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광주민주화운동 (6)
건빵이랑 놀자
목차 1.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사실이 된다 『김대중 자서전』이 건빵을 읽다 2. 첫 번째 문턱을 넘으며 정치를 하게 되다 김대중, 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신화나 영웅전이 아닌, 인간 김대중에 포커스를 맞추다 첫 번째 문턱, 전쟁에 휩쓸리다 첫 번째 문턱은 시야를 넓혔다 3. 그를 제거하기 위해 권력이 작동하다 두 번째 문턱의 맛보기, 교통사고 두 번째 문턱, 죽음의 순간 찾아온 삶에 대한 갈망 4.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 두 번째 문턱은 연대감을 안겨줬다 세 번째 문턱, 사형선고를 받다 세 번째 문턱엔 어떤 가르침이 있을까? 5.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 김대중 세 번째 문턱, 작지만 큰 대학 감옥에서 만든 희망 감옥과 인간 ..
5.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 김대중 그는 두 번의 문턱을 넘으며 자신의 신념을 갈고 닦았고 권모술수만이 판을 치는 정치판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게 됐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박정희 정권은 79년에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10월 26일에 있었던 사건은 ‘유신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 총알이 아니더라도 18년의 장기집권과 공포정치에 시민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기에,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을 것이다. ▲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은 다시 권력투쟁의 장으로 들어선다. 세 번째 문턱, 작지만 큰 대학 감옥에서 만든..
4.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 이 문턱을 통해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맘 속 깊이 느끼게 됐다. 그건 곧 연대감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권력에 의해 은밀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 사건이 발생한지 20년이 넘도록 한일 사이에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나 보다. 진실규명이란 이처럼 어렵나 보다. 두 번째 문턱은 연대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더 이상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와 함께 뜻을 모으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납치당했을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백방으로 움직여 그 사실을 알렸고, 그 결과 망망대해에 비행기가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감이란 나의 삶이 누군가의 삶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고, 함께 살아갈 힘을 전..
목차 1. 광주와 인연 맺다 오월항쟁 없이 나를 사유하기 있기? 없기? 사람 찾아 떠난 광주에서 역사를 만나다 518번 버스를 타고 광주를 여행하다 2. 오월묘지, 그 이야기 같은 장소 속에 다른 느낌이 숨어 있다 오월묘지 상징탑에 의미 새기기 신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 사연이 묻힌 오월묘지 감수성, 소통의 기본 조건 3.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안타까운 죽음, 그럼에도 묻히지도 못하는 현실 역사에 치여 사는 개인,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4. 구오월묘지와 전두환 사연이 묻힌 구오월묘지 꾸며질 때, 과거는 사라진다 현재를 살려는 자, 이 비를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5. 공동의 경험, 32주년 5.18 역사의 공간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사라지다 전야제, 들끓는 감정..
이 날 광주는 꽤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금남로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 수많은 인파가 있다고 생각하니, 08년 당시의 촛불집회가 생각났다. 도로를 점거하고 우리의 요구 사항을 외쳤던 가슴 벅찬 흥분이 똑같이 일었기 때문이다. 80년 광주의 역사적인 공간에서 전야제는 시작되었다. 도청은 문화전당이란 것을 세운다고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역사적인 공간을 볼 수 없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 제법 날씨가 쌀쌀한데도 사람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역사의 공간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사라지다 518민중항쟁에서 도청은 주요 장소였다. 5월 21일엔 도청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가 있었다. 이 땐 저격수까지 투입되었다고 한다.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자국민을 향해 국민을 지키..
81년에 태어난 나에게 80년의 이야기는 아득한 ‘고조선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현실이 아닌, ‘역사’라는 학문적인 이미지로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다닌 대학교엔 광주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광주민중항쟁의 이야기가 아닌 ‘신산한 바람이 가득 부는’ 현실적인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관한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광주항쟁이 끝난 후 태어난 세대, 그래서 광주항쟁과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세대, 하지만 그럼에도 광주항쟁의 부채를 껴안고 태어난 세대, 그게 바로 ‘80년 이후 세대’다. ▲ 518을 찾아 이곳에 왔다. 사랑 찾아 떠난 광주에서 역사를 만나다 내가 광주에 처음 간 것은 대학교 동아리인 ‘말뚝이’라는 민중놀이패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