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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4.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 본문

연재/작품을 감상하다

김대중 자서전 - 4.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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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

 

이 문턱을 통해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맘 속 깊이 느끼게 됐다. 그건 곧 연대감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권력에 의해 은밀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20년이 넘도록 한일 사이에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나 보다. 진실규명이란 이처럼 어렵나 보다.

 

 

 

두 번째 문턱은 연대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더 이상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와 함께 뜻을 모으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납치당했을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백방으로 움직여 그 사실을 알렸고, 그 결과 망망대해에 비행기가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감이란 나의 삶이 누군가의 삶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고, 함께 살아갈 힘을 전해 받는 것이다. 첫 번째 문턱을 넘으며 넓어진 시야는, 두 번째 문턱을 넘으며 좀 더 현실적인 감각으로 자리하게 된다.

또한 국경을 넘나드는 정치의 타락상도 목격하였기에,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는데도 정치 결착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한국과 일본의 저급한 정치인들의 작태에는 아직도 분노한다. (『Ⅰ』 325p)”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급한 정치의 세계, 부패한 정치의 세계를 보며 고급한 정치를 꿈꿀 수 있었다.

훗날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일본 문화 개방을 주도한다. 일부에선 그를 신매국노라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왜곡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일본을 무조건 신봉하여 그런 정책을 펴려 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경험과 정치 결착을 경험하며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문화를 개방하여 좋은 점은 배우고 우리가 우수한 점은 더욱 발전시켜 나가자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는 독특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해방 이후 그 많은 이질적 문화들이 물밀듯이 들어왔지만 이내 버릴 것은 버려서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믿었다. 오히려 일본 문화를 막는 것이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양질의 문화가 들어오지 않으면 폭력, 섹스 등 저질 문화만 몰래 스며들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역사의 어느 한 시점의 우열로만 판단하여 교류할 수는 없다. 문화는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잇는 끝없는 상호 학습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문화 교류는 서로를 배우는 과정이다. 일본 문화를 막는 것은 우리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Ⅱ』 114~115p)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애초에 우려했다시피, 일본문화가 개방되면 급속도로 우리의 문화가 먹히고 일본 문화만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한동안 과도기적 상황도 있었지만, 지금은 일본 문화에 무작정 심취하지 않으며, 일본의 성문화에 경도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의 다른 문화를 보고 느끼며 지금은 각자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었으니, ‘문화는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잇는 끝없는 상호 학습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는 그의 주장이 올바른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핫이슈라면 일본문화 개방이었을 거다.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걱정스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 문턱, 사형선고를 받다

 

세 번째 문턱은 신념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미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기에 사형선고쯤은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의 고비를 반복했다고 익숙해지는 건 아니다. 공지영이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쓰리고 아프다라고 말했다시피, 아픔에 경중이 있다기보다, 아픔에 무뎌진다기보다 더욱 그 아픔은 선명한 느낌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그마한 아픔에도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든다. 쌍용 자동차 사태의 피해자들이,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작은 소리에도 벌벌 떨며 몸을 움츠리는 건, 고통은 심연에 파고들어 한 개인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살고 싶었다. 나는 제발 사형만은 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법정에서도 속으로 기도했다.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보았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 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관이 입을 열었다. ‘김대중, 사형’ (『Ⅰ』 424~425p)

 

 

재판관의 판결처럼, 자신이 민주화운동의 배후였다면 그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시절에 사법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사형을 선고한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여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인혁당 사건처럼, 자신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니 그 마음을 가눌 길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삶에 정의란 있는지 의심까지 당연히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마지막 편지에, “막상 이제 죽음을 내다보는 한계 상황 속에서의 자기 실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믿음 속의 그것인가 하는 것을 매일 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428p)”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광주는 현재진형행이다. 여전히 주요신문사나 방송사에선 사실을 날조하고 여론 몰이를 한다.

 

 

 

세 번째 문턱엔 어떤 가르침이 있을까?

 

우린 그가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사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5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 번째 문턱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그에게 어떤 삶의 자세를 갖게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음 후기에선 그가 감옥에서 인동초처럼 차디찬 겨울을 버티어 나가며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 이후엔 어떤 문턱들을 넘게 되었는지 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에게 감옥은 인동초처럼 겨울을 견뎌내며 성장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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