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의 시대: 아랫물②
비록 반란으로 중앙정부가 무너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으나 이미 고려 사회는 총체적인 하극상으로 온통 만신창이가 되었다. 백성들은 걸핏하면 관청을 불사르고 양곡을 탈취하는가 하면, 관청의 노비들마저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다. 경대승(慶大升)의 집권기에 중앙 권력이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하던 민란은 이의민이 명종의 초대를 받아 권좌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다시 터져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1193년 김사미(金沙彌, ? ~ 1194)와 효심(孝心, ? ~ 1194)이 일으킨 반란은 신라 부흥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경상도 청도에서 봉기한 김사미와 멀지 않은 울산에서 일어난 효심은 자연스럽게 한 무리를 이루었고 신라를 부활시키겠다고 호기롭게 주장했다. 그들도 아마 동향의 집권자인 이의민과의 전략적 제휴를 염두에 두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의민이 그들과 내통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들 이지순(李至純)이 정부 진압군에 관한 정보를 비밀리에 전달한 덕분에 반군은 여러 차례 관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그 해 말에 파견된 대규모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몇 년 뒤 이의민이 실각한 데는 이미 이 사건에서 헛다리 짚은 후유증이 컸을 것이다.
이제 집권자는 민란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의민을 살해하고 집권한 최충헌도 예외가 아니다. 불행이라면 그에게 주어진 시험문제는 그 전까지의 어느 것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관리에서 농민으로, 농민에서 천민으로 반란 주동자의 신분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면, 그 저점은 바로 노비가 될 것이다. 과연 최충헌이 해결해야 할 민란은 바로 고려 사회의 최하층인 노비들이 일으키게 된다.
사실 최충헌은 처음부터 자기가 이전의 깡패 같은 무신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애썼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그는 자신이 지닌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나, 국가 운영을 위해서나 무엇보다 질서를 회복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말하자면 권력을 누리는 데 급급했던 이의민보다는 권력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려 했던 경대승(慶大升)의 해법을 따른 것이다(실제로 최충헌은 경대승과 더불어 무신 집권자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며, 처음에는 문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封事) 10조라는 개혁안을 올렸는데, 아마도 그는 명종이 그것을 제대로 시행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듬해인 1197년에 그것을 빌미로 명종을 폐위하고 후임 허수아비로 명종의 아우인 신종(神宗, 재위 1197 ∼ 1204)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신하가 국왕을 갈아치우는 하극상이 일어났으니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번질 것은 이미 각오한 일, 그러나 하필이면 수도 개경의 노비들이 봉기할 줄은 최충헌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 말하는 짐승 고려시대의 노비 상속문서다. 물론 노비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게 아니라 귀족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를 자식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는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를 말하는 ‘짐승’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신정권으로 윗물이 흐려지자 아랫물도 탁해져서 노비까지 들고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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