상한 사람이다라는 의미 맥락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古琴 → 無絃琴 → 도연명 → 고상하다 → 도인은 고상한 사람이다
바로 이런 의미맥락을 통해 마지막까지 도인을 칭송하며 마무리 지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보질 못하고 마지막에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당연히 김시습이라 생각했고 자신이 도인과 만난 그 밤이 너무도 좋은 나머지 거문고를 타며 그 여운을 길게 유지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았으며 다른 학생은 아예 두 사람이 거문고를 함께 타며 합동연주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점 모두 이 시가 도인에게 준 시이며 그의 인품을 칭송하기 위한 시라는 관점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역이라 할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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