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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김대중 자서전 - 5.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 김대중 본문

연재/작품을 감상하다

김대중 자서전 - 5.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 김대중

건방진방랑자 2019. 10. 2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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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 김대중

 

그는 두 번의 문턱을 넘으며 자신의 신념을 갈고 닦았고 권모술수만이 판을 치는 정치판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게 됐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박정희 정권은 79년에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1026일에 있었던 사건은 유신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 총알이 아니더라도 18년의 장기집권과 공포정치에 시민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기에,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을 것이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은 다시 권력투쟁의 장으로 들어선다.

 

 

 

세 번째 문턱, 작지만 큰 대학 감옥에서 만든 희망

 

그렇게 80년의 봄과 함께 여태껏 살아온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열리고, 반목과 질시가 아닌 우정과 통합의 세상이 열릴 거라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호랑이가 사라진 곳엔 여우가 왕이 된다는 말처럼 정권의 야욕을 지닌 육사 11기들의 비밀 조직 모임인 하나회의 리더 전두환 장군의 손아귀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명분을 위해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 광주민주화운동49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여순사건 때는 자국민을 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 때는 특전사가 버젓이 광주에 투입되어 인명을 살상했다.

 

 

그 당시에 518은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에 의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일어난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오죽했으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22년이나 지난 2002년에 전두환은 그건 총기를 들고 일어 선 폭동이야. 계엄군이 진압해야지라는 말을 했을까. 그만큼 현재까지도 교묘히 물타기하려는 세력들이 많을 정도로 오해와 억측이 많다는 얘기다. 그랬으니 그 당시엔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중앙정보부가 써내려간 스토리대로, 그 배후 세력을 찾는 게 목표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의 지령을 받고 시민을 매수하여 선동한 사람이 바로, 신안에서 출생하여 인제와 목포에서 국회의원이 된 전라도의 상징적 인물인 김대중 선생으로 몰아갔다.

 

이 당시만 해도 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거나, 배후세력으로 만들기는 무엇보다도 쉬웠다.

 

 

19811월 대법원에서 김대중, 사형이란 선고가 내려지긴 했지만, 여러 사람들의 구명 운동과 잘못된 판결에 대한 항의로,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은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김대중 살해 미수 사건때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는데, 이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작지만 큰 대학인 감옥에 들어가 인고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우린 김대중을 생각할 때 인동초忍冬草라는 호를 붙이곤 하는데, 그건 바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막힌 핍박의 순간을 무작정 참아내야만 했기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감옥을 작지만 큰 대학이라 생각하며, 밖이었으면 바빠서 하지도 못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다산이 강진에서 500권의 저술을 썼듯, 그 또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희망이든, 기회든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비된 사람만이, 그런 상황을 미리 예견한 사람만이 희망이 찾아왔을 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걸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각계각층에서 김대중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감옥과 인간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신영복 선생이 떠오른다. 그가 20년 동안 복역하며 써낸 글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에 빼곡하게 실려 있고 그건 여전히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쇠귀 선생도 척박한 감옥에서 느낀 감회를 읽어보자.

 

 

징역 속에는 풍부한 역사와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견고한 벽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각양의 세태, 각색의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모든 고통과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케 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이성을 얻게 해줍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가슴들은 그 완급緩急, 곡직曲直, 광협廣狹, 방원方圓으로 하여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치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총중叢中의 한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 하고 그 협착한 갑각甲殼을 벗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세류細流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 출판사,

 

 

쇠귀 선생의 글에서 징역이란 환경은 매우 협소하고 판에 박힌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게 했고, 자신의 허영심이란 껍질을 벗게 해줬으며, 예전엔 상종도 하지 않을 사람들을 이해하게 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처럼 김대중 선생도 또한 2년여의 징역 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치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총중의 한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됐을 것이다. 그의 생각들은 세 번째 문턱을 넘으며 넓음을 이룬 이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육사교관이던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에 가게 되어 20년 20일을 복역했다. 맨 왼쪽이 신영복 선생님.

 

 

 

세 번째 문턱은 거짓 희망이 아닌, 참 희망을 이야기하게 하다

 

세 번째 문턱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더 이상 누군가가 주는 거짓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참 희망을 이야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환경은 불행할 수 있으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볼 수 있다시피, 감옥은 절망이 스민 음습한 곳이지만 앤디한 사람으로 희망이 샘솟는 곳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감옥이 작지만 큰 대학이라 불렸던 이유도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 후 가택연금, 6.10 민주항쟁, 13·14대 대선낙선, 은퇴선언, 영국으로의 출국 등 숨 돌릴 틈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전개된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럴 수 있는 저력이야말로 세 번째 문턱을 넘으며 얻게 된 것이다.

은퇴선언 당시 가장 힘든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하니 얼마나 비통했을까. 그런데도 그는 노자의 살게 해줬으되 소유하진 않는다(生而不有)’는 말처럼,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더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더 슬퍼할 수 없었다.(『Ⅰ』 607p)”고 말하며 은퇴선언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다독였다.

 

 

주도자란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인용

목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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