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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이루어지는 조건 - 2. 자신을 개방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본문

연재/배움과 삶

수업이 이루어지는 조건 - 2. 자신을 개방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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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을 개방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경제적 관념이 대학평가에도 도입되면 교육은 사라지는 현상이 똑같이 재현된다. 지금의 문부과학성은 각 대학에 16살짜리 학생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라고 독촉한다.

 

 

15년 2월 1일에 개풍관에서 들은 강연이다. 함께 하진 못했지만, 사진만으로도 그 때의 뜨거움이 보인다.

 

 

 

대학평가가 오히려 대학을 병들게 하다

 

어느 대학이건 강의계획서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어서, 아이들이 강의계획서를 보면 이 과목을 배우면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교수가 연구를 신청할 때에도 몇 개월 후엔 무엇이 연구되고 3년 후엔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야만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나 또한 2006년에 6년의 중장기 계획을 세워,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성과가 나올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보면 6년 뒤에 무엇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연구비를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뻔한 성과가 나오는 사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가시적인 성과만 낼 수 있는 사업에만 연구가 몰리다 보니, 오히려 연구다운 연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공교육정상화 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관심을 가지면 가질 수록 교육은 왜곡되고 있다.

 

 

 

소비자 마인드, 연구를 망치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며, ‘시장원리를 교육에 도입하여 되살리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초중등교육은 배움의 가치를 잃어갔고, 고등교육은 진리의 전당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연구는 사라져 학위공장이 되고 말았다. 시장원리란 애초에 가시적인 성과만을 중시하는 것으로 교육이나 연구와는 달리 반대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연구란 직관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연구하면 무언가 발견할 것 같은 직감으로 시작된다. 도무지 말로는 할 수 없지만 무언가가 잡아끄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해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혁신적인 연구가 가능해진다.

인간에겐 이처럼 시간을 넘나들며 공간을 뛰어넘어, 아직 그 끝에 닿진 않았지만 그곳에 가면 뭔가 좋은 것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 능력을 믿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거기로 가면 좋은 게 있다는 직감으로 연구해왔기에 학문은 발전해온 것이다. 연구의 원래 성격이 이런데도 지금 당장 가시적인 성과물로, 현재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다고 가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건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직관으론 좋은 게 느껴지지만 그걸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그 속에 배움이 있고 연구가 있다.

 

 

플라톤Plato(B.C. 428 ~ B.C.348)메논Μένων인간은 해결방법을 아는 것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며, 전혀 풀 수 없는 문제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이 말처럼 인간은 이걸 어떻게 푸는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국엔 풀릴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나, 충분히 시간만 확보되면 결국 해결될 것이라 생각되는 것만을 문제로 여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연구자보다 세세한 항목을 빈틈없이 맞출 수 있는 연구자를 필요로 한다. 그게 10년 동안 진행되어온 학술행태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만 연구로 인정된다고 하는 것은 소비자 마인드의 확장이며, 그런 상품에만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는 것은 시장원리의 단면이며, 그걸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곳이 바로 문부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문부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원하는 연구는 좀 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민간기업이 지불한 돈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곳에 쓰일 뿐, 결과가 예측되지 않는 곳엔 전혀 쓰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이니 직감으로 시작되는 혁신적인 연구는 지원조차 받지 못하게 됐으며,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연암은 북학파 학자로 직관에 따라 청을 배우려 했다. 그때도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이 있었으니, 지금의 학문풍토와 얼핏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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