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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09년 국토종단 - 27. 김제평야와 KTX에 알알이 박힌 역사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09년 국토종단 - 27. 김제평야와 KTX에 알알이 박힌 역사

건방진방랑자 2021. 2. 5.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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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평야와 KTX에 알알이 박힌 역사

 

 

비는 조금씩 오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바람도 별로 불지 않는다. 우의는 통풍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보온 효과까지 있으니 한결 더 덥게 눅눅하며 찝찝하게 느껴지더라. 월요일에 빗길 여행 때 느껴지는 상쾌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그런 기분이었다.

 

 

▲ 701 지방도는 정말 걸을 맛이 나던 길이었다. 우의가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어쩌랴.

 

 

 

김제평야와 아리랑

 

아무래도 비가 내리기도 전부터 너무 빨리 대처를 했더니, 그게 나에겐 비수가 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우의를 벗기에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기에 망설여졌다. 그래도 머지않아 비가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덥더라도 그냥 입고 걸어가기로 했다.

정읍에서 김제로 가는 길은 지방도 701을 타고 가다가 국도 30번으로, 다시 29번을 타고 들어가는 루트를 택했다. 오늘 루트엔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포함되어 있다.

남한 최대의 평야라던 김제평야는 한국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곳이다. 곡식 생산량이 많으면 자연히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 곡식들은 조선시대엔 지주들에게, 일제시대엔 일본인에게 빼앗기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는 빌미가 됐을 뿐이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언제나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굶주리며 근근이 살아왔다.

더욱이 한여름의 햇볕은 벼들이 익기엔 최적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괴로움이었다. 해를 피할 수도 없는 논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불볕더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니기럴, 조상 대대로 여그서 산 것이 웬수여. 나라 안 뺐갰을 때넌 온갖 잡세로 주리 틀리고, 왜놈덜 시상이 된게로 그놈덜이 질로 먼첨 치고 들어 난장판얼 지기고, 땅만 넓었제 실속언 하나또 없어 고상만 곱쟁이로 한당게.

아리랑, 조정래, 해냄출판사, 2011, 422

 

 

아리랑은 김제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에 어떻게 반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목포의 발전도 그러하듯 군산의 발전도 한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민초들이 어떤 수모를 겪으며 어떻게 살아가야만 했는지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국토종단 정확히 1년 후엔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인 벌교에 갔었다. 그곳에 남아 있는 개간된 땅들, 그리고 벌교초등학교에서 숨져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랑에선 일제에 짓밟힌 우리 민족의 서글픔에 대해, 태백산맥에선 이념의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 민족의 아픔에 대해 조정래 작가는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지나는 길이 일제강점기엔 그와 같은 수탈의 현장이었고, 경제발전기엔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인해 도시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양분일 뿐이었다. 그와 같은 울분과 원한이 가득 찬 땅만 넓어제 실속언 하나또 없는 공간을 걸어서 지나가야 한다.

 

 

▲ 김제엔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이곳에 가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기차의 속도혁명은 사이를 지워 버린다

 

701 지방도는 2차선으로 되어 있고 차들도 많이 다니지 않아 국토종단을 하기에 최적이었다. 모든 노선이 2차선이라 쾌적했다. 이 도로는 호남선 철도와 가까워질 듯 멀어질 듯 마주 보며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이 길을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주 지나다니는 기차를 볼 수 있다.

걷는 내내 KTX가 정말 많이 지나가더라. 아직 KTX를 타본 적은 없지만, KTX는 이동수단의 속도혁명을 낳았다. 기차 여행엔 나름대로의 낭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전주에 살던 사람들은 밤 기차를 타고 전라선을 따라 여수에 가본 기억이 한번씩은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처음 열차가 등장했을 땐 열차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육중한 철덩어리가 움직이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신식 기술 문명을 예찬하던 사람들, 기차의 굉음에 땅에 묻힌 조상의 혼들이 경기(驚氣)를 일으킨다며 거부를 하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열차가 등장한 지 100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열차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라졌지만(오히려 자기 지역에 열차역이 생기기를 바라는 시대가 되었으니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교통의 편함은 곧 집값, 땅값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열차에 대한 경이로움은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 엄청난 위용을 과시하는 KTX를 바로 지근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속도혁명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한 번 정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수레나 마차, 역마 등 이전의 수송 수단에서 매주 중요한 고리였던 사이공간이 기차 수송에서는 사라졌다. 기차는 단지 출발과 목적만 안다. ……사이공간이 소멸된다는 건 인간과 공간 사이의 다양한 감각적 네트워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 여행기(열하일기)가 특별했던 건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공간에 의해서다.

나비와 전사, 고미숙 저, 휴머니스트, 2006, 53

 

 

기차는 완벽하게 출발점과 도착점만 남긴다. 지나는 과정속에 마주치고 섞여야 할 많은 것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정은 사라지고 완벽한 결과만 남게 된다. 빠른 만큼 우린 과정의 소중함, 마주침의 행복함은 잃어버리게 됐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국토종단을 하게 됐다. 과정을 보기 위해, 마주쳐 보기 위해서 말이다. 무수한 사이공간이 연암에겐 열하일기라는 선물을 낳았듯이, 이런 과정들이 나에게도 2009년 국토종단기로 남을 것이다(이에 대해선 2015년에 떠난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기에서 좀 더 자세하게 풀었다).

 

 

▲ [열하일기]의 여정도. 이 기록은 '인간과 공간 사이의 다양한 감각적 네트워크'가 낳은 기록물이다.

 

 

인용

목차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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