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벗 붓 모영의 이야기
모영전(毛穎傳)
한유(韓愈)
2. 모영을 사랑한 진시황, 모영의 최후
모영의 능력과 그 능력을 사랑한 진시황제
穎爲人强記而便敏, 自結繩之代, 以及秦事, 無不纂錄. 陰陽ㆍ卜筮ㆍ占相ㆍ醫方ㆍ族氏ㆍ山經ㆍ地志ㆍ字書ㆍ圖畵ㆍ九流ㆍ百家天人之書, 及至浮圖ㆍ老子ㆍ外國之說, 皆所詳悉. 又通於當代之務, 官府簿書ㆍ市井貨錢注記, 惟上所使, 自秦皇帝及太子扶蘇ㆍ胡亥ㆍ丞相斯ㆍ中車府令高, 下及國人無不愛重. 又善隨人意, 正直邪曲功拙, 一隨其人, 雖見廢棄, 終黙不洩. 惟不喜武士, 然見請, 亦時往.
累拜中書令, 與上益狎, 上嘗呼爲中書君. 上親決事, 以衡石自程, 雖宮人, 不得立左右, 獨穎與執燭者常侍, 上休方罷. 穎與絳人陳玄, 弘農陶泓, 及會稽楮先生, 友善, 相推致, 其出處必偕. 上召穎, 三人者不待詔, 輒俱往, 上未嘗怪焉.
관직생활의 마지막과 모영의 최후
後因進見, 上將有任使, 拂拭之, 因免冠謝. 上見其髮禿, 又所摹畵, 不能稱上意. 上嘻笑曰: “中書君, 老而禿, 不任吾用. 吾嘗謂君中書, 君今不中書邪?” 對曰: “臣所謂盡心者.” 因不復召.
歸封邑, 終于管城. 其子孫甚多, 散處中國夷狄, 皆冒管城, 惟居中山者, 能繼父祖業.
▲ 우리도 문방사우라고 하여 이들을 한 묶음으로 본다.
해석
모영의 능력과 그 능력을 사랑한 진시황제
穎爲人强記而便敏, 自結繩之代,
모영의 사람됨이 박람강기하고 민첩하여 문자가 없던 시대에서부터
以及秦事, 無不纂錄.
진나라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아 기록하지 않은 게 없었다.
陰陽ㆍ卜筮ㆍ占相ㆍ醫方ㆍ族氏ㆍ山經ㆍ地志ㆍ字書ㆍ圖畵ㆍ九流ㆍ
음양서와 점괘서, 관상서, 의학서, 족보, 지리지, 사전, 지도, 강 지형도,
百家ㆍ天人之書, 及至浮圖ㆍ老子ㆍ外國之說,
제자백가서에서부터 불교서, 노장서, 외국의 서적까지
皆所詳悉.
다 상세히 갖추었다.
又通於當代之務, 官府簿書ㆍ
또한 당대의 공문까지 통달하여 관청의 문서와
市井貨錢注記, 惟上所使.
저자거리의 수입지출내역서를 임금이 분부대로 따라서 썼다.
진시황제와 태자 부소와 호해, 그리고 승상 이사,
中車府令高,
중거부령 조고에서부터
下及國人無不愛重.
아래로 나라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를 애지중지하지 않음이 없었다.
累拜中書令, 與上益狎.
여러 번 중서령에 재수되어 시황제와 더욱 친밀해졌다.
上嘗呼爲中書君.
그래서 시황제는 일찍이 쓰기에 안성맞춤이란 뜻에서 ‘중서군’이라 불렀다.
上親決事, 以衡石自程,
시황제가 친히 일을 결재할 적엔 저울로 그날 결재할 문서를 달아【衡石量書: 서류를 달아 매일 일정량을 결재한다는 뜻으로, 秦始皇은 신하를 불신하여 모든 서류를 직접 결재하였음.】 결재하였기에
雖宮人, 不得立左右.
비록 궁궐 사람이라 해도 좌우에 서 있을 수 없었다.
獨穎與執燭者常侍,
그런데 유독 모영과 촛불을 잡은 이만 항상 곁에서 모셨고,
上休方罷.
시황제가 쉬어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었다.
穎與絳人陳玄, 弘農陶泓,
모영은 강나라 사람 진현(먹)과 홍농사람 도홍(벼루)와
及會稽楮先生, 友善, 相推致,
회계사람 저선생(종이)와 좋은 벗이 되어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었고
其出處必偕.
심지어는 나갈 때나 들어갈 때에도 반드시 함께할 정도였다.
上召穎, 三人者不待詔,
그래서 시황제가 영을 부르면, 세 사람이 부르길 기다리지 않고도
輒俱往, 上未嘗怪焉.
문득 함께 가는데도 시황제는 일찍이 그걸 기이하다고 여기질 않았다.
관직생활의 마지막과 모영의 최후
後因進見, 上將有任使,
훗날에 시황제를 나아가 볼 적에 시황제는 장차 큰일을 맡기려
拂拭之, 因免冠謝.
그를 뽑아 쓰려고 하자, 모영은 관을 벗고서 사양했다.
上見其髮禿,
시황제가 모영의 머리가 벗겨진 것을 보았고,
又所摹畵, 不能稱上意.
또한 그가 본떠서 그린 글이 자신의 뜻에 알맞지 않은 것을 보았다.
上嘻笑曰: “中書君, 老而禿,
시황제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중서군은 늙고 대머리가 되어
不任吾用.
나의 씀을 감당치 못하는구려.
吾嘗謂君中書, 君今不中書邪?”
내가 일찍이 그대를 ‘쓰기에 안성맞춤’이라 불렀는데, 그대는 이제 쓰기에 안성맞춤이 아닌 것이오?”
對曰: “臣所謂盡心者.”
모영이 “신은 ‘마음을 다한 자’라 말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因不復召.
그 후로 다시는 모영을 부르질 않았다.
歸封邑, 終于管城.
봉분 받은 읍으로 돌아와 관성에서 생을 마쳤다.
其子孫甚多, 散處中國夷狄,
그 자손은 심히 많아져 중국과 외국에 흩어져 살았지만
皆冒管城,
모두 다 “저는 관성사람입니다”라고 내세웠으며,
惟居中山者, 能繼父祖業.
오직 중산에 사는 후손만이 모영의 가업을 승계하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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