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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아리랑을 쓰게 된 작가의 말 (2000.4.19. 김제청소년 수련관 강연회 발췌) 1. 아리랑이라 제목을 지은 이유 『아리랑』을 짓게 된 계기 우리의 정감과 함께 한 이리랑 2. 1904년부터 우리의 땅을 마구 사들인 일본인들 우리의 쌀이 군량미로 1904년에 이미 실제적인 한일합방이 되었다 3. 욕의 본향이 전라도가 된 이유 전라도와 욕 판소리는 욕의 승화 우리의 욕이 일본에선 현실? 4. 일본인 거주민들보다 2배나 많았던 친일파 토지조사 사업은 빌미 일본 정착민보다 많은 친일파와 식민통치 연장 5. 민족 공통의 역사를 반쪽만 가르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다 전체를 보게 하려 의도된 소설 역사교사ㆍ교수 비판과 역사복원의 소명 6. 해방(解放)이 아닌 사변(事變) 소설 끝부분에 다룬 이야기의 전말 전군도로..

1. 아리랑이라 제목을 지은 이유 『아리랑』을 쓰기 위해 김제를 처음 온 게 지금부터 11년쯤 됩니다. 그때 『태백산맥』을 써놓고 단 하루도 쉴 새 없이 바로 『아리랑』의 취재를 시작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리랑』을 쓸려고 계획했던 것이 1980년 그러니까 『태백산맥』을 쓸 생각을 하면서 함께 작정을 했고 그때 이미 아리랑이라는 제목을 정해놨었습니다. 『아리랑』을 짓게 된 계기 왜 그랬냐하면, ‘작가로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나는 어떠한 작품을 가지고 내 작가 생애를 살아갈 것이며, 이 시대에 태어난 작가로써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이 땅이라고 하는 의미는 우리 민족처럼 근대사 100년을 사는데 파란만장하고 핍박과 설움과 억압 속에서 산 민족이 없다. 그렇다면은 이런 땅에서 소설..

김제평야와 KTX에 알알이 박힌 역사 비는 조금씩 오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바람도 별로 불지 않는다. 우의는 통풍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보온 효과까지 있으니 한결 더 덥게 눅눅하며 찝찝하게 느껴지더라. 월요일에 빗길 여행 때 느껴지는 상쾌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그런 기분이었다. 김제평야와 『아리랑』 아무래도 비가 내리기도 전부터 너무 빨리 대처를 했더니, 그게 나에겐 비수가 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우의를 벗기에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기에 망설여졌다. 그래도 머지않아 비가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덥더라도 그냥 입고 걸어가기로 했다. 정읍에서 김제로 가는 길은 지방도 701을 타고 가다가 국도 30번으로, 다시 29번을 타고 들어가는 루트를 택했다. 오늘 루트엔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가는..
3. 째보선창과 군산세관 터미널에서 내려 30분 정도 걸어 째보선창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둘러보고 있다. ▲ 그 때의 아픔이 스민 뜬다리와, 지금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뜬다리. 째보선창과 군장대교 『아리랑』을 보면 하대치가 피땀 흘려가며 째보선창을 간척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잔교는 해수면의 높이에 따라 다리가 오르락내리락하도록 만든 장치인데, 아무래도 수심에 상관없이 쌀을 실어 나르기 편하도록 만든 것이다. 조수간만의 차와는 상관없이 수탈하기 편하도록 만든 시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랜 4기가 건설되었다던데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해변을 따라 걷는다. 바다 건너편은 충남 장항읍이 보인다. 군산과 장항을 동시에 묶어 ‘군장국가산업단지’를 만들었다. 장항과 군산은 ..
1. 역사를 찾아 떠나는 이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본다는 건, 단순히 공간적인 이미지로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본다는 뜻이다. 도보여행을 하며 느꼈던 건, 그냥 걷기만 해서는 그 공간에 대한 어떠한 느낌도 남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그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이유도, 무언가 색다른 것을 찾게 될 일도 없다. 하지만 그 장소에 사람이 더해지면 그 의미는 남달라진다. 산이 단순한 산이 아니라 특별한 나만의 산으로, 물이 그냥 물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 2012년도에 단재학교 영화팀과 찾은 전주. 전주는 고향이어서 특별할 게 없다 생각했는데, 아이들과 함께 오니 특별한 곳이 ..
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下 할머니의 성함은 지순옥으로 연세는 92세라고 했다. 1937년에 원동遠東(머나먼 동쪽)의 쁘리모르스키끄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에 살고 계셨단다. 남자들은 강제이주 전에 이미 잡혀갔기 때문에, 이 당시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으로 가라는 교사의 지시가 있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기차를 탔다고 한다. ▲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까지는 고려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직접 만나고 나선 그 무지에 깜짝 놀랐다. 설국열차를 방불케하는 생존의 현장 기차는 화물칸으로 120명가량의 사람이 탔는데, 자신의 엄마는 열흘 정도 먹을 것을 가지고 탄 반면, 아무 것도 없이 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