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왕망의 퇴출과 외효와 공손술의 섬멸하며 후한의 기틀을 잡은 유수
① 왕망 퇴출을 위한 남양봉기군
1. 유수(劉秀)의 형 유인(劉縯)은 왕망의 신(新)에 반대해 여러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모으기 시작함.
2. 군대를 통솔할 인물을 추대하려는 논의 가운데 유연의 명석함과 지나친 결단력을 두려워하여 유현을 경시장군으로, 유연을 대사도(大司徒), 유수를 장군으로 삼음(이후 유연은 경시제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름).
3. 유수의 3천 명의 군대가 왕망의 40만 대군을 기습하여 성공하자 왕측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주변세력들이 왕망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남.
4. 남양봉기군 내에서 유현이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유수는 오히려 사죄하며 유유자적하자 유현도 곤양의 싸움에서 수훈을 세운 유수에 대해서 트집 잡을 일이 없었음. 그래서 유수를 파로장군(破虜將軍)에 임명하고 무신후(武信侯)에 봉함.
5. 남양봉기군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왕망을 살해하고 장안을 함락시킴(新 건립 15년 만에 멸망함).
② 경시제(更始帝)의 씁쓸한 최후와 유수의 집권
1. 경시제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으나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서 민심을 잃음.
2. 왕망 정권 타도에 앞장선 적미군은 유분자(劉盆子)를 천자로 추대하여 경시제를 죽이고 정권을 탈환했으나 오합지졸로 신망을 잃음.
3. 이때 유수는 하북 일대에 장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어서 25년에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바꿔 적미군을 진압하고 마지막 남은 반란군 농의 외효와 공순술을 섬멸함.
4. 낙양을 수도로 삼아 한 제국을 부흥시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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