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②강: 청중의 입장에서 강의의 제목이 바뀐다는 것
강의의 커리큘럼은 어찌 보면 강사와 수강생 사이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강생들은 강사가 미리 공지한 강의 제목과 계획표를 보고 강의를 들을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강의에서 강의 제목이 바뀐다는 것은 강사의 준비가 소홀했다거나, 강의 진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부득이하지 않고선 강의 제목을 바꾸거나, 계획을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어찌 보면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니 말이다.
▲ 트위스트 교육학 2강 제목이 바뀌었다. 과연 무슨 일일까?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이 바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정한 대로만 한다’는 건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학창 시절에 수업을 들어봐서 ‘판에 박힌 수업’, ‘진도표에 명시되어 있기에 그만큼 진도를 나가야 하는 수업’이 얼마나 지루한 수업이며, 얼마나 각 반 학생들을 무시한 수업인지 잘 알고 있다. 그건 애초에 학생들을 들러리로 앉히고 형식을 갖춰 ‘이렇게 수업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계획표를 짜서 그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복적인 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과 상관없이 수업이 이미 정형화되어 있다면, 그건 동영상 강의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래서 학생과 상호작용하는 수업을 하고 싶은 교사라면, 수업의 틀은 유지하되 학생들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업을 변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며 배려하며 소통하려는 적극성이니 말이다.
동섭쌤은 2강이 시작되기 전에 강의제목을 바꾸며 “원래 제목은 이게 아니었는데 저번 주에 1강을 진행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제목과 내용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페이스북에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고, 강의 시간엔 “저번 주에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나오고 있었는데, 시간을 잘 조절하지 못해 미처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강의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 강의 제목이 바뀌었다는 건, 축복일까? 아닐까?
청중과 호흡하기 위해 강의 제목을 바꾸다
에듀니티에서 하는 강의냐, 일반학교 학부모들의 초청에 의한 강의냐에 따라 강의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강의를 진행하며 내용은 청중과의 호흡으로 다양한 변곡점을 그리며 흘러가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보면 ‘살아 있는 강의’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우치다쌤은 『스승은 있다』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었다.
지금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이끌어온 것은 처음으로 준비했던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라는 욕망도 아니고(왜냐하면 당신이 타인의 마음속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당신이 추측한 상대방의 ‘욕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이야기한 것은 ‘당신이 이야기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이 듣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라 당신이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닐까”란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인 것입니다.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이끈 것은 대화에 참여한 두 당사자 중 그 어느 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작’도 아닙니다.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둘 중 누구도 아닌 그 누군가입니다.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말할 생각도 없던 이야기들이 끝없이 분출되는 듯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처음부터 형태를 갖춘 ‘내 생각’ 같은 미묘한 맛을 풍기는 말이 그 순간에는 넘쳐 나옵니다.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치다 타츠루 저, 박동섭 역, 민들레 출판사, 『스승은 있다』, pp58~59
대화를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말을 꺼냈을지라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그러다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진행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 때 우린 얘기하려는 본론을 잊고 ‘어먼 소리만 탱탱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치다쌤은 그런 대화야말로 진정한 대화이고, 그 때엔 나와 너가 아닌 제삼자가 말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삼자란 애초에 내가 말하고자 했던 말도 아니고, 상대방이 듣고 싶었던 말도 아닌,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을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강의도 대화와 비슷하다. 물론 강의라는 게 애초부터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지만, 청중과 호흡하면서 강의 내용에 엇나감이 발생하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야기들로 분기되며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용도 훨씬 풍성해지고, 강의실엔 활기가 샘솟는다.
▲ [스승은 있다] 책의 원제목은 [아무 것도 비판하지 않는 교육론]이다. 원제목의 책을 들고 있는 동섭쌤.
물론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강사가 준비를 해오지 않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까먹고 횡설수설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선 수영을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수영장에 들어가면 물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준비를 잘 해오지 않아 어먼 소리나 탱탱하는 강사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년간 수영을 하여 물에서 활동하는 게 육지를 걷는 것만큼이나 쉬워진 사람의 경우, 굳이 영법을 지키며 동작하지 않고 대충 동작을 할지라도 물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건 곧 준비를 철저히 했으되 상황과 청중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하는 강사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섭쌤이 강의 제목을 ‘왜 지금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에서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으로 바꾸며, 변주하는 자유로움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 무술 또한 배울 때는 초식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초식을 버려야 한다. 그걸 보여준 [와호장룡]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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