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건국신화②
유리왕 대에 이르러 신라 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므로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옛날에 유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문학과 관련이 깊었거나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황조가(黃鳥歌)라는 청승맞은 연가를 지어 한반도 최초의 서정시인이 된 사람이 고구려의 유리왕이라면, 신라의 유리왕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그에 못지않은 솜씨를 발휘한다(한자로는 고구려의 유리가 琉璃, 신라의 유리가 儒理로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이두문일 테니 사실 같은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대도 엇비슷해서 두 사람 다 1세기 초반의 왕이다). 또한 신라의 유리왕은 행정에도 남다른 감각을 선보인다. 일찍이 건국의 토대가 된 여섯 마을을 6부로 만들어 각각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고(성씨가 귀족들에게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삼국시대 중반부터이므로 이 사실은 믿기 어렵다), 그 전까지 고구려에서 본뜬 대보 정도의 초보적 직책밖에는 없던 관직을 새로 창설해서 6부의 원로들을 정식 관리로 기용한다.
문화를 사랑한 군주답게 유리왕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한가위 명절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리왕은 6부를 둘로 나누어 8월 15일 무렵 양편에 속한 여자들로 길쌈 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나고 벌어진 파티를 가배(嘉俳)라 했는데, 여기서 가위 즉 한가위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회가 상당히 치열했던지 진 편의 한 여자가 회소곡(會蘇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지만 그 관습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최대의 명절과 사흘의 공휴일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평화로웠던 유리왕의 시대가 끝나자 왕위를 이은 사람은 미리 예약되어 있던 탈해다. 묘한 것은 이 시기다. 유리왕 때의 신라 사회의 모습이 제법 사실적으로 알려진 것에 어울리지 않게 탈해왕(脫解王, 재위 57~80)의 시대에는 다시금 신화가 탄생한다. 대개의 나라들이 신화라고 하면 건국신화 한 편이나 챙기는 것과는 달리 신라에는 또 다른 건국신화가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신라는 아직 신화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걸까?
하나는 탈해의 탄생에 관한 신화다. 그는 왜국 동북방 1천 리에 있는 나라의 왕궁에서 알로 태어났다. 다시 난생 설화다. 남편이 알을 버리라고 했으나 아내는 알을 궤짝에 넣어 바다로 보낸다. 동해를 건너면서 알은 궤짝 속에서 부화되어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 부근의 해변에서 어느 할머니에 의해 발견될 때는 이미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졸지에 아이 엄마가 된 할머니는 그 아이의 이름을 석탈해(昔脫解)라고 짓는다. 석(昔)이라는 성은 당시 까치 한 마리가 궤짝 주변에 있었다 하여 까치 작[鵲] 자를 간단히 줄인 것이라고 전하는데, 아마도 이두문이었을 테니 발음 관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혹시 과거에는 과 의 발음이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탈해의 성을 굳이 밝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탈해로부터 비롯된 석씨는 이후 박씨와 더불어 신라 왕실의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성은 박씨, 석씨 외에도 김씨가 있지 않던가? 김씨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성씨가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라의 건국신화가 셋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 또 하나의 시조 이주민 국가였던 만큼 신라는 건국시조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림은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묘사한 작품이다. 나뭇가지에 금궤가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17세기 화가인 조속(趙涑)의 작품인데, 하권에서 보겠지만 조선은 고려와 더불어 신라를 계승한 왕조인 데다 17세기라면 이른바 진경산수화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므로 이런 그림이 그려졌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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