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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본문

연재/시네필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건방진방랑자 2020. 2. 27.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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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용서하겠다는 그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그놈

 

결국 그녀는 들꽃을 한아름 들고 교도소엘 찾아간다. 그녀의 예상(혹은 바람)과는 달리 죄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다. 당황하는 신애. 하지만, 그녀는 선언한다. 당신을 용서하겠노라고. 그런데 죄인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

 

 

원장: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신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구요?

원장: ,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라고 나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용서받으니 이래 편합니다. 내 마음이. 요새는 기도로 눈뜨고 기도로 눈감습니다.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합니다.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

 

 

오 마이 갓!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보다 진도가 더 빠르다.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고, 자신이 교회에 나가게 된 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준 거란다. 이럴 수가! 신애는 교도소를 나와 들꽃을 땅에 던지고 쓰러진다. 그녀가 붙들고 있던 망상의 그물이 갈가리 찢겨져 버린 것이다.

 

 

 

 

그녀의 이 처절한 절망감은 대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신은 나를, 희생자인 나를 더 사랑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그 신의 은총으로 죄인을 용서하고, 그 용서를 통해 더더욱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가로채 버리다니.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놀아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또한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원작 벌레이야기를 빌려 말하면, 신애는 그의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애를 지탱시켜주었던 주님의 사랑이라는 판타지도 함께 증발해 버렸다. 남는 것은 신에 대한 혐오감. 그녀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목사님과 신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 ~?”

그러고 나서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싱크대 밑에 있는 지렁이를 보고 놀란 것이다. 지렁이한테 놀라 기겁할 정도로 그녀의 몸은 나약했다. 그렇게 나약한 몸으로 어떻게 원수를 용서할 수 있으리오. 다시 말하지만, 용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그리고, 그 능력이란 오직 신체를 통해서만, 건강과 행복을 통해서만 가늠될 수 있다. 하지만 신애의 몸은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하다가 뛰쳐나가 가슴을 쥐어뜯던 그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신의 사랑은 그녀에게 어떤 신체적 힘과 능력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이란!

신애가 상상한 건 아마도 이런 장면이었으리라. 죄인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은 신의 특별한 가호에 힘입어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 죄인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제해주리라. 그러면 하느님은 그런 훌륭한 사명을 완수한 자신에게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주리라. , 그녀의 사유 안에선 죄인이 직접 하느님과 교통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인과의 그물망 속에 펼쳐져야 하는 용서

 

여기서 꼭 환기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에 있어 주체와 대상, 죄와 벌, 은혜와 용서 사이의 경계가 너무 선명하다는 점이다. 진정, 용서가 가능하려면 이 각각의 사항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인과의 그물망이 펼쳐져야 한다. 무엇보다 신애가 자신의 망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설정한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사건을 야기한 욕망의 배치를 그대로 고수하고서야 어찌 용서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독교적 틀 안에서는 각각의 경계들이 더더욱 선명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형상 자체가 질투와 변덕, 지독한 편애와 가혹한 보복, 둘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까닭이다. 이 적대적 양분법의 토대를 고수하는 한, ‘진정한 용서란 절대 불가능하다. 더구나 신애처럼 신의 사랑을 연애의 구조와 오버랩시키는 경우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가 죄인을 만나고 나서 무너진 건 이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귀환할 곳이 없다.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최후의 의지처마저 사라진 벼랑 끝에 서고 만 것이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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