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②
버려진 신세=가을부채
가을 부채가 버림 받은 여인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 것은, 한 나라 때 반첩여(班婕妤)가 지은 「원가행(怨歌行)」이란 작품 때문이다.
新裂齊紈素 鮮潔如霜雪 | 제나라 고운 비단 새로 자르니 깨끗하기 마치 눈 서리 같구나. |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 말라서 합환선을 만들었는데 밝은 달 모습처럼 둥그렇구나. |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 님께서 출입할 제 손에 들고서 흔들흔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네. |
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 언제나 근심키는 가을이 와서 싸늘한 바람이 무더위 앗아가면, |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 고리 속에 깊숙히 내던져 져서 사랑하심 중도에 끊어질까 함일세. |
제나라의 질 좋은 흰 비단을 잘 말라서 둥근 합환선(合歡扇)을 만들었다. 이를 님께 드리니 님은 늘 품 속에 지니시며 더울 때마다 부치신다. 그러나 혹 가을이 되어 더위가 수그러들면 님께서 이를 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이다.
이밖에 왕창령(王昌齡)은 「서궁추원(西宮秋怨)」에서 “누가 울음 삼키며 가을 부채로 얼굴 가리고, 허전히 걸린 달빛 아래 임금을 기다리나[誰分含啼掩秋扇, 空懸明月待君王].”라 하였고, 당나라 때 어느 궁녀는 「제낙원오엽상(題洛苑梧葉上)」, 즉 낙양(洛陽) 궁원(宮苑) 오동잎 위에다 쓴 시에서 “묵은 총애는 가을 부채를 슬퍼하고, 새로운 은총은 이른 봄에 부치었네[舊寵悲秋扇, 新恩寄早春].”라 하여 잊혀진 자신과, 새로 총애 받는 여인을 대비하여 노래하였다. 유운(劉雲)은 또 「반첩여(班婕妤)」에서 “임금 은혜는 볼 수 없으니, 첩의 신세 가을 부채만도 못해요. 가을 부채는 오히려 다시 찾을 날 있겠지만, 첩의 몸은 영영 잊혀 졌으니[君恩不可見, 妾豈如秋扇. 秋扇尙有時, 妾身永微賤].”라고 하였다. 모두 ‘추선(秋扇)’ 즉 가을 부채를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에 견준 예들이다.
莫道當時恩愛多 | 그때에 괴임 받음 말하지 마오 |
秋來零落似殘荷 | 가을 들어 영락하니 시든 연잎 같구려. |
滿庭霜露寒如許 | 뜰 가득한 서리 이슬 칩기가 이러한데 |
縱有淸風可奈何 | 맑은 바람 있다 한들 어찌 하리오. |
권벽(權擘)의 「제추선(題秋扇)」이다. 가을 부채가 갖는 정운의를 십분 활용하였다. 그러나 행간에 담긴 뜻은 염정이 아니라 풍자다. 지금은 서리 이슬 내리는 추운 가을날이다. 설사 맑은 바람을 지녔다 한들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서리 맞아 시든 연잎 같은 한 때의 은애(恩愛)는 말하지 말라. 인간의 부귀영화도 그렇듯 하릴없는 것이다.
우리 고려가요 「동동(動動)」에 보면, “유월(六月)ㅅ 보로매 아으 별해 바룐 빗 다호라 도라 보실 니믈 젹곰 좃니노이다 아으 동동(動動)다리.”라 한 것이 있다. 머리를 많이 빗어 이빨이 빠진 빗, 쓸모없어 버린 그 빗처럼 님이 나를 버리셔도, 나는 님이 나를 돌아보실 때까지 언제나 따르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그러고 보면 가을 부채만이 버림 받은 여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인용
3. 버들을 꺾는 마음①
4. 버들을 꺾는 마음②
7. 난간에 기대어①
8. 난간에 기대어②
9. 저물녘의 피리 소리
10.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