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기존 천군소설과의 다른 전개인 무(武)의 중시와 남는다는 결말
맹호연의 강조는 무(武)에 대한 강조
이처럼 맹호연은 천군의 나라에 침입한 도적을 퇴치하는데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그 주변 사물들까지 의물화되어, 그보다 묘사가 소략한 성성옹에 비해 더욱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맹호연의 용맹함을 강조하여 묘사한 것은 당시 청나라의 무력적 침입으로 무너진 조선 사회에서 무(武)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부분에서 당시 유자로서 병자호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정신의 회복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성성옹의 묘사는 소략한 대신, 그 행적에는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성성옹이 잔존하는 도적을 천군이 문교로 교화할 것을 간하는 언행에서 볼 수 있다.
성성옹이 간하여 말하기를 “선왕은 덕을 빛내어 병사를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황제께서는 잘 생각하소서. 문덕을 편지 칠십 일이 안 되어, 순임금의 조정에 완고한 묘족을 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니, 천군이 “의인이다.” 하셨다. 드디어 병사를 파하고 가르침을 폈다. 두 계단에서 방패와 깃춤을 추며 순임금의 옛 일을 본받으니 남은 적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惺惺翁諫曰, 先王耀德不觀兵, 惟帝念哉, 誕敷文德, 不七旬, 可格虞廷之頑苗矣. 君曰義人也. 遂罷兵而敷敎, 舞干戚于兩階, 效虞帝故事, 餘賊皆來服.
맹호연이 도적을 완전히 평정하고 나서도 한 구석에서 도적이 또다시 침범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맹호연은 계속해서 武로써 다스릴 것을 주장한다【浩然命將士超其海透其關, 摧其山塡其壑, 人莫有禦之者, 於是其賊悉平. 其後醜虜變詐百 出. 又屈彊於一隅, 議更擧兵以勦之.】.
무(武)보단 선정(善政)으로
그러나 위에서처럼 성성옹은 순임금이 행한 방법대로 덕으로 교화를 펼 것을 권해, 같은 충신이지만 다른 방법을 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도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무사로서 맹호연의 공격적인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끝까지 남은 도적을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에, 천군이 성성옹이 권한 교화의 방법을 따르면서, 경(敬)의 실천을 보인 성성옹의 행적이 부각되는 것이다.
순임금은 완고한 묘족을 복종시킬 때 무력이 아닌 문덕을 펴 교화했다고 한다. 묘족은 남방의 오랑캐인데,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이들 묘족을 정벌하라고 명하자 우임금이 군대를 가지고 30일을 기다렸지만 완악하여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익이 우임금에게 덕으로 감화시킬 것을 권하자 우임금이 그 말을 듣고 회군하여 군대를 거두자 순임금이 문덕을 펴 방패와 깃으로 춤을 추었는데 이때 회군한 지 70일 만에 묘족이 와서 복종하였다【帝曰: “咨禹, 惟時有苗弗率, 汝徂征.” 禹乃會羣后, 誓于師曰: “濟濟有衆, 咸聽朕命. 蠢玆有苗, 昏迷不恭, 侮慢自賢, 反道敗德. 君子在野, 小人在位, 民棄不保, 天降之咎, 肆予以爾衆士, 奉辭罰罪. 爾尙一乃心力, 其克有勳.” 三旬, 苗民逆命. 益贊于禹曰: “惟德動天, 無遠弗届, 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 帝初于歷山, 往于田. 日號泣于昊天, 于父母. 負罪引慝, 祗載見瞽瞍, 虁虁齋慄, 瞽亦允若. 至誠感神, 矧玆有苗.” 禹拜昌言曰: “兪,” 班師振旅. 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 『書經』, 虞書 大禹謨.】.
위에서 성성옹이 “문덕을 편지 칠십 일이 안 되어, 순임금의 조정에 완고한 묘족을 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한 말이다. 천군도 최종적으로 순임금이 쓴 덕화를 따르자, 감화를 받은 도적이 복종하였다. 이처럼 「의승기」에서는 성성옹이 천군에게 순임금의 행적을 모범삼아 교화를 통해 도적을 복종시킬 것을 간하여 천군이 그에 따름으로써 완전한 갈등의 해소를 이룬다. 이는 천상에서 하강한 천군이 적을 소탕한 뒤 국가가 무사해지자 천상으로 다시 상승하는【各恭其職, 國家無事, 上在位一百年, 乘六龍朝帝庭不還.” 김우옹, 『동강집』 권16, 「天君傳 南冥先生作神明舍圖, 命先生作傳, 蓋先生年少時也」.】 이전의 「천군전」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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