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포(南浦)의 비밀②
송인(送人) 감상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1구에서는 비가 개이자 긴 둑에 풀빛이 곱다고 했다. 겨우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긴 둑에 봄비가 내리자, 그 아래 어느새 파릇파릇 돋아난 봄풀이 마치 갑자기 땅을 헤집고 나온 것처럼 제 빛을 찾았던 것이다. 지루했던 겨울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 내리는 봄비를 맞는 마음은 설레이는 흥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막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있으니, 그 처창(悽愴)한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김동환은 「강이 풀리면」에서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님도 탔겠지. 님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라고 노래한 바 있다. 봄이 오면 동지섣달에 얼었던 강물이 풀리듯 내 마음의 시름이 풀려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나는 거꾸로 님을 떠나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시 고려가요 「동동(動動)」의 제 2연을 떠올린다. “정월(正月)ㅅ 나릿 므른 아으 어져 녹져 하논대 누릿 가온대 나곤 몸하 하올로 녈셔 아으 동동(動動)다리 ” 정월의 강물은 녹으려 하는데, 그와 같이 내 시름을 녹여줄 님은 오실 줄 모르고 나는 어이해 한 세상을 홀로 살아가느냐는 탄식이다.
대동강 물이 어느 때 마르겠느냐는 3구는 좀 엉뚱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강물 마르는 이야기냐 말이다.
한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 구성이 갖는 묘미가 바로 이 대목에서 한껏 드러난다. ‘기(起)’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승(承)’은 이를 이어 받아 보충하는 것이다. ‘전(轉)’에서는 시상(詩想)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ㆍ2구와 3구 사이에는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할 때, 4구 ‘결(結)’에 가서 그 단절을 메워 묶어줌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이루게 된다.
기(起) |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 |
승(承) | 이를 이어 받아 보충하는 것 |
전(轉) | 시상(詩想)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는 단절이 온다. |
결(結) |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 할 때, 단절을 메워 묶어줌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이루게 된다 |
3구에서 강물 타령으로 화제를 돌려놓고, 4구에 가서 설사 강물이 자연적 조건의 변화로 다 마를지라도, 강가에서 이별하며 흘리는 눈물이 마르기 전에는 강물은 결코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앞서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과 같은 시가(詩歌) 언어의 과장을 말한 바 있지만, 눈물을 제 아무리 많이 흘린다 한들 도대체 그것이 대동강의 유량(流量)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를 두고 허풍 좀 그만 떨라고 타박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과장은 시인의 슬픔이 그만큼 엄청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니 말이다.
이 시는 하평성(下平聲)인 가운(歌韻)을 쓰고 있다. 이 운목(韻目)에는 ‘歌ㆍ多ㆍ羅ㆍ河ㆍ戈ㆍ波ㆍ荷ㆍ過’ 등 시에서 자주 쓰이는 운자(韻字)가 많이 포진하고 있어, 고금의 시인치고 이 운(韻)으로 작시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으니, 이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얻어 내기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이 작품 뒤로도 아예 ‘多ㆍ歌ㆍ波’의 운을 그대로 써서 차운한 시가 적지 않으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품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얻기 어렵다. 이제 와서 운자(韻字)는 한시 감상에 있어 고려의 대상이 안 되게 되었지만, 중국 사신의 찬탄 속에는 앞서 남포(南浦)가 주는 신운(神韻) 위에, 이러한 운자(韻字) 사용의 산뜻함도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송인(送人)의 후일담
필시 뒷사람의 부회일 듯싶지만, 정지상이 홍분(紅粉)이란 기생과 헤어지며 지었다는 이 시는 뒷날까지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箕城, 佳麗之地, 自古, 騷人墨客, 大小使星, 莫不遊玩. 且是紅粉之送別後也, 麗朝學士鄭知常詩曰;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近有京客, 遊箕城, 方伯饋酒, 味淡如水, 給一房妓, 臨別無淚. 客曰: “惜乎, 大同江水, 將不日而盡!” 方伯曰: “何謂也?” 客曰: “杯有添酒之水, 人無添波之淚, 江水惡得不盡乎?” 滿座, 拍手. -『奇聞』
조선 시대 어떤 서울 나그네가 평양감사로 있던 친구를 찾아가 노니는데, 기대에 비해 대접이 시원치 않았다. 술맛은 꼭 맹물 맛인데다가 수청하는 기생은 이별의 즈음에도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이래저래 서운했던 그는 감사를 향해 다짜고짜 “대동강 물이 며칠 못 가서 마르겠네.”라고 하였다. 감사가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인가?”하고 되묻자, 서울 나그네 왈, “술잔에는 첨주(添酒)의 물이 있는데, 사람은 첨파(添波)의 눈물이 없으니 어찌 강물이 마르지 않겠는가[杯有添酒之水, 人無添波之淚, 江水惡得不盡乎]?” 참으로 야무진 독설이다. 친구 대접하는 감사의 눈치가 빤하니 기생인들 무슨 애틋한 정이 있었으랴 만은, 술에 타느라고 강물은 소모하면서 계집은 이별의 눈물이 말랐으니, 과연 대동강 물은 여태도 마르지 않고 잘 흐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금소총(古今笑叢)』 「기문(奇問)」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후대의 기림도 자못 떠들썩하다. 신광수(申光洙)는 “그때 남포(南浦)서 님 보내던 그 노래, 천년 절창 정지상(鄭知常)이라[當日送君南浦曲, 千年絶唱鄭知常].”이라고 했고, 신위(申緯)는 「논시절구(論詩絶句)」에서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 시와 함께 나란히 세워 이렇게 기리었다.
長嘯牧翁依風岉 | 바람 부는 산비탈서 휘파람 불던 목은옹(牧隱翁) |
綠波添淚鄭知常 | 푸른 물결 위에다 눈물 보태던 정지상(鄭知常). |
雄豪艶逸難上下 | 호방함과 아름다움 우열 가리기 어려워라 |
偉丈夫前窈窕娘 | 늠름한 장부 앞에 정숙한 아가씨라. |
1구는 목은(牧隱)이 "길게 휘파람 불며 산비탈에 기대었자니, 산은 푸르고 강은 홀로 흐르도다[長嘯依風岉, 山淸江自流]."라 한 데서 따온 것이다. 목은의 웅장하고 호방한 기상과, 정지상의 염려(艶麗)하고 표일(飄逸)한 풍격은 어느 것이 더 낫다고 가늠키는 어려우니, 비유하자면 헌헌장부(軒軒丈夫) 앞에 요조숙녀(窈窕淑女)가 수줍게 서 있는 격이라는 기림이겠다.
인용
3. 버들을 꺾는 마음①
4. 버들을 꺾는 마음②
7. 난간에 기대어①
8. 난간에 기대어②
9. 저물녘의 피리 소리
10.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