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그때의 지금인 옛날 - 2. 동심으로 돌아가자 본문

책/한문(漢文)

그때의 지금인 옛날 - 2. 동심으로 돌아가자

건방진방랑자 2020. 3. 31. 14:30
728x90
반응형

2. 동심으로 돌아가자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나고 붉고 수염이 달린 의젓한 관운장關雲長의 소상塑像이 있다. 사녀士女가 학질을 앓게 되면 그 좌상座床 아래에 들여놓는데,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겨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꼬맹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위엄스러운 소상을 모독하는데, 눈동자를 후벼 파도 꿈벅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대도 재채기 하지 않으니,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빚은 소상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수박의 겉을 핥는 자나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맛을 이야기할 수가 없고,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 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함께 계절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형상을 꾸미고 의관을 입혀 놓더라도 어린 아이의 진솔함을 속일 수는 없다.

雩祀壇之下, 桃渚之衕, 靑甍而廟, 貌之渥丹而鬚, 儼然關公也. 士女患瘧, 納其床下, 𢥠神褫魄, 遁寒祟也. 孺子不嚴, 瀆冒威尊, 爬瞳不瞬, 觸鼻不啑, 塊然泥塑也. 由是觀之, 外舐水匏, 全呑胡椒者, 不可與語味也, 羨隣人之貂裘, 借衣於盛夏者, 不可與語時也. 假像衣冠, 不足以欺孺子之眞率矣.

남산 아래 도저동에 가면 관운장의 사당이 있다. 관운장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관제신앙關帝信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되었던 명나라 군인들에 의해 조선에 전파되어, 비교적 널리 숭신되었다. 남산 아래 있던 관운장 사당을 남묘南廟라 했고, 지금 신설동 길가에 꽤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동묘東廟라 했다.

도성의 남녀들은 학질에 걸리면 으레 관운장의 사당을 찾는다. 학질 걸린 환자가 관운장의 소상 앞에 서게 되면 그 무섭고 엄위한 관운장의 기상에 질려 정신이 다 나가고 넋이 빠져 그만 학질 기운이 간데없이 쑥 빠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한테는 이렇듯 영험 있는 관운장의 소상이 꼬맹이들 앞에서는 영 맥을 못춘다.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어른들처럼 무서워 벌벌 떨기는커녕, 그 위로 기어 올라가 눈동자를 찔러도 보고 콧구멍도 쑤셔 보지만, 그것은 눈도 껌뻑이지 못하고 재채기도 하지 못하는 그저 진흙으로 빚어놓은 소상일 뿐이다. 아이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보는데, 어른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관념을 덧씌워 두려움의 대상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나서도 연암은 예의 장광설을 계속 늘어놓는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수박이야 달고 시원한 것이지만, 겉만 핥고 있는데서야 그 맛을 어찌 알 수 있겠나? 후추를 통째로 삼킬진대 그 맵고 톡 쏘는 맛을 무슨 수로 느낄 수 있겠나? 제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방법을 알아야 한단 말일세. 이와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좋은 것도 적재적소에 놓일 때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이 제 아무리 좋기로소니, 한 여름에 그것을 빌려 입는다면, 따뜻하기는커녕 온몸에 땀띠만 날 것이 아닌가? 옛 사람의 글이 제 아무리 좋다 해도, 지금 여기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읽는 이에게 괴로움만 안겨줄 뿐일 걸세. 형상을 꾸미고 그럴듯한 의관을 입혀 놓는다 해도 그것은 학질 걸린 어른들에게나 통할 뿐 어린아이들의 천진스런 안목마저 속일 수는 없다고 보네.”

이쯤에서 우리는 하늘이 검다고 가르치는데 불만을 품고 천자문 읽기를 거부하던 꼬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동심으로 돌아가자! 동심의 진솔함을 되찾자! 이것은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 문화계의 풍토 위에 내던지는 연암의 일갈이다. 다시 연암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대저 시절을 근심하고 풍속을 병통으로 여기는 자에 굴원屈原 같은 이가 없었지만, 초나라의 습속이 귀신을 숭상하였으므로 그의 구가九歌에서는 귀신을 노래하였다. 나라가 진나라의 옛 것을 살펴, 그 땅과 집에서 임금 노릇하고, 그 성읍을 도읍으로 삼으며, 그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면서도 삼장三章의 간략함만은 그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제 무관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의 풍기風氣는 땅이 중국과 다르고, 언어와 노래의 습속은 그 시대가 한나라나 당나라가 아니다. 만약 그런데도 중국의 법을 본받고, 한나라나 당나라의 체재를 답습한다면, 나는 그 법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담긴 뜻은 실로 낮아지고, 체재가 비슷하면 할수록 말은 더욱 거짓이 될 뿐임을 알겠다.

夫愍時病俗者, 莫如屈原, 而楚俗尙鬼, 九歌是歌. 按秦之舊, 帝其土宇, 都其城邑, 民其黔首, 三章之約, 不襲其法. 今懋官朝鮮人也. 山川風氣, 地異中華, 言語謠俗, 世非漢唐. 若乃效法於中華, 襲體於漢唐, 則吾徒見其法益高而意實卑, 軆益似而言益僞耳.

굴원이야 말로 시대를 근심하고 시속時俗을 염려했던 충신이었는데도, 당시 초나라의 습속이 귀신을 널리 숭상하였기에 그는 구가九歌에서 귀신을 끌어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지 않았던가? 귀신의 일을 믿어서가 아니라, 당시 독자들에게 자신의 터질 듯한 답답함을 전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일세. 그런데도 그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였다하여 우리 유가儒家의 지취旨趣는 아니라고 무작정 비방만 할 터인가? 어디 그뿐인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진나라 땅에서 진나라 백성으로 새 왕조를 세웠으되, 다만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잔혹한 법만은 간략히 고쳐 약법삼장約法三章의 변혁을 시도하였네. 그리하여 한나라는 겉보기에는 진나라 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으나, 완전히 새로울 수가 있었다네.

그렇다면 이치는 분명하지 않은가? 귀신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고 하면 굴원의 문학은 어디에다 발을 붙일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귀신을 노래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귀신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 하려 했는가 일세. 땅도 그대로요 도읍도 그대로며, 백성도 그 백성이로되, 법은 그 법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한나라가 장구히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비결이라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9911

0110

12122

13120

한시미학산책

우리 한시를 읽다

소화시평이 준 공부의 변화

교보문고의 5만 년된 나무 테이블 알아?

1. 무관의 시는 옛날의 시가 아닌 지금의 시

2. 동심으로 돌아가자

3. 지금ㆍ여기의 이야기를 담아낸 무관이 지은 시

4. 동심으로 돌아가자, 처녀로 돌아가자

5. 동심의 중요성을 외친 이지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