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황제가 된 거지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한족의 품에 돌려준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새 제국의 국호를 명(明)으로 정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백련교(白蓮敎)의 한 갈래인 명교(明敎)의 우두머리인 탓에 국호를 명이라고 정했다지만, ‘밝다’는 뜻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명 제국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역대 어느 왕조의 건국자보다도 희한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찍이 수, 당, 송 제국을 세운 양견(楊堅), 이연(李淵), 조광윤(趙匡胤)은 모두 중원 북방의 유력한 무장 출신이었으며, 더 이전의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시대 제후라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실력이든 가문이든 배경이든 이들은 제각기 내세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도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신분이지만 변방의 하급 관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보다 더욱 못한 걸식승(乞食僧) 출신이었다.
주원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살이를 하다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자라서는 거지 중의 신분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생활을 했는데, 이때 보고 들은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그의 대세 감각을 크게 키워주었다. 그러던 차에 가입하게 된 비밀 조직 백련교(白蓮敎)가 그의 뜻을 펴기 위한 물리력이 되었다. 백련교의 군조직인 홍건군에 자원입대해 맹활약하던 그는 홍건군 지역 대장인 곽자흥(郭子興)의 부관으로 승진해 그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이 전사하면서 지휘관이 된 뒤에는 연이어 무공을 세우면서 난징을 중심으로 강남의 동부 일대를 장악했다.
이미 원 제국은 힘이 현저하게 약해져 강남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한 때였다. 주원장은 당시 강남에서 세력을 떨치던 진우량(陳友諒)과 지주 세력의 대표인 장사성(張士誠)을 물리치고, 마침내 100여 년 만의 한족 통일 왕조를 세웠다.
▲ 한족의 구세주 걸식승 출신의 주원장은 탁월한 식견과 난세를 배경으로 제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오랜 이민족 지배 끝의 한족 왕조, 더구나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건국한 명 제국이었으므로 주원장은 모든 국정에 일일이 간섭하면서 강력한 황제 독재 체제를 이루었다. 이 초상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알려진 모습으로 한족의 구세주라기보다는 고약한 인상이다.
국호를 명이라고 정한 데는 평민 출신의 무명소졸(無名小卒)이 세운 제국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진우량이나 장사성만 해도 각각 중국의 옛 역사에 등장하는 한(漢)과 오(吳)의 후예라고 자칭했지만, 주원장(朱元璋)은 굳이 전통의 왕조를 계승할 필요가 없었다.
명 제국은 남쪽에서 흥기했다는 점에서도 여느 왕조와는 달랐다. 역대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대부분 중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남쪽으로 확장하는 게 기본 공식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강남에서 출발해 중원을 정복했다는 점에서 그 반대다(난징을 수도로 한 통일 왕조도 명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주원장 자신도 원래 강남의 안후이 출신인 데다 당시 중원은 아직 몽골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강남을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이민족 지배를 끝내고 탄생한 한족 왕조, 평민 출신의 건국자, 특이한 건국 과정, 이렇게 역사적 전통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는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명은 여러 가지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빽’ 하나 없는 자신의 출신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또 이전 한족 왕조인 송대의 취약한 황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명 태조는 신생 제국의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황제 중심의 강력한 독재 체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민족 왕조인 몽골도 본뜬 한족 왕조의 정치 체제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우선 황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던 승상직을 아예 없애고 중서성도 폐지했다. 자연히 중서성이 관할하던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의 6부(六部)는 황제 직속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 원대의 군사 기관인 추밀원을 5군 도독부로 바꾸고 감찰 기관 어사대도 도찰원(都察院)으로 고쳐 모두 황제 직속으로 만들었다. 행정, 사법, 군정을 모두 황제 개인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 황제는 천자의 절대적 지위를 누렸으나 항상 그에 걸맞은 현실의 권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천자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황제의 절대 권력이 확립된 것이다.
나아가 태조는 중앙 관제만이 아니라 지방 행정에까지도 황제 독재의 원칙을 관철했다. 그래서 만든 게 이갑제(里甲制)다. 우선 한 지역의 농가들을 갑수호(甲首戶)라고 부르는 일반 농가 100호와 이장호(里長戶)라로 부르는 부유한 농가 10호로 나누고 이 110호를 묶어 1리(里)로 한다. 100호의 갑수호는 다시 10갑으로 나누고, 이장호가 매년 번갈아가며 이장을 맡는다. 이장은 각 갑의 대표인 10명의 갑수들을 통해 마을 행정을 담당한다. 이처럼 마을 단위로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갑제의 이장은 권농과 교화, 재판은 물론 조세 징수까지 담당했으므로 지역의 독재자인 셈이었고 중앙 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일종의 지방자치제처럼 보이지만, 이갑제는 실상 국가(황제)가 농촌의 지주들과 결탁해 일반 농민들에까지 지배력을 관철시키는 제도였다【이갑제는 송대에 향촌 사회에 뿌리내린 형세호 중심의 사대부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전통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도는 아니다. 당시 형세호도 조세를 징수하고 요역을 배정하는 등 국가 기관의 업무를 일부 담당했다. 그러나 송의 황권은 명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제도화시켜 중앙 정부의 일률적인 지배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삼지는 못했다】.
▲ 형률의 근본 새 나라가 들어서면 법부터 제 정하는 게 순서다. 명 태조는 당 제국의 법을 바탕으로 1367년 『대명률(大明律)』을 제정했다. 『대명률』은 당률과 비슷했으나 주원장(朱元璋)의 철권통치가 반영되어 그보다 훨씬 잔혹한 형벌 조항들이 많이 섞였다.
군사 제도 역시 독창적이면서도 과감하게 개혁되었다. 당의 부병제(府兵制)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대 통일 왕조들은 초기에는 예외 없이 징병제, 즉 의무병제를 시행했다(오늘날과 같은 한시적인 의무병제의 개념이 아니라 평생 의무병, 즉 병농일치제도다). 그러나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병역 대신 병역에 상당하는 조세를 납부하는 제도가 일반화된 탓에 의무병제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초기의 ‘신성한 병역 의무’라는 정신은 사라지고 모병제, 즉 직업군인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갈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 명 태조는 순수 징병제를 포기하고 징병제와 모병제를 절충한 군사 제도를 택했는데, 이것이 곧 위소(衛所) 제도다. 이 제도는 국가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위소)를 정하고 하나의 위소당 5600명의 병력을 배정해 주둔시키면서 경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사들은 군적(軍籍)을 가진 군호(軍戶)로서, 일반 민호(民戶)와는 달리 처음부터 병역의 담당자로 내정된 일종의 직업군인이었다. 이들은 대대로 병역이 세습되었고 마음대로 군호에서 이탈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에 필요한 경비는 민호에서 납부하는 조세를 통해 해결되었지만 필요한 식량은 모두 군전(軍田)으로 충당했다. 또한 원래부터 중국 변방에 살고 있던 소수 이민족들은 그대로 위소로 편성해 자치 겸 국방 수비에 임하게 했다. 이 위소 제도는 병농일치라는 의무병제의 장점과 더불어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하는 직업군인제의 장점도 수용한 것이었다.
주원장(朱元璋)은 평민, 혹은 기껏해야 반란군 무장 출신이라는 신분답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정치 감각과 행정 솜씨를 보인 인물이었다. 더구나 전통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모든 제도를 완비한 그의 능력은 ‘근본 없는’ 신생국 명을 일찌감치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기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속출하는데도 명 제국이 그런대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초에 그가 다져놓은 각종 제도의 덕이 크다
▲ 명 제국 군대의 전투 장면 앞열의 병사들이 총포를 든 것에서 과거의 군대와는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찍부터 병사 계층이 분리된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중국은 명대까지도 ‘직업군인’이나 ‘상비군’의 개념이 없이 전통적인 병농일치가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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