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식년시와 별시로 선비들의 공부습성이 망가졌다
박람강기한 사람만 뽑는 현량방정과
伊川上仁宗書一段, 論科擧事, 有曰: “國家取士, 雖以數科, 然而賢良方正, 歲止一二人而已, 又所得, 不過博聞强記之士爾.
본질은 없이 무작정 외운 사람만 뽑는 명경과
明經之屬, 唯專念誦, 不曉義理, 尤無用者也.
사부와 성률에만 갇혔지만 국가의 대사를 맡게 되는 진사과
最盛者, 唯進士科, 以詞賦聲律爲工, 詞賦之中, 非有治天下之道也. 人學之, 以取科第, 積日累久, 至於卿相, 帝王之道, 敎化之本, 豈嘗知之? 居其位, 責其事業, 則未嘗學之, 譬如胡人操舟, 越客爲御, 求其善也, 不亦難乎.”
명경과의 폐단
此所論科擧之弊, 恰與我國科弊相類. 我國古無別科, 只大比ㆍ式年科而已, 而年久之後, 亦至生弊. 式年, 例講經書, 兼製述, 意非不美, 而末流專以誦爲主, 故士多不究文義, 只事口讀. 製述則倩他人, 不爲諱秘, 人亦視爲常事. 以是登明經科者, 例多不解文字, 至近來益甚.
제술과의 폐단
間有製述別擧, 前則能文者多中, 近來科擧甚頻, 士子多製而少讀, 遂不開卷, 專事剽竊前人科作以得科名, 故識見昧陋, 元無學術之可論.
현량방정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다
賢良方正科, 趙靜菴在朝時, 嘗一行之, 而己卯禍後, 還罷仍不復設. 以至于今, 只行式年別擧. 而兩科之弊, 殆有甚於宋朝, 若使程子見之, 當以爲如何也? 可慨也已.
해석
박람강기한 사람만 뽑는 현량방정과
伊川上仁宗書一段, 論科擧事,
이천이 인종께 올린 글 한 단락에 과거에 대한 얘길 논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有曰: “國家取士, 雖以數科, 然而賢良方正, 歲止一二人而已, 又所得, 不過博聞强記之士爾.
“국가에서 선비를 뽑을 적에 비록 여러 과목들이 있지만 현량방정과는 한 해에 1~2명에 그칠 뿐이고, 또한 뽑힌 사람은 널리 듣고 잘 기억하는[博聞强記] 선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본질은 없이 무작정 외운 사람만 뽑는 명경과
明經之屬, 唯專念誦, 不曉義理, 尤無用者也.
명경과에 속하는 사람은 오직 암송만을 전념해서 의리를 깨우치지 못했으니 더욱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부와 성률에만 갇혔지만 국가의 대사를 맡게 되는 진사과
最盛者, 唯進士科, 以詞賦聲律爲工, 詞賦之中, 非有治天下之道也.
가장 심한 것은 오직 진사과로 사부와 성률을 공교롭다고 여기지만 사부 가운데엔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가 있지 않습니다.
人學之, 以取科第, 積日累久, 至於卿相, 帝王之道, 敎化之本, 豈嘗知之?
사람이 그것을 배워 과거를 취해 급제하여 시간만 흘러가면 경과 재상에 이르니 제왕의 도와 교화의 근본을 어찌 일찍이 그것을 알겠습니까?
居其位, 責其事業, 則未嘗學之, 譬如胡人操舟, 越客爲御, 求其善也, 不亦難乎.”
그 지위에 거하고 사업을 책임진다면서 일찍이 배우질 않으니, 비유하면 오랑캐가 배를 조정하고 월나라 나그네가 마부가 됨과 같아 장점을 취하려 해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명경과의 폐단
此所論科擧之弊, 恰與我國科弊相類.
여기서 논의한 과거의 폐단이 흡사 우리나라 과거의 폐단과 서로 유사하다.
我國古無別科, 只大比ㆍ式年科而已, 而年久之後, 亦至生弊.
우리나라는 옛적엔 별과가 없었고 다만 대과【조선 시대 정기적으로 시행된 정규 과거로, 子ㆍ卯ㆍ午ㆍ酉가 드는 해를 식년으로 하여 3년마다 거행되었으므로 大比科 혹은 식년과라고도 하였다. 대비란 주나라 때에 3년마다 향리들을 평가하여 賢者와 能者를 가리는 일을 칭하는데, 『周禮』 「地官 鄕大夫」에 “3년이 되면 대비를 하는데, 그들의 덕행과 도예를 상고하여 賢者와 能者를 등용한다三年則大比, 考其德行道藝, 而興賢者能者.“라고 보인다.】와 식년시만 있을 뿐이니 해가 오래될수록 또한 폐단이 생기는 데에 이르렀다.
式年, 例講經書, 兼製述, 意非不美, 而末流專以誦爲主, 故士多不究文義, 只事口讀.
식년시는 으레 경서를 강론하고 제술을 겸해 뜻이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류들이 오로지 암송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이 많이들 문의를 연구하지 않았고 다만 구두와 제술만을 일삼았다.
製述則倩他人, 不爲諱秘, 人亦視爲常事.
제술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걸 꺼려하지【휘비(諱秘): 남을 꺼려 어떤 것을 우물쭈물 얼버무려 넘김】 않았고 사람들이 또한 보고서 일상적인 일이라 여겼다.
以是登明經科者, 例多不解文字, 至近來益甚.
이 때문에 명경과에 급제한 사람은 으레 대부분 문자를 해석하지 못하고 근래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제술과의 폐단
間有製述別擧, 前則能文者多中, 近來科擧甚頻, 士子多製而少讀, 遂不開卷, 專事剽竊前人科作以得科名, 故識見昧陋, 元無學術之可論.
간간히 제술별과를 두었으니, 예전엔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뽑혔지만 근래엔 과거가 매우 빈번해져 선비들이 제술을 많이 하고 독서는 조금하여 마침내 책은 열지 않고 오로지 앞 사람이 과거답안을 표절해서 과거합격의 명성을 일삼았기 때문에, 식견이 어둡고 비루해 원천적으로 학술로 논할 만한 게 없다.
현량방정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다
賢良方正科, 趙靜菴在朝時, 嘗一行之, 而己卯禍後, 還罷仍不復設. 以至于今, 只行式年別擧.
현량방정과는 조정암【조광조: 1482(성종 13)~1519(중종 14),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하여 혁신정치를 펼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에 도교의 보존을 위해 설치했던 소격서(昭格署)를 끈질긴 상소 끝에 폐지시켰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공신이라는 이유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있던 원로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을 밀어내고 젊은 선비들을 대거 등용시켰다. 하지만 결국 그를 시기하던 무리들에 의해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모함을 받고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때 조광조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던 사림파(士林派)들이 대거 화를 입은 사건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이 조정에 있을 적에 일찍이 한 번 행하긴 했지만 기묘년 화가 있은 후엔 도리어 그만둬 다시는 개설하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도록 다만 식년시와 별시만이 행해졌다.
而兩科之弊, 殆有甚於宋朝, 若使程子見之, 當以爲如何也? 可慨也已.
두 과거의 폐단은 아마도 송나라 때보다 심하리니 만약 정자에게 이런 상황을 보게 했다면 마땅히 어떠했겠는가? 개탄할 만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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