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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 - 1. 그림에 벽(癖)이 있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 본문

산문놀이터/중국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 - 1. 그림에 벽(癖)이 있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

건방진방랑자 2020. 8. 30.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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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에 새겨진 네 보살을 보관하기 위한 누각을 만들다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

 

소식(蘇軾)

 

 

1. 그림에 벽()이 있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

 

作僧家文字多矣. 今獨取此, 以後一半議論反覆之妙故也. 捨施不足信而其守畵之說. 愈轉愈妙.

! 吾之所以因此有所感者, 豈獨菩薩畵而已哉.

 

 

그림을 좋아하던 아버지

始吾先君, 於物無所好, 燕居如齋, 言笑有時, 顧嘗嗜畵, 弟子門人, 無以悅之, 則爭致其所嗜, 庶幾一解其顔. 故雖爲布衣, 而致畵與公卿等.

 

선친이 최고로 좋아하던 문짝의 그림

長安有故藏經龕, 唐明皇帝所建. 其門四達八板, 吳道子. 陽爲菩薩, 陰爲天王, 凡十有六軀. 廣明之亂, 爲賊所焚,

有僧忘其名, 於兵火中, 拔其四板以逃, 旣重不可負, 又迫於賊. 恐不能皆全. 遂竅其兩板以受荷, 西奔於岐, 而託死於烏牙之僧舍, 板留於是, 百八十年矣.

客有以錢十萬, 得之以示, 歸其直而取之, 以獻諸先君. 先君之所嗜, 百有餘品, 一旦以是四板爲甲.

治平四年, 先君沒于京師, 自汴入淮, 泝于江, 載是四板以歸.

 

 

 

 

 

 

해석

作僧家文字多矣.

소동파가 지은 불교의 글이 많다.

 

今獨取此,

이제 유독 이 글을 취한 것은

 

以後一半議論反覆之妙故也.

후반부 의론이 반복되어 오묘하기 때문이다.

 

捨施不足信而其守畵之說.

사시는 믿을 수 없지만 그림을 지키는 말이

 

愈轉愈妙.

더욱 전환되었고 더욱 오묘하다.

 

! 吾之所以因此有所感者,

! 나는 이로 인해서 느낀 것이 있으니

 

豈獨菩薩畵而已哉.

어찌 유독 보살각의 그림 뿐이겠는가.

 

 

 

그림을 좋아하던 아버지

 

始吾先君, 於物無所好,

처음에 우리 선친께선 물건에 좋아하는 게 없어

 

燕居如齋, 言笑有時,

일상적으로 거처할 적에 재계한 듯했고 말하고 웃음엔 때가 있다고 하셨지만

 

顧嘗嗜畵, 弟子門人,

다만 일찍이 그림을 즐기시니 제자와 문인이

 

無以悅之,

선친을 기뻐하게 하지 못하면

 

則爭致其所嗜, 庶幾一解其顔.

다투어 즐기는 것을 다하여 한 번 얼굴을 펴길 바랐었다.

 

故雖爲布衣, 而致畵與公卿等.

그러므로 선친은 비록 포의가 되었음에도 그림은 공경과 대등함에 이르렀다.

 

 

 

선친이 최고로 좋아하던 문짝의 그림

 

長安有故藏經龕, 唐明皇帝所建.

장안에 오랜 장경감장경감(藏經龕): 불경(佛經)을 보관하는 감실(龕室)을 이른다. 감실(龕室)은 경전(經典)이나 조상(彫像), 위패 등을 안치하는 작은 공간[]을 이르는데, 벽감(壁龕)과 단독 감실(龕室)이 있다. 벽감(壁龕)은 벽면이나 기둥면 등 수직면에 설치된 우묵한 공간으로, 주로 불상(佛像)을 안치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는데, 석굴암(石窟庵)의 말굽형(무지개형) 벽감이 유명하다. 단독 감실(龕室)의 종류 중에는 정면에 문을 달고 내부에 불상을 따로 만들어 안치한 가옥형(家屋形) 또는 전각형(殿閣形)의 불감(佛龕)들이 있는데, 여기서 말한 장경감(藏經龕)도 이러한 가옥형(家屋形) 불감(佛龕)이었으나, 다만 그 크기가 거의 전(殿)에 해당될 정도의 규모인 듯하다.이 있는데 당나라 명황제명황제(明皇帝): () 나라 6대 황제인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685~762)의 별호이다. 현종(玄宗)은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재주와 무략이 뛰어나, 중종(中宗)을 시해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황후 위씨(韋氏)를 토벌한 공으로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도숭(姚崇)ㆍ장구령(張九齡) 등 뛰어난 재상들을 등용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고 중흥의 군주로 불렸다. 그러나 만년에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이임보(李林甫)ㆍ양국충(楊國忠) 등 간신들로 하여금 국정을 전횡하게 하여 끝내는 천보(天寶)의 난()’이라 불리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불러들였다. 신당서(新唐書)』 「현종본기(玄宗本紀)가 세운 것이다.

 

其門四達八板, 吳道子.

그 문은 네 방향으로 통하고 여덟 개의 문짝엔 모두 오도자오도자(吳道子):?~759. () 나라의 유명한 화가로 흔히 화성(畫聖)으로 불린다. 이름이 도현(道玄)이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우주(禹州)인 양적(陽翟) 사람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민간의 화공(畫工)으로 있다가 점차 명성을 떨쳐 연주(兖州) 하구현(瑕丘縣)의 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낙양(洛陽)에 살면서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벽화를 그리는 일에 종사하였다. 개원(開元) 연간에 뛰어난 솜씨가 알려져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공봉(供奉)과 내교박사(內教博士)를 역임하였다. 그는 여러 방면의 그림을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인물화와 산수화에 발군이었으며, 벽화에도 뛰어나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남겼다.의 그림이 있었다.

 

陽爲菩薩, 陰爲天王,

문짝의 앞면엔 보살을 그렸고 문짝의 뒷면엔 천왕을 그려

 

凡十有六軀. 廣明之亂, 爲賊所焚,

무릇 16개의 몸이지만 광명의 난리에 적에게 불타버렸다.

 

有僧忘其名, 於兵火中,

이름을 잊은 스님이 있어 불난 중에

 

拔其四板以逃, 旣重不可負,

4개의 문짝을 뽑아 도망갔지만 이윽고 무거워 짊어질 수 없었고

 

又迫於賊. 恐不能皆全.

또 적에게 쫓겨 모두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遂竅其兩板以受荷,

마침내 두 개의 문짝에 구멍내 받아 짊어지고

 

西奔於岐, 而託死於烏牙之僧舍,

서쪽으로 기산으로 달아나 오아의 사찰에 의탁하였다가 죽으니

 

板留於是, 百八十年矣.

문짝이 여기에 머문 지 180년째였다.

 

客有以錢十萬, 得之以示,

손님이 십 만의 돈으로 그것을 사고서 나에게 보여줬는데

 

歸其直而取之, 以獻諸先君.

내가 그 값을 치루고 그림을 취하여 선군께 드렸다.

 

先君之所嗜, 百有餘品,

선군께서 즐기던 것이 100여개의 그림이 있는데

 

一旦以是四板爲甲.

하루아침에 이 네 문짝을 최고로 여기셨다.

 

治平四年, 先君沒于京師,

치평치평(治平): () 영종(英宗)의 연호로 1064년부터 1067년까지이다 4년에 선군께선 서울에서 돌아가셔

 

自汴入淮, 泝于江,

나는 변경(汴京)으로부터 회수(淮水)로 들어가 양자강을 거슬러

 

載是四板以歸.

이 네 문짝을 싣고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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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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