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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밀양 - 9. 에필로그: 송강호에게 보내는 박수 본문

연재/시네필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9. 에필로그: 송강호에게 보내는 박수

건방진방랑자 2020. 2. 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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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에필로그: 송강호에게 보내는 박수

 

 

 

무미건조하기에 더욱 개성 넘치는

 

고향, 가족, 교회 - 근대인들의 욕망은 이 세 가지 회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말하듯, 그 모든 표상이 거짓된 판타지에 불과하다면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신애의 삶은 진정 구제불능이란 말인가? 원작에선 그렇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아주 실낱같은 단서를 남겨 두었다. 카센터 사장 종찬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신애다. 칸의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감탄할 만했다. 불안과 냉소, 허영과 절망 사이를 매끄럽게 넘나드는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관객과의 최소한의 소통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진정 경이로웠던 건 송강호의 연기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감독의 집요함과 전도연의 기량에 탄복을 거듭하다가 문득 한 명의 주인공이 뇌리를 스쳤다. , 송강호도 나왔지, 근데 송강호가 어땠더라? 잡힐 듯 말 듯, 그의 잔상들이 언뜻언뜻 지나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 그렇지. 영화에서 그가 맡은 배역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시종일관 등장하긴 하지만, 그저 배경처럼 존재해야 하는 인물. 처음엔 송강호가 이런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가 않았다. 송강호는 워낙 개성이 넘치는 배우라 단역이건 주역이건 일단 등장하면 화면을 압도해 버린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있는 둥 없는 둥한인물을 맡다니, 그것부터가 일단 놀라운 일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카센터 사장, 노총각 종찬 역이다. 교양미 제로, 유머지수 꽝, 그렇다고 순정파라 하기도 뭣하고, 연애의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그렇고 그런 속물이다. 다방 종업원한테 브라자가 어쩌구 하는 허접한 농담이나 하고, 자기 혼자 집안에서 가라오케를 즐기고, 그러니 그가 하는 사랑이란 게 여주인공 신애의 주변을 하릴없이 맴도는 게 전부다. 피아노학원, 교회, 감방, 병원 등. 어디든 따라다니긴 하지만, 낭만적 멘트는 고사하고 관객의 동정을 자아낼 만한 애틋한 시선 한번 제대로 날리질 못한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일까 싶은,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사랑이다. 개성 넘치는 배역을 소화해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런 개성도 없이, 그저 타인의 배경이 되어 주는 역할은 더더욱 어렵다. 자칫하면 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릴 테니까. 한마디로 있는 듯 없는 듯 아슬아슬한 경계를 표현해야 한다. 송강호는 바로 이 난감한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것이다.

 

 

 

 

 

그냥 사는기지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삶 또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튀지 못해 안달을 하는 시대에 결코 튀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일상을 유지하기란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선 결코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모든 정신적 거처를 잃어버린 신애를 지탱하는 건 결국 종찬으로 대변되는 멋대가리 없는 일상 외에는 달리 없다.

그런 점에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비밀의 태양이란 어떤 낭만도, 기교도 없이, 기꺼이 타인의 배경이 되어주는 남루한 일상’, 바로 그 어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남루한 대신 어떤 망상에도 붙들리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순간들을 채워가는 삶 말이다. 신애가 밀양의 뜻이 뭔지 아냐고 묻자 종찬은 이렇게 대답한다. “뜻요? 뭐 우리가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

그렇다. 그냥 사는 거다. 뜻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뜻 때문에 거짓된 환상이나 자기기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가 신애의 곁을 계속 지킬 수 있었던 저력(?)도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닐지. 어떻든 존재와 일상에 대한 이런 통찰이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송강호의 연기 덕분이다. 개성을 완벽하게 지움으로써 일상의 저력을 멋지게 표현해낸 그에게 조용한 박수를 보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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