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鄕樂)
이익(李瀷)
『樂學軌範』載俗樂無㝵之名. 按『高麗史』無㝵之戲, 出自西域, 其辭多用佛語, 姑存節奏, 『字書』㝵與礙同, 無㝵謂無所礙障也.
羅僧元曉瑤石宮失火之後, 易俗服自號, 小性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以『華嚴經』, ‘一切無㝵人, 一道出死生.’之語, 名曰無㝵, 仍作歌流于世.
曾住芬皇寺, 撰『三昧經』, 置筆硯於牛之兩角上, 謂之角乘贊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又按『東京雜記』, 元曉嘗撫玩曲項葫蘆, 歌舞於市, 後好事者綴金鈴於上, 垂綵帛於下, 所謂腹若秋蟬項如夏鼈是也. 『星湖先生僿說』 卷之十五
해석
『樂學軌範』載俗樂無㝵之名.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속악(俗樂) 중 무애(無㝵)라는 악곡명이 기재되어 있다.
按『高麗史』無㝵之戲, 出自西域, 其辭多用佛語, 姑存節奏, 『字書』㝵與礙同, 無㝵謂無所礙障也.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면 ‘무애(無㝵)라는 유희는 서역으로부터 나와 말이 대개 불교용어에 사용되어 우선 음절과 연주만 보존되었다’라고 했고 『자서(字書)』에 ‘애(㝵)는 애(礙)와 같으니 무애(無㝵)는 막힌 게 없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羅僧元曉瑤石宮失火之後, 易俗服自號, 小性居士.
신라의 스님 원효(元曉)는 요석궁(瑤石宮)이 불타 소실된 후에 일상옷으로 바꾸고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스스로 이름지었다.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以『華嚴經』, ‘一切無㝵人, 一道出死生.’之語, 名曰無㝵, 仍作歌流于世.
우연히 광대[優人]가 가지고 놀던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크고도 기괴하여 그 모양에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막힘이 없는 사람은 하나의 길이 죽고 사는 것에서 탈출한다.’라는 말로 무애(無㝵)라 이름짓고서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曾住芬皇寺, 撰『三昧經』, 置筆硯於牛之兩角上, 謂之角乘贊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 적에 『삼매경(三昧經)』을 찬술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양 뿔 위에 두고 각승(角乘)이라 말하며 기렸으니 다음과 같다.
角乘初開三昧軸 | 각승(角乘)은 막 삼매의 축에서 열렸고 |
舞壺終掛萬街風 | 무호(舞壺)는 끝내 일만 거리의 바람에 걸렸네. |
月明瑤石春眠去 | 달 밝은 요석궁에선 봄 잠이 떠났고 |
門掩芬皇顧影空 | 문 닫은 분황사에선 그림자 돌아보니 비었어라. |
又按『東京雜記』, 元曉嘗撫玩曲項葫蘆, 歌舞於市, 後好事者綴金鈴於上, 垂綵帛於下, 所謂腹若秋蟬項如夏鼈是也. 『星湖先生僿說』 卷之十五
또한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살펴보면 ‘원효(元曉)가 일찍이 목 굽은 호로병을 만지며 저잣거리에서 노래하며 춤추니 후대의 호사가들이 위에는 금방울을 꿰맸고 아래는 채색비단 드리웠다’고 했으니 소위 배는 가을 매미 같고 목은 여름 자라 같다는 것이 이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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